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기 좋은 길
2014년 6월 초, 오랜만에 동남산에 다시 왔다. 보리사에서 시작해서 부처바위 지나 그 유명한 감실할매부처를 답사할 계획. 아침부터 일찍 서둘러서 보리사로. 경주역 앞, 성동시장 건너편에서 10번 버스를 탔다. 버스 노선이 아주 훌륭하더군. 서라벌 다운타운의 주요한 유적들을 거쳐 안압지와 국립경주박물관을 지난다. 낭산을 왼쪽에 끼고 달리다 사천왕사 앞에서 우회전해서 다리 지나면 도착.
버스 내려 보리사 쪽을 보니 산 등성이가 온통 푸르고 푸르다. 상당한 급경사인데도 초여름 새순이 올라오기 시작한 대나무들 보는 재미로 힘든 줄 모르고 올라갔다.
조금 더 올라가니 울창한 소나무들 사이로 보리사가 보인다. 비구니 스님들이 수도하는 곳이라 그런지 절이 정갈하다. 건물들도 다 최근에 지은 것이라 깨끗하지만 특별한 건 없다. 그럼에도 이 절에 오게 된 건 바로 대웅전 왼쪽에 있는 삼성각 뒤편 언덕바지에 앉아 계신 잘생긴 석조여래좌상 때문이다. 통일신라 후반기를 대표하는 석불좌상으로 보물 제 136호.
첫인상이 좋았다. 남자로 치면 서글서글하게 잘 생기고 성격 좋을 것 같은 느낌. 좀 더 가까이서 보니 어딘지 석굴암 본존불과 닮긴 한 것 같은데 훨씬 편안하고 좀 더 인간적인 모습이다. 사실 석굴암 본존불은 진짜 걸작이란 건 알겠는데 너무 완벽하고 빈틈이 없어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잖아. 그런데 이 불상은 그런 게 없어 다가가기 쉬웠다. 뒤로 돌아가니 특이하게도 광배 뒤쪽에도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약사여래좌상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형식이라고 한다.
불상 앞에 앉아 저 아래 펼쳐진 배반들과 낭산을 바라보면서 잠시 휴식. 아침에 오길 정말 잘했다. 동쪽이다 보니 햇살이 골짜기 골짜기를 골고루 비춰 기운이 아주 맑고 따뜻했다. 또 내려가 보자. 오르는 길에 보리사 마애여래좌상 쪽으로 가는 이정표를 봤던 기억이 났다. 답사 자료집에도 마애불 앞에서 본 풍경이 멋지다고 나와 있어 잠깐 들러야지 했는데, 도대체 길을 찾을 수가 없다. 좀 아쉽지만 마애불은 포기. 다음 행선지인 탑골 부처바위로 출발.
부처바위로 가기 위해선 보리사 앞 마을을 나와 좌회전해서 북쪽으로 향하면 된다. 양쪽으로 고추랑 감자, 콩 등이 심겨 있는 특별할 것 없는 평화로운 농로를 걸었다. 6월 초라 모내기를 거의 끝낸 논 또한 정겨웠다. 관광객이라고는 한 명도 볼 수 없는 조용하고 한적한 길. 크게 심호흡을 하니 서라벌의 상쾌한 아침 공기가 한가득 들어온다. 동남산에 오길 정말 잘했군.
그렇게 꿈꾸듯 10여분쯤 걸어가면 왼쪽으로 탑골마을이 보인다. 마을로 들어가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곧 옥룡암에 도착한다. 부처바위는 옥룡암 대웅전 뒤에 있다. 옥룡암 대웅전 올라가는 길. 비 온 뒤 더 푸른 나무들과 꾸밈없는 돌계단 그리고 대웅전 건물이 조화롭게 눈에 들어온다. 별 것도 없는 풍경인데 기분이 너무 좋아진다. 이런 걸 한국적이라고 해야 하나...
건물 뒤로 난 길을 올라가니 부처바위가 보인다.
부처바위. 높이 9미터, 둘레 30미터의 거대한 바위 사면에 약 30여 개의 불교와 관련된 다양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어 그리 불리고 있다. 가장 먼저 보이고 가장 유명한 곳이 북면. 중앙으로 석가여래 좌상이 있고, 양쪽으로는 탑, 그리고 탑 밑으로 각각 한 마리의 사자가 지키고 있다. 무엇보다 두개의 탑 조각이 눈길을 끈다. 신라의 전형적인 3층 석탑이 아니라 목탑으로 보이는데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가 완벽한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황룡사 9층 목탑도 이러한 형태가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다.
자 이제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보자. 동쪽, 남쪽, 서쪽 면에 부처상과 승려상, 그 외에도 다양한 형상들이 빼곡히 조각되어 있다. 남쪽에는 3층 석탑과 얼굴이 깨진 부처님 한 분도 서 계시고.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얼굴 깨진 여래상의 발. 비가 와서 발이 바닥에 고인 물에 반쯤 잠겨 있는데 천진난만한 꼬마가 물장난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연상되어 혼자 웃었다.
부처바위를 보고 내려오는 길. 나무 사이로 보이는 집 한 채가 내 눈길을 끌었다. 아담한 한옥집에 꽤나 넓은 텃밭. 나중에 세 식구가 살 집을 상상해본 적이 많았는데, 딱 내가 그리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자동차가 있고 일하시는 분들의 모습을 보니 현지분은 아닌 듯하다. 귀농하신 분들일까. 아님 인근 도시에 사는 분들인데 주말에만 와서 농사짓는 분들일까. 부럽다.
마을을 나와 길에 나섰다. 다시 뒤돌아 보았다. 보리사에서도 그랬지만 아침 햇살이 깊게 들어와서 밝고 맑은 느낌이고, 동네 자체에 궁색한 느낌이 없다. 칠불암 앞쪽 마을도 그렇고 동남산의 마을들은 하나같이 다 맘에 든다. 그런데 이런 마을에 땅 사서 집 짓고 살려면 비용이 얼마나 들까. 아마 지금 우리의 경제적 능력으론 좀 힘들겠지... 쩝.
마을 길 모퉁이 한편에 접시꽃이 곱게 피어 있다. 언젠가 꽤 자주 들르던 사진 블로그에서 경주의 6월은 접시꽃이 좋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나는데, 그 말이 사실이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