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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룸펜 Sep 27. 2016

서남산 걷기 : 나정에서 포석정까지

역사의 시작과 끝

  꽤 오랫동안 남산을 둘러보고 있는 듯 하다. 그 마지막은 서남산.  남산 종주와 동남산 답사가 불교유적 중심이라면 서남산에서는 신라 역사와 관련된 유적들이 중요하다. 나정, 창림사, 포석정. 그리 떨어져 있지 않은 이 유적들에서 우리는 신라 천년 역사의 흥망을 드라마틱하게 살펴볼 수 있다.  




신라역사의 첫 날


  우선 신라 역사의 첫 날을 보기 위해 나정으로 가자. 나정가는 버스는 대릉원 옆 네남사거리에서 500번 버스를 타면 된다. 차에 올랐다. 남산 가는 버스라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다. 차는 금방 오릉을 지나 나정 입구에 도착. 물론 내리는 사람은 나 혼자뿐.     

 

  나정에 들어섰다. 많이 변했네. 예전엔 보호각 안에 조그만 우물과 시조 유허비가 소나무 숲에 쌓여 아늑했는데, 발굴 조사하느라 나무들을 다 잘라버려서 좀 어수선하다. 하여간 이곳이 바로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 탄강 신화의 현장으로 신라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발굴 전후 모습


  박혁거세 탄생과 관련된 내용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나온다.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기본적인 내용은 동일하다. 즉, 이주민인 혁거세 집단이 기존 세력들의 추대를 받아 나정 근처 서남산 기슭에 사로국을 건국했다는 것. 그런데 이를 역사학자들은 팩트가 아닌 신화로만 받아들인다. 왜? 기본적으로 그분들은 <삼국유사>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부정하니까. 실증주의라는 탈을 쓴 일제 식민사학의 잔재라고나 할까. 하지만 2000년대 초반 실시된 나정 발굴은 이런 주류 역사학계의 인식을 뒤엎을 수 있는 것이어서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발굴조사를 둘러싼 팽팽한 논쟁


  조사 결과 중 중요한 내용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제사유적으로 보이는 팔각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그 밑의 문화층에서는 더 오래된 시기의 우물터와 이를 보호하기 위한 해자, 목책 구멍 자리 등 다양한 시설들이 발견되었다. 게다가 이 우물터 옆에서 기원전후 제사유적에서 많이 발견되는 두(豆) 형 토기도 나왔다고 한다. 말로 해봐도 이해가 잘  안 될 것 같다. 도면을 보자.     

                                                                                                                                        

출처: 네이버 이미지


  이제 이해가 좀 되시는지. 우선 한 변이 8m인 팔각형의 건물이 보이고, 그 아래 남동쪽으로 흰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더 오래된 유구이다. 그 중 중앙에 빨갛게 처리된 부분이 우물터이고 그 주위로는 기둥자리, 해자 등이 확인된다. 발굴팀은 원래 우물터가 기원전후에 건립되었다가 5세기경 그 우물을 메우고 팔각형의 건물을 지었으며, 7세기에 다시 한번 개축된 것으로 보고 있다. 건물의 성격은 당연히 제사유적. 그런데 이는 기원전후 혁거세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지었으며, 5세기 말 시조가 탄강한 곳에 '신궁'을 건립했다는 <삼국사기>의 나정 관련된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조사 직후에는 이곳이 역사서에 기록된 나정과 신궁이 맞으며 따라서 박혁거세가 이곳에서 탄생했다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 맞다는 고고학적 증거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었다. 그러나 곧 기원전후의 우물터가 우물이 아니라 기둥을 세우는 자리라는 타당성 있는 제기되어 이곳은 나정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       


