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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룸펜 Oct 05. 2016

진평왕릉과 황복사지 삼층석탑, 보문뜰의 보물들


가고 또 가고


  좀 유치하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질문을 한다고 치자. 당신이 경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고분은? (살짝 고민하는 듯) 봉황대. 제일 좋아하는 탑은? (약간 고민하는 듯) 용장사지 삼층석탑 아니면 감은사지 삼층석탑. 그럼 당신 생각에 역사적으로나 미술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유적은?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 불국사? 석굴암? 그렇다면 당신이 경주에서 제일 많이 간 곳은? 당연히 진평왕릉! 


  가장 좋아하는 고분도 아니고, 가장 중요한 유적도 아닌데 어째서 진평왕릉을 가장 많이 갔냐고? 그러니 이제 진평왕릉이 있는 보문뜰로 가보자. 아무리 걷기를 좋아해도 경주시내에서 진평왕릉까지 걸어가긴 무리다. 보문단지 가는 버스를 타고 분황사를  지나 남촌마을 입구에서 내리자. 마을 쪽으로 조금만 걸어올라 가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논밭이 보문뜰이고,  마을 어귀에 오래된 숲처럼 보이는 곳이 바로 진평왕릉이다. 


  진평왕릉을 처음 알게 된 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서. 몇 권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유홍준 선생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셨던 정양모 선생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선생은 진평왕릉에 와봐야 진정한 신라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고 하셨고, 유홍준 선생은 몇 차례나 이곳을 와 본 후에 그 말씀을 이해하게 되었단다. 도대체 유홍준 선생같은 답사의 달인도 몇 번을 와봐야 그 진가를 아는 유적이면 얼마나 대단한 곳일까. 


  그런데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처음에 와보고는 '이게 뭐지?'하는 기분이었다. 그냥 나무로 둘러싸인 평범한  능일뿐. 물론 나무들이 좀 심상찮아 보이긴 했지만 멋진 소나무로 둘러싸인 왕릉이 경주에 어디 한두 군데인가. 한마디로 심심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집에 돌아와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바로 진평왕릉이었다. 얼마 후 다시 경주에 갔을 때 또 들렀다. 그리고는 사랑하게 되었다.   


나무들이 좀 멋있긴 하지




평양냉면같은 유적


  진평왕릉이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좀 옹색해진다. 석굴암이나 불국사처럼 고고학적으로나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유물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저 능과 그 주변의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좋고, 왕릉 앞으로 보이는 보문뜰과 그 너머 낭산, 남산이 어우러지는 풍경을 한없이 사랑한다고 말해야겠지.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곳을 추천할 땐 평양냉면 같은 유적이란 설명을 덧붙인다. 처음에는 밍밍한듯한 평양냉면을 몇 번 먹다 보면 그 맛을 잊을 수 없게 되듯이, 이 곳 진평왕릉도 약간은 심심해 보일 수 있지만 올 때마다 더 좋아질 것이라고. 


  왕릉 자체는 그리 특별한 게 없다. 김유신 장군의 능처럼 십이지가 조각된 호석도 없고, 괘릉처럼 잘 생긴 무인상, 문인상도 없다. 그렇게 무덤은 무덤의 주인공과 참 많이 닮아있다. 진평왕. 신라 제 26대 왕으로 치세 기간만 54년이다.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에서 미실에게 마구 휘둘리는 무능한 왕으로 나오지만 실제 역사에선 그렇지 않다. 진평왕이 다스렸던 7세기 초는 전란의 시기. 점점 세력을 키워가는 삼국 간의 쟁패가 심해지는 상황이었다. 그런 시기에 왕은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관료체계를 정비하고 불교를 진흥하는 등 내치에도 힘쓴다. 그렇게 오랜 재위 기간 동안 왕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확고한 토대를 쌓았다. 그런 노력은 딸인 선덕여왕에게로 이어지고, 이후 김유신, 김춘추 등의 불세출의 인물들이 등장하며 신라는 백제, 고구려를 꺾고 삼한을 통일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일견 평범해 보이는 왕릉이 진흥왕, 태종무열왕, 문무왕과 같이 눈부신 업적을  쌓기보다는 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다진 진평왕을 무척 닮아있다. 


호석도 없고, 무인상도 없고


  그런 진평왕릉이지만 찾는 이는 거의 없다. 몇 년 전에도 혼자라고 생각하고 느긋하게 사진도 찍고 탑돌이 하듯이 나무와 능 주변을 거닐고 있는데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 보니 나무 그늘 밑에서 비구니 스님 세 분이 앉아 계시는 게 아닌가. 한분은 스마트폰으로 셀카도 찍으시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깔깔깔 웃으시기도 한다. 망중한.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좀 더 다가가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휴식을 방해하는 것 같아 멀리서 찍었다(이럴 땐 단렌즈가 좀 원망스럽다ㅠㅠ). 


스님들이 어찌나 발랄하시던지




보문뜰을 걷는 즐거움


자, 이제 보문뜰을 지나 이제 황복사지로 가보자. 이 들판을 걸었던 때를 생각하면 언제나 콧노래가 나온다. 보문뜰은 경주에서는 보기 드물게 기찻길이나 차도로 끊기지 않고 신라시대 모습이 오롯이 남아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 드넓은 논밭 아래에는 신라시대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묻혀 있겠지.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며 모내기가 끝나 푸릇푸릇한 들판 사이 농로를 여유롭게 걸었으니 어찌 즐겁지 않았겠나. 제발 개발이니 뭐니 하는 명목으로 파헤쳐지지 않고 오래오래 보존되었으면 하는 풍경이다. 그 너머로 언덕처럼 보이는 산이 낭산. 진평왕의 딸 선덕여왕의 무덤이 저 산 넘어 남쪽 기슭에 있다. 죽어서도 부모는 부모인 걸까. 천년이 넘는 오랜 세월, 아버지는 한결같이 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아버지와 딸


황복사지 삼층석탑에 도착.  이 탑이 있는 곳이 예전부터 황복사가 있던 자리라는 전설이 있어 그렇게 불리고 있다. 황복사는 652년(진덕여왕 6) 의상이 출가한 사찰로 알려져 있을 뿐 건립 연도와 창건자 등 자세한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1943년 이 석탑을 해체하여 복원할 때 나온 사리함에서 사리함 뚜껑의 안쪽 면에 새겨진 명문(銘文)에 따르면, 신라 효소왕이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692년에 이 탑을 세웠다고 한다. 


여기서도 비구니 스님을 만났었지


건립 연도가 692년이니 감은사지 삼층석탑보다 조금 늦게 세워진 탑이다. 그래서인지 양식상으로 약간의 변화가 확인된다. 일단 규모가 작아지고, 기단부의 각 면에 새겨진 가운데 기둥이 3개에서 2개로 줄어들었다. 탑신부도 여러 개의 돌로 짜 맞추지 않고 몸돌과 지붕돌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처럼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고선사지 삼층석탑이나 감은사지 삼층석탑에서 시작된 삼층석탑의 건축양식이 조금씩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유물이다. 


그렇지만 그런 기술적인 설명보다 석탑 앞에서 내가 금방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것이 훨씬 좋다. 저 들판 아래 고이 간직되어 있는 신라 천년의 역사와 신라인들의 삶의 이야기는 얼마나 무궁무진할 것인가. 그러니 어쩌면 보문 뜰의 보물은 진평왕릉이나 황복사지 삼층석탑이 아니라 보문 뜰 자체가 아닐까.


오래오래 이 모습 그대로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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