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캄파니아주 나폴리현 폼페이
폼페이역 앞에는 유적이 없다
정오가 조금 넘은 시간, 폼페이역 앞 길바닥. 나는 쭈구리고 앉아 배낭을 헤치고 있다.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나는.
잠시 아침으로 돌아가자. 3월 1일 오늘, 사흘간의 로마 일정을 마치고 오전 10시40분 나폴리 중앙역에 도착했다.
폼페이로 가는 2.6유로짜리 사철 표를 끊고, 기다리는동안 이른 점심을 먹었다. 카푸치노 한잔과 크림 크로아상 하나로 때운 아침식사는 금방 꺼진다. 아침을 카푸치노로 때운다는 이탈리아 현지인 따라하기란 쉽지 않다.
점심 메뉴는 번역하자면 '생크림과 프로슈토 햄을 곁들인 토르텔리니(만두형 파스타)'. 딱 예상했던 맛이었다. 한국인 입맛에 이탈리아 요리법은 면은 덜 익혀서 딱딱하고 기본적으로 짰다.
10분전 폼페이역에 도착해 가이드북에 적힌 대로 ‘역에서 나와 2분 가량 걸었다’. 폼페이 유적은 없었다.
다시 가이드북을 살펴보니 ‘폼페이 유적에 가려면 폼페이 스카비(Pompei Scavi)역에서 내려야 한다’고 적혀 있다. 여긴 그냥 ‘폼페이역’이다. 구글지도를 찾아보니 폼페이 유적은 여기서 2km 거리다.
상당한 거리를 걸어야 하므로 짐을 다시 정리하기로 했다. 배낭 하나를 매고도 양팔로 한 보따리를 추가로 안고 나온 터다.
배낭여행자의 탄생
그래서 나는 지금 여기 이렇게 앉아 있다. 인적이 드문 길 한복판에서 부수적인 짐을 배낭덮개 안으로 넣고 침낭 매다는 줄에 매달았다.
하하하.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이게 여행이지.’
배낭을 다시 싸고 나니 진짜 배낭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난 원래도 여행중이었지만 지난 사흘간 로마에서는 어쩐지 ‘여행자라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여행객 티를 내지 않겠다고(어차피 티는 다 날 거면서) 짐은 거의 들고 다니지 않았고, 콜로세움이나 바티칸에서도 사진을 거의 찍지 않았다. 시크한 척하는 관광객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누가 봐도 나는 배낭여행자다. 38리터짜리 묵직한 배낭을 메고, 햇빛을 가리기 위해 검정색 시카고불스 캡을 눌러썼다.
갑자기 신이 나서 배낭 한 구석에 끼어놨던 셀카봉을 처음으로 꺼내 들었다. 앞서 로마에선 사용하기 민망해서 손대지도 않던 물건이다.
셀카를 찍어대면서 폼페이 유적으로의 행군을 시작했다. 마침 하늘도 무척 맑고 따뜻했다. 조금 걸으려니 4명의 한국인 대학생 무리가 보였다. 딱 보기에도 나와 마찬가지로 폼페이역으로 잘못 내린 눈치였다.
“저, 혹시 폼페이 가시는거죠?”
“아, 네 맞아요!”
그중의 한 여학생이 답했다.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그들에게 '폼페이 유적으로 가려면 원래 폼페이스카비역에서 내려야 하며, 유적은 여기서 2km를 가야 한다'고 일러주고 다시 길을 나섰다.
폼페이 마르게리따
조금 가려니 읍내 수준의 마을이 나왔다. Four Seasons란 피자집이 보였는데, 다시 허기가 진터라 곧장 들어갔다. 지금은 오후 1시, 시간은 충분하고 여행객이 급할 게 뭐가 있을까.
나폴리 근처로 왔으니 피자를 먹어보자. 5유로짜리 마르게리따를 시켰다. 피자의 본고장이라 가격도 싸다.
이곳 피자는 토핑 위에 올리브 오일인지 유체가 많아서 만두 육즙을 빨아먹듯 호호록 빨아먹어야 했다. 야외 테이블에서 혼자 피자를 먹고 있으려니 지나가던 중학생 무리 중 한 남자애가 ‘Bon Appettito(맛잇게 드세요)’ 한마디 한다. 깐죽거리는 것일 수도 있지만, 기분 좋게 'Thank you'로 답했다.
피자를 먹으면서도 셀카봉을 사용하며 이 신식 문물의 위력을 실감했다. 식사를 마친 후 피자집 아저씨와도 사진을 찍고 길을 나섰다.
셀카봉을 들고 걷고 있으려니 “셀피족이다” 놀리며 지나가는 차도 있었지만 즐겁게 넘겨 버렸다. 셀카를 찍는 것은 사실이고 난 지금 배낭여행중이니까.
햇볕 좋은 날 유럽의 농촌 마을을 걷는 것은 참 기분 좋은 일이었다. 주황색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오렌지 나무들을 바라보는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배낭여행은 이제 시작이다. 가벼운 발걸음은 폼페이 유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