에도시대 유럽과의 교역 장소인 데지마는 개발방식이 서울 지하철9호선과 큰 차이가 없었다.
데지마 안내소에서 받은 한국어팸플릿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다.
"막부는 부유한 나가사키 상인들에게 데지마 건설비용을 부담하게 했다"
데지마는 에도막부가 포르투갈 상인들을 위해 1636년에 만든 인공섬이다. 일본 내 기독교가 빠르게 확산되자 두려움을 느낀 막부는 포르투갈 상인들을 이 섬에만 머물 수 있게 해 일반 일본인과의 접촉을 차단했다. 북한의 개성공단이나 나진선봉 경제특구랑 비슷하달까.
상인들은 데지마를 지은 후 입주자인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매년 임대료를 받아 투자금을 회수하도록 했다고 한다.
‘기독교 포교 저지’를 위한 국책사업에 민간자본을 유치한 셈이다.
임대료를 받았다면 수익률은 얼마였을까?
도쿄대 논문 정도돼야 연구가 있을법 싶었지만 의외로 기사화 된 게 있었다.
데지마를 조성하고 숙소와 창고 등 건물 13동을 건립하는데 들어간 비용은 은 300관(1125kg)이라고 한다. 그리고 네덜란드 상인들은 데지마를 이용하는 댓가로 1년에 은 80관(300kg)을 냈다.
(서울경제 2006년 6월 23일자)
연간 수익률 26.6%.
데지마는 입주 4년만에 원금을 회수하는 알짜 수익성 부동산이었던 셈이다. 나가사키 상인들이 데지마 운영권을 30년만 갖고 갔어도 수익은 은 2만4000관(9만kg), 투자원금의 80배를 얻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데지마는 수익성뿐 아니라 안정성까지 갖췄다. 조성 후 200년간 일본의 독점 무역특구였기 때문이다.
1637년 시마바라의 기독교인 반란을 제압한 막부는 포르투갈인을 추방하고 쇄국령을 내린다. 데지마에는 포교에는 관심없는 네덜란드 상인들이 이주해 왔고 1641년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라는 우량 임차인도 확보했다. 이렇게 데지마는 1850년대 일본이 문호를 개방하기 전까지 일본의 유일한 대외무역 창구로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1855년 일란화친조약으로 네덜란드인이 나가사키로 자유로이 통행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데지마는 쇄퇴 기로에 놓인다. 조약 4년만인 1859년에는 데지마 내 네덜란드 공관이 폐쇄됐다고 한다.
교역특구로서 섬이라는 가치는 없어졌고 데지마 주변은 1904년 간척사업으로 육지화 됐다. 그래서 여행 마지막날 이곳을 찾았을 때는 한 눈에 데지마가 섬이란 걸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지금의 데지마는 1996년부터 나가사키시가 땅을 파내 부채꼴의 섬 모양을 복원한 것이다. 하지만 섬 정면만 비교적 폭이 넓게 파였을 뿐, 후면은 거의 육지와 연결돼 있다.
복원 작업은 현재 진행형이라 데지마와 나가사키를 잇는 정면 다리가 복원 공사중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