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뜬금없긴 하지만 영어 단어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바로 정관사 'the'. 다 아시다시피 'the'는 이미 한 번 언급했거나 쉽게 알 수 있는 사람, 사물 앞에 붙인다. 그렇지만 가끔 유일하거나 정말 유명한 어떤 것을 지칭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1989년 NBA 프로농구에서 마이클 조던이 성공시킨 그 유명한 버저비터를 'the shot'이라고 부르거나 영국 여왕을 그냥 'the queen'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갑자기 재수 없이 웬 영어냐고? 오늘 살펴볼 유적을 이렇게 소개하면 좀 폼 날 것 같아서. 일연 스님의 말씀처럼 경주에는 기러기처럼 탑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전국 방방곡곡에 수많은 탑들이 있었다(오죽했으면 우리나라를 석탑의 나라라고 했을까). 그중에서는 정림사지 삼층석탑, 미륵사지 석탑. 석가탑, 다보탑과 같이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걸작들 또한 많았다. 그렇지만 나에게 있어 유일하다는 의미를 가진 정관사 'the'를 붙여 '그 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다. 바로 감은사지 삼층석탑이다. 그리고 그 탑이 바라보고 있는 감포 앞바다도 당연히 '그 바다'라고 불러야겠지. 그러니 이제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만나러 감포 앞바다로 가자.
옛날에는 감은사지에 가려면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했는데 3년전에 갔더니 터미널 길 건너에서 시내버스 150번을 타야 했다(시내버스라고 해도 거의 한 시간 간격으로 운행되고 감포행이라고 적혀 있는 100번 버스는 감은사가 아니라 감포항으로 간다. 착오 없으시길).
버스가 황남 사거리에서 좌회전, 경주역에서 우회전하여 시내를 벗어나면 황룡사, 분황사, 명활산성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멀리 보문호가 보인다. 경주 엑스포의 이상하게 생긴 건물들을 지나면 버스는 이내 덕동호로 올라서게 되는데 고선사지 삼층석탑도 이 호수가 생기면서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덕동호를 왼쪽에 끼고 달리던 버스는 추령 계곡을 힘겹게 올라가 터널을 통과한다. 고개를 내려서 계속 달리다 보면 오른쪽으로 장항리 절터 가는 길과 왼쪽으로 기림사와 골굴암 가는 길을 지난다. 나같이 차가 없는 뚜벅이들은 아쉽지만 패스. 양북면 소재지를 지나 경주에서 출발한지 40여분, 대종천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던 길이 어느새 동해바다를 향해 직진으로 달리기 시작하고 차는 이내 감은사지 정류장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길 건너 언덕 위에는 '그 탑' 감은사지 삼층석탑이 모습을 나타낸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데도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예전에는 절터 옆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었는데 탑 복원 공사하면서 정면에도 진입로를 만들었나 보다. 원래는 대종천이 넓어 감은사 앞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니 그 옛날 신라인들은 배를 타고 와서 지금의 계단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 경내로 들어갔으리라. 계단 밑 축대 앞으로 늪지대가 보이는데 예전 대종천의 흔적인 것 같다. 천오백 년 전 그때 사람들처럼 나무계단을 올라 경내로 들어섰다. 그 탑이 눈 앞에 있다.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냥 보자.
한참을 탑 주위를 맴돌다 금당지로. 돌로 된 구조물을 쌓고 그 위에 주춧돌을 얹어놓았다. 하여 주춧돌 밑이 비어 있다.(보통 건물들은 바닥에 주춧돌을 놓기 때문에 이렇게 빈 공간이 생기지 않는다. 사실 이런 구조는 말이 안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시라. 기둥을 세우는 주춧돌이 공중에 붕 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누가 이렇게 불안정하게 건물을 짓는단 말인가.) 이는 <삼국유사>에서 용이 된 문무왕이 바닷에서 나와 금당에 드나들었다는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라 하겠다.
금당터 뒤로 갔다. 잘생긴 나무 밑에 앉아 탑을 바라봤다. '아, 좋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다시 가까이 다가가서 봤다. 보륜 없이 찰주만 머리에 이고 있는 석탑이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다. 이번에는 탑돌이 하듯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하염없이 쳐다본다. 도대체 무슨 감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그러니 강우방 선생은 세상의 수많은 탑들 중 오로지 이 탑 앞에서만 압도되는 느낌을 받는다 했고, 유홍준 선생은 허락만 된다면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로 지면을 채우고 싶다고 했다. 그래도 태생이 먹물인지라 뭔가 한마디는 해야 될 것 같기에 예전에 한창 경주에 미쳐있을 때 써놓은 감은사탑에 대한 글을 실어본다.
