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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쌩전 Jul 09. 2024

안아픈 고생은 고생이 아니었음을

넋두리 다이어리 11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그건 이제 죽은 문장이 되었다. 꺼내기만 하면 꼰대가 되는 문장 같은 말. 그 말이 함유 하고 있는 뜻이나 의미 같은 것을 곱씹어보기도 전에, 아 그거는- 하고 이미 인상이 굳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곱씹어보면,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건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수없이 많이 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거나, 해가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거나 하는 얘기 말이다. 그러다보면 고생이나 고난의 시간들이 성장과 성공을 위해 필수라는 건 알 수 있다. 하지만 알면, 좀 덜 힘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알아도 알아도 고난은 피할 수가 없을까? 무조건 아파야만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없다. 애초에 답을 얻기 위해서 생각한 것도 아니다. 그냥 지금의 고난이, 미래의 희망을 통해서 무뎌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떠올랐던 게 시작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떤 함정에 갇히고 말았다. 아프고 힘들고 지쳐야만 고난과 고통의 과정을 겪는 일인데, 내가 뒤이어 확실한 보상이 있다고 그 아픔과 고난에 진심으로 몰입하거나 고생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보상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일종의 불안? 혹은 불신? 같은 것 말이다. 알면서도 지나가야하고, 알면서도 아픈 것. 알아도 알아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것, 그런 것을 꼭 관통해야만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최근 작을 내면서 발표했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창작자의 그늘과 고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주변에 있는 사람도 미야자키 감독이 창작을 위한 시간을 보내는 걸 보고, 그 사람은 대체 언제 행복한 걸까? 왜 사는 걸까? 라고 궁금해하기도 한다. 작품을 만드는 일에 몰입하는 일은 결국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인데, 자기 자신이 거기서 잊혀질 정도로 몰입하고 분노하고 질투하고 매몰되어야만 나오는 어떤 것이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거기서, 나도 그게 알기 때문에 거기까지 가려고 하는 거야, 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고 싶지 않지만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나이가 여든을 앞둔 거장의 입장에서도 매번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당연한 것처럼 해내는 당연한 일에는 아무도 감동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모두가 미야자키 감독 같은 창작자도 예술가도 아니다. 근데 왜 사람은 계속해서 그렇게 고통 받아야만 하는가.


윌리엄 모리스의 경우는 일상 예술, 혹은 생활 예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의 노동과 삶 속에 예술이 존재해야만 하고, 오히려 생활을 영유하기 위한 노동은 그런 예술과 휴식을 누리고 유지하기 위한 만큼만 존재해야 한다고 하기도 한다. (책 한 권 읽었을 뿐이기 때문에 정확한 해석은 아닐 수 있음을 미리 적어놓는다.) 이제 모든 것이 산업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냥 자연스럽게 해냈던 장식적인 요소들과 개인이 추구하던 아름다움 같은 것들이 모두 노동의 시간과 재화로 가치 판단 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오히려 일상에서 예술의 가치와 활동의 시간을 빼앗아 버렸는지도 모른다. 사실 돌아보자면, 인간으로서의 삶은 오히려 일상에서 자기만의 예술을 추구하던 시간으로 채울 수도 있는 것이다. 꼭 세상을 감동시키고 거장이 되고 부자가 되기 위한 목적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처음 하려고 했던 말에서 좀 방향이 틀어진 것 같다. 하지만 하고자 하는 말은 이거다. 결국 뭔가를 뛰어넘는 것은 계속해서 자기 역치를 넘어야만 하는 일이라는 거다. ‘일’이란 무엇일까. 일은 노동한 시간만큼 재화로서 교환되는 명확한 활동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남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는 그렇다. ‘일’은 일단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버는 행위라는 건 기본으로 깔려있고 그 위에 하나씩 의미의 레이어가 쌓여가는 일이다. 세상에 기능하기 위한 무언가를 만들기도 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관의 관계나 네트워크 안에서 인정받거나 치열하게 몰입하면서 생겨나는 순간순간의 스파크이기도 하고, 또 일종의 사명이나 희열, 혹은 성장과 성취를 위해 달려야만 하는 어떤 것이기도 한 것이다.


운동에선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 ‘점진적 과부하’라는 걸 해야한다는 말이 있다. 근육에 스트레스를 점점 늘려가는 과정을 통해서 근력이 생긴다는 말인데, 쉽게 말하면 푸쉬업을 10개부터 시작해서 1개씩 늘려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미 한계치까지 운동을 한 다음이 진짜 근육이 생기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럼 이미 머리로는 알고 있다. 여기서 하나를 더 해야만 근육이 커진다는 걸, 그리고 그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체가 ‘그래? 그러면 힘들지 않게 하나만 더 하자!’ 라고 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육체는 육체 나름대로 비명을 지르고, 심지어 뇌도 나에게 이야기 한다. 야 그만해, 그만해도 충분해. 솔직히 지금까지 한 것만으로도 안한 것보단 훨씬 잘했잖아. 맞는 말이다. 뇌는 언제나 맞는 말만 한다.


하지만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다보면 나는 나를 넘어설 수가 없다. 나를 세계는 결국 내가 주체가 되어 구성되어 있다. 지금 내가 경험하고 느끼고 있는 것은 ‘나’라는 필터가 없이는 인지될 수 없고, 심지어 성립할 수조차 없다. 나는 끊임없이 나의 세계로 수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가장 힘든게 무엇일까? 그 세계 밖에 있는 것을 수용하는 일이다. 낯선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은 세계가 더 단단하고 넓고 큰 사람일 수록 어려운 법이다. 세계를 넓히기 위해선 자꾸 외부의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소화하려는 노력을 해야한다. 여행이 그렇다. 낯선 문화와 세계에서 그들의 생활과 일상, 먹어보지 못했던 것과 마셔보지 못한 물을 먹고 공기와 풍경을 본다. 한번 그렇게 보고 받아들인 세계는 이제부터 나의 것이 된다. 그러기 위해서 수시간의 비행과 공항의 기다림과 알지 못하는 사회의 시스템을 경험하는 두려움을 이겨내야만 하는 것이다.


힘들면 힘들수록 나는 새로워질 거라고 믿을 수 밖에 없다. 어차피 희망은 다 허구에 가깝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도 픽션에 가깝지만, 그것은 어차피 지나간 일이기 때문에 시간의 풍화를 거쳐 어차피 미화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미래는 반대다. 희망어린 미래에서부터 현실로 다가올 수록 무조건 점점 더 좋은 것들을 깎아내야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지나고 나면 나에겐 다시 미화된 기억으로 살이 붙어 내 세계를 더 풍부하게 조성할테니까, 나는 계속 해야만 하는 것이다. 뭔가 끝나고 나면, 또 다른 게 시작될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귀찮아도 그냥 하는 것이다. 거창한 이유 같은 건 필요없다. 아프니까 고생인거고, 고생하니까 지금의 내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냥 하는 것이다. 할 수 밖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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