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지금노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이상 Aug 07. 2023

권태를 넘어 솔직하기 위해서

근본과 다음을 상상하는 일

영화 <더 웨일> 주인공 찰리는 자신이 가르치는 에세이 수업 학생들에게 솔직하라는 말을 남긴다. 솔직하기 위해선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과 솔직함 사이에는 방대한 스펙트럼이 있다. 맛있는 것과 맛없지 않은 것, 사랑하는 것과 싫어하지 않는 것, 추운 것과 덥지 않은 것, 잘하는 것과 못하지 않는 것 등 그 사이에는 들여다보면 볼수록 깊고 넓은 세계가 있다.


왜 쉽게 솔직하지 못할까. 솔직함은 용기와 이어지고, 용기가 필요한 이유는 두려움때문이다.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걸까. 왜 자신을 재단하고 판단하게 될까. 대체 어디에 머물러야 하며, 어디로 향해야 하는 걸까. 나는 삶의 수많은 연속적인 이야기들이 실존적이라고 느끼지만, 실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무척 꺼려진다. 마치 모든걸 다 아는 태도로 설명될까 겁난다. 정작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존재를 들킨 야생동물처럼 도망가버리고 만다. 어떤 것은 보지 않아야 비로소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뒤라스의 소설 <평온한 삶>의 주인공은 권태로부터 야기되는 사건들에 대해 책임을 느끼면서도 필연적 변명으로 도망친다. 권태가 사라져야지만 평온이 찾아올거라 말하지만 사실 권태와 평온은 마치 쌍둥이처럼 똑 닮아 있다. 의미가 있다고 보는지 혹은 의미가 없다고 느끼는지.


나는 어떤 일을 마주하면 다음을 상상한다. 사건의 이유도 떠올린다. 순서가 반대로 되기도 한다. 본질과 미래는 현재라는 뿌리를 공유하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신호를 기다리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짓는 사람을 보았다고 치자.

1) 이따가 친구를 만나서 건넬 농담이 떠올랐다. 빨리 말해주고 싶은 마음에 발길을 서두른다. 역 앞에 서있는 친구를 보고 반갑게 인사한다. 친구가 보자마자 날이 너무 덥다며 하고 싶은 말을 마구 쏟아냈다. 해주고 싶었던 농담을 까먹고 말았다.

2)  누군가 좋은 일이 있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면접을 보러가는 길이었고 오랜만에 밖에 나와서 웃는 얼굴을 연습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말없이 길을 걸었다. 면접 자리에 가자 좋은 일이 있냐고 물은 사람이 앞에 앉아 있었다. 상대가 오늘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냐고 물었다. 그는 어찌되었던 이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이다. 디테일한 캐릭터를 떠올리는 건 나중이다. 나는 상황과 이유, 행동과 서사가 본질적 의미를 부여한다고 느낀다.


일상에서 문득 생각이 파편적으로 떠오른다.  지금까지는 이런 생각들을 굳이 설명하거나 파헤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엔 조금 다르다. 나는 생각을 통해 (분명!) 무언가를 느끼고, 그 안에 있는 무언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본질을 찾고 내면을 파고드는 일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에 서사를 부여하고 그게 오히려 의미를 갖게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아직 솔직하다고 느끼진 않는다.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다.


아즈마 히로키의 <관광객의 철학>을 읽고, 나는 주체적인 객체이면서 객관화 된 주체를 지향하는 중간자의 입장으로 늘 회색 영역을 영유하며 돌아갈 곳이 있는 안전한 여행객을 지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게 어쩌면 새로운 사회의 대안적 정체성일지도 모른다는 주장에 따라 주관이 확장되었다. (작가의 생각에 따라) 그러려면 나는 오배(배달 오류)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가족의 개념을 넘어서 경계를 무시한 소비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는 주장하고 나는 그 주장을 선호한다. 나는 심지어 이미 세상이 그렇다고 느끼기도 한다. 책에서 주장하는 바가 맞는지 틀린지를 판단할만한 지식은 나에게 없다. 그저 즐겁게 읽고 소비하고 있을 뿐이다.


맞고 틀린 것으로 설명하는 세계를 부정하고, 싫고 좋은 것 사이에서 솔직한 감상을 나눌 때 더 풍부해지는 세계가 있다고 믿는다. 막연한 믿음이다. 나는 원인이나 의미, 이유가 없이도 느낌으로 만연해지는 세계가 사람을 더 평온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것마저도 이유를 설명하기 보다 살아감으로써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물론 이것도 시간의 한계 안에서 기능할테지만!) 여튼 그렇다. 선호는 설득이 아니라 공존 안에 있어야 하는 일이다. 그래야 우린 권태로운 가식이 아니라, 평온한 솔직함을 누릴 수 있을테니까.


누군가의 좋은 것과 누군가의 싫은 것이 솔직한 비판과 함께 무해하게 공존할 수 있는 세계라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수다쟁이가 되기위해 노력할 수 있을 것이다. (바라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매거진의 이전글 필요한 이기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