  발굴조사 결과에 대해 이렇게 팽팽히 맞서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곳이 초기철기시대 이후 중요한 제사유적으로 사용되어져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든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발굴을 통해 이곳이 나정이나 신궁이 아닐지라도 기원전후 신라의 전신이었던 사로국 건국의 무대였다는 점만큼은 밝혀졌다고 본다. 또한 서울 풍납토성 발굴과 함께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역사적 기록으로 인정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궁금한 게 너무 많다. 6부의 촌장들 또한 토착민이 아니라 도래인이었을 텐데 왜 스스로 나라를 세우지 못했을까? 또 다른 이주민 집단이었던 박혁거세는 정말 기존의 6부의 세력들과 다툼이 없었을까, 그만큼 강력한 집단이었을까? 혁거세가 처음 등장한 것이 B.C. 69년인데 그로부터 10여 년 후인  B.C. 57년에 사로국이 개국된다. 그 10여 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정말 6부의 추대를 통해 아름답게 나라를 세웠을까?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나오는 짧은 기록을 읽고 또 읽으며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해보려니 머리에 쥐가 나려 한다.     


  이처럼 신라 건국과 관련된 중요한 유적이지만 현장을 보면 좀 우울하다. 발굴 지역을 흙으로 메워두었을 뿐 잡초가 무성한 폐허. 방치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조사 끝난지도 오래된 것 같은데 경주시는 이 중요한 유적을 언제까지 이 상태로 내버려둘런지...          


정작 이런 곳은 폐허로 남겨두면 안되는데


6부 촌장들의 사당을 지나


  나정을 나서 5분 정도 걸어가면 양산재. 길 양옆으로 잘 생긴 벚나무가 도열하듯 서있다. 4월에 벚꽃비가 내릴 때 이곳에 오면 백마가 울부짖으며 하늘로 올라가고 알에서 신성한 아이가 태어나는 <삼국유사>의 이야기들과 함께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겠지. 양산재는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했던 6부 촌장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아쉽게도 문이 굳게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순 없었다.   


벚꽃필 때 오면 좋겠다


다음은 사로국 최초의 궁궐터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창림사로. 6월 초 막 모내기를 끝낸 동남산 아래 마을 풍경이 정겹다. 그 너머로  산 기슭에 석탑 한 기가 홀로 서 있는데 그곳이 바로 창림사지다. 보이시는가?


보일락 말락


  사로국, 혁거세, 삼국사기, 삼국유사... 창림사 가는 길은 거창한 역사의 현장 같지만 실은 한적한 시골길이다. 논 사이로 난 길 시멘트 농로를 걷다 보면 남간사지에 다다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당간지주. 당간지주란 사찰에서 불교의식이 열릴 때 세우는 깃발을 꽂은 기둥 즉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두 개의 돌 받침대를 말한다. 보통 당간지주 위쪽에 당간을 고정하기 위한 간구가 있는데 남간사지 당간지주는 특별하게도 십자형으로 되어있어 주목을 끈다.   


훤칠하게 잘 생겼다



  

 사라진 도읍

   

  남간사지를 나와 조금만 걷다보면 왼쪽 언덕 위로 석탑이 보인다.바로 창림사지. 이곳이 바로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 최초의 궁궐이 있던 곳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 한  기뿐. 그나저나 이곳도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나 보다. 나무들이 다 잘려 있어 더욱 휑하게 보인다.  


이곳이 궁궐이었는지 당신은 알고 있겠지


  개인적으론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믿으니까 이곳이 사로국의 궁궐지라는 견해를 지지한다. 그렇다면 혁거세는 왜 이곳에다 궁궐을 지었을까? 석탑 앞에 서서 바라보니 그 이유를 알겠다.   


마을 정도 규모였으면 먹고 사는데 지장은 없었겠다


  뒤로는 남산, 앞으로는 서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지형. 햇볕 잘 들고 들판이 넓어 농사짓기에 그저그만이다(21세기인 지금도 대부분이 논밭이니 그 옛날에야 말할 필요도 없었겠지). 적의 움직임을 잘 살필 수 있다는 것은 덤. 역사서에 따르면 혁거세가 나라를 세운 것이 기원전 57년. 꼭 그때가 아니더라도 기원전후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는 않겠다. 당시에 국가라고 해봤자, 지금의 마을 정도의 규모가 아니었을까(경복궁같은 으리으리한 규모의 궁궐을 생각하면 안되겠지). 그러니 이 정도면 한 나라의 도읍으로 삼기에는 최적의 입지. 잠시 쉬면서  그때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러나 눈 앞에 보이는 풍경은 목 잘린 귀엽게 생긴 쌍거북, 흩어진 주춧돌들, 그리고 덩그러니 서있는 석탑  하나뿐. 그렇지만 왠지 마음을 움직이는...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완벽한 페허


  신라 역사의 첫 날을 봤으니 이제는 그 마지막을 볼 차례. 포석정으로. 창림사 내려오니 곧 마을이 나온다. 그 초엽에 있는 집 벽에 예쁜 벽화와 함께 '삼릉가는길'이라고 친절하게 적혀있네.


