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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룸펜 Sep 27. 2016

동남산 걷기 #3 : 감실부처에서 윤경렬 선생 고택까지

수줍은 처녀 같은

  부처바위를 나와 갈 곳은 불곡 감실석불좌상. 우리가 보통 '감실할매부처'라고 부르는 그 유명한 불상이다. 유홍준 선생도 <나의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일제시대에 한 일본 청년이 이 불상을 보고 감동받아 텐트를 치고 밤을 새운 에피소드까지 소개하면서 상찬한 남산의 간판 스타라 하겠다. 그런데 난 아직 이 불상을 현장에서 본 적이 없다. 꽤나 자주 경주에 가서 왠만한 유적은 다 가봤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이 곳에 한 번도 들르지 못한 것이 마음 한편에 부담으로 남아 있었다. 2014년에 동남산을 둘러보기로 한 것도 바로 이 불상 때문이리라.   




밀린 숙제를 마치다


  탑골에서 나와 조금만 걷다 보면 불곡이 나온다(불곡이란 지명 또한 이 부처님 때문이겠지). 불곡 감실석불좌상 표지판을 확인하고 관광마차를 끄는 말 사육장을 지나쳐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데 유홍준 선생의 책에 이 부처님을 보러 가는 길이 어찌나 어렵다고 나와 있는지 살짝 긴장이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제는 가는 길이 정확히 표시되어 있고 나무다리도 설치되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울창한 산죽 사이로 난 길을 지나자 도착. 아, 드디어 왔구나... 


밀린 과제를 끝낸 기분


  감실 안에 조용히 앉아 계신 모습이 무척이나 평화로왔다. 이 불상은 현재 남산에서 발견된 불상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불상이 앉아있는 감실(화강암을 파고 만든 방이라고나 할까)은 우리나라 석굴 양식의 초기 형태로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이런 석굴 양식의 가장 발달된 형식이 바로 석굴암이다). 그런데 왜 이 불상의 별명이 할매일까. 내가 보기엔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는 모습이 수줍음 많은 처녀 같아 보이는데...        


짝사랑하는 남자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처녀처럼 보이는데


  그 일본 청년처럼 텐트를 치고 밤을 지새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이 느낌을 간직해보고 싶었다.  이런저런 방향에서 불상을 바라보고 감실 옆에 앉았다. 잠시 쉬고 있는데 할아버지 한 분과 손녀가 다정하게 산을 내려가시다 말을 거셨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갈 건지 등등등. 낯선 아저씨를 바라보는 꼬마의 긴장한 눈빛이 귀여웠다. 초등학생 정도 되었겠지. 곧 인사를 나누고 할아버지와 손녀는 먼저 하산하셨다. 만약 우리 꼬마가 딸을 낳으면 나도 그 녀석이랑 저렇게 산에 올 수 있을까. 근데 생각해보니 우리 딸이 저 아이보다도 어리구나. 내가 오바했구만...    




마지막 신라인 


  다시 계곡을 내려와 남천을 따라 북쪽으로 걷다 보니 '마지막 신라인' 윤경렬 선생 고택 표지판이 보인다. 당연히 들러야지. 다리 하나를 지나니 골목 안쪽에 고풍스런 대문이 보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단정한 ㄷ자 건물이 보인다. 그런데 좌향이 특이하게도 남산을 바라보고 있는 서향이다. 남산을 너무 사랑하셔서 그렇게 집을 지으셨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인기척을 느끼셨는지는 집안에서 어르신 한 분이 나오신다. 생전의 선생을 닮으신 걸 보니 동생분이실까, 아님 자제분일까. 

      

서향이라 해질녘에 해가 쏟아져 들어온다고 한다


  고청 윤경렬. 일제시대 함경도에서 출생하신 선생은 인형을 배우기 위해 일본에 유학까지 다녀오셨다고 한다. 귀국 후에 개성박물관장이시던 고유섭 선생으로부터 손끝에서 일본의 독소를 빼야 한다는 엄한 가르침을 받고 겨레의 역사와 문화의 근본이 되는 경주로 이주를 결심. 경주에 터를 잡으신 후에는 신라의 유적과 유물을 답사하시고 후학들을 위한 교육에도 힘쓰셨다. 평생 경주를 아끼고 경주를 위해 살아오셨던 선생은 1999년 많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감하시게 된다. 


  이렇게 여러 책자와 인터넷을 보면서 나름 선생의 인생을 정리해봤지만 사실  그분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다. 단지 어마어마한 열정으로 평생을 경주를 위해 살아오셨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을 뿐. 예전엔 나도 경주와 신라가 좋아 평생 경주를 위해 살고 싶다고 했었지. 그러면 간단하게 경주로 내려와서 살았으면 될 터인데 난 그렇게 못했다. 선생은 그 혼란스러운 한국전쟁 시기에 월남하셔서 경주에 터를 잡으셨는데... 


  결국 경주에 대한 내 사랑은 그 정도밖에 안되었다는 거겠지. 지금도 말로는 남산 밑에 조그만 집 짓고 소박하게 살고 싶다고 하지만 당장 실행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게 사실이잖아. 말만 번지르르하게 할 뿐.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조용히 집을 둘러보고는 다시 대문을 나섰다. 또 걸었다. 어찌어찌 걷다 보니 박물관이 보인다. 막 모내기 끝난 논 옆에 곧 수확을 기다리는 보리밭도 펼쳐져 있고. 저 보리들 모두 경주의 특산물인 보리빵  만드는 데 사용되겠지...      


갑자기 구수한 보리빵이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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