감은사터 삼층석탑은 위대하다. 높이 13미터로 현존하는 신라의 탑 중 가장 높은 석탑, 682년이라는 건립 연도가 확실한 삼층석탑의 시원 형식 등 감은사터 삼층석탑의 중요성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학술적 전문적 설명들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석탑 앞에서 섰을 때 느끼는 전율을 설명하기에는 한없이 부족하다. 단지 압도적으로 위대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7세기 후반, 신라는 오랜 삼국 간의 항쟁에서 승리하고,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보이던 세계 최강대국 당나라마저 이 땅에서 몰아내며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하였다. 외세를 물리쳤다는 자부심과 당당함, 드디어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낙관과 희망, 그리고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열정이 소용돌이치던 시기였다. 하늘을 찌를 듯한 찰주를 이고 있는 이 위대한 석탑은 당시 욱일승천하던 신라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감은사터 삼층석탑에서 받는 감동은 건립 당시의 시대정신과 이를 만들었던 신라인들의 이상을 살펴보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감은사터에는 죽어서도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던 문무왕의 호국의지와 그것을 이어받은 아들 신문왕의 효심이 곳곳에 배어 있다. 특히 감은사지 발굴 결과 금당의 초석 밑에서 빈 공간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죽은 문무왕이 나라를 지키는 용이되어 감은사를 드나들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부분으로 먼 길을 달려온 여행객의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다시 읽으니 완전 잘난 척하면서 쓴 글이구만. 그럼에도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좋다! 좋다! 좋다!
다음은 이견대로. 감은사지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걸린다. 이견대 자체는 조선시대 중기 건물을 복원한 것이라 특별한 게 없다. 하지만 이견대에서 바라보는 대왕암은 언제나 특별하다. 예전엔 앞에 전깃줄이 있어 거슬렸던 기억이 나는데 언제 철거했나 보네.
잠깐 쉬었다 대왕암으로. 보통은 왔던 길을 돌아가서 대종천을 지나는 큰 다리를 건너 해변 쪽으로 가곤 했는데 몇 해전에는 좀 다른 길로 가보기로 했다. 이견대 오기 바로 직전 내리막길이 하나 있고 '동해구(東海口)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횟집타운으로 가는 길이라 신경도 안 썼는데 '동해구'라는 이름이 예사롭지 가 않았다. 동해로 가는 입구라... 이리로 가면 대왕암 가기 위해서 대종천을 어떻게 건널지 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왠지 가보고 싶더만. 안 되면 다시 돌아오면 되고. 그런데 진짜 잘 한 결정이었다. 우현 고유섭 선생을 기리는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비석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우현 고유섭(1905∼1944).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한국미술사 연구의 태두로 꼽히는 분이다.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는 고유섭 선생의 수필 제목으로 그의 제자들이 선생의 반일 의지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실제 선생은 1940년 발표한 ‘경주 기행의 일절(一節)’에서 “경주에 가거든 문무왕의 위적(偉蹟)을 찾으라. 구경거리의 경주로 쏘다니지 말고 문무왕의 정신을 기려 보아라”고 권했다고 한다. 칼의 힘이 아닌 문화의 힘으로 일제에 대항했던 망국의 미술사학자에게 문무왕의 호국정신은 얼마나 많은 것을 시사했을지 짐작이 간다. 선생의 비석 앞에 서서 긴 여정을 마치고 동해로 흘러들어가기 직전의 대종천을 바라본다.
근데 건너려고 내려와 보니 만만치가 않네. 그나마 폭이 제일 좁아 보이는 곳을 골라 신발이랑 양말을 반대편으로 던졌다. 그리고 입수. 생각보다 물살이 세다. 옆에서 낚시를 하고 계신 강태공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시네.
천을 건너니 왼쪽 저 멀리 대왕암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대종천이 보인다. 고려시대 몽고군이 황룡사 9층 목탑을 불태우고 경내에 있던 배로 황룡사종을 동해로 옮기려다가 이 곳에서 빠뜨려버렸다고 한다. 하여 클 대(大)자, 종 종(鐘)자를 써서 대종천. 그렇게 빠진 종이 동해 바다로 흘러들어가 비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면 인근 마을 사람들이 '웅웅'하고 종소리를 들었다고도 하고, 감포 앞바다에서 작업하던 잠수부가 폭풍 치는 날 바다에서 종소리를 들었다고도 한다. 믿거나, 말거나.
대왕암. 죽어서도 동해의 용이 되어 왜구를 물리치겠다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화장 후 남은 뼈를 이곳에 뿌렸다고 한다. 한 때는 인공시설이 있어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수중왕릉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해프닝으로 끝났고, 지금은 산골터라고 보는 견해가 다수를 이룬다. 보통 감은사지랑 감포 앞바다는 겨울에 왔었는데 몇 해전 초여름에 오니 바다도 푸르고 하늘도 푸르러 걷기 좋았다. 물가에서 신나게 노는 아이들 모습 또한 보기 좋았고. 내물왕릉에서도 그랬지만 이상하게 경주의 유적지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면 묘하게 대비를 이루면서 임팩트가 강해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