다시 힘을 내서 열심히 걸어봐야지



  

천년 왕국의 최후

 

  마을 지나 포석정에 도착. 신라 최초의 궁궐은 폐허가 되어 인적 없이 방치되어 있는데, 신라 멸망을 상징하는 이곳은 깔끔하게 꾸며져 연휴를 맞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아이러니.  유상곡수연을 즐겼다는 그 유명한 수로곡석을 실제로 보긴 처음이다. 여기서 927년 경애왕은 술 마시고 춤추고 놀다가 견훤의 군대가 들이닥치는 바람에 자살을 하게 되지. 실질적인 신라의 멸망.          


  최근에는 이곳이 왕족이 연회를 즐겼던 곳이 아니라 중요한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공간이었으며, 경애왕은 흥청망청 놀다가 비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자 제를 올리던 중 견훤에게 희생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긴 그 추운 음력 11월, 아무리 제정신이 아닌 왕이라도 그 무시무시한 견훤이 쳐들어오고 있는데 여기서 한가롭게 술 마시고 있었겠냐고.     


술 먹고 놀았을까 제사를 지냈을까


  어찌 되었던 지금 이곳에선 망국의 비애랄까, 뭐 그런 슬픈 감정은 전혀 생기지 않는다. 그건 나뿐만이 아니어서, 대부분 가족 단위로 온 관광객들은 수로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 찍고 급하게 자리를 뜬다. 다음엔 어딜 가시길래 그리도 급히 떠나는지...     


  나정부터 이곳 포석정까지 걸어서 얼마나 걸렸을까. 쉬지 않고 걸으면 약 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차를 이용한다면야 10분 만에도 오겠지. 천 년 역사를 이어 온 신라의 시작과 끝이 이렇게 지척 거리에 있다니 묘한 기분이 든다. 우연의 일치인지 혁거세가 탄생한 나정과 죽어서 묻힌 오릉 또한 걸어서 15분 정도밖에 안 걸린다. 게다가 삶과 시작의 공간보다 죽음과 멸망의 공간이 더욱 잘 꾸며져 있는 것도 묘하게 댓구를 이루는 듯하고.  포석정 한편 벤치에 앉아 사람의 삶과 죽음, 역사의 시작과 끝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서남산 답사를 마무리했다.  




  여유가 있는 분들을 위해 한군데 더 소개한다.  바로 배리삼존석불. 포석정 나와 삼릉이 있는 남쪽으로 가다보면 있다. 대강 포석정과 삼릉 중간 정도 되겠지. 예전에는  세 분의 부처님이 시시각각 변하는 햇살을 받아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이 유명했는데, 내가 갔을 때는 보호각 안에 모셔져 그런 미소를 볼 수 없어 안타까웠다. 그래도  두리뭉실 정겹게 생긴 불상들이 이 경주 시골마을 어른들 모습같이 친근해 보기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 친근한 미소는 볼 수 없지만




  이렇게 해서 남산을 대강이나마 둘러본 것 같다. 사실 좀 걱정이다. 남산에 불국사나 석굴암처럼 화려한 유적이나 유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쭙잖게 얕은 지식으로 남산이 최고라고 떠들어댄 것 같아서.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다. 마음이 왠지 허하고 일상이 힘들 때 가방 안에 물 한병, 사과 한 알 넣고 남산으로 가시라. 남산 기슭에 난 시멘트 농로를 따라 발에 채이는 토기 조각, 기와편들에 눈길도 주면서 천천히 걸어보시라. 가슴 한 켠이 부풀어 오르며 다시 힘겨운 일상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힘을 받아가시리라. 나 또한 그랬으니까.


그 산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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