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룸펜 Sep 27. 2016

동남산 걷기 #1 : 칠불암에서 서출지까지

편지 속에 담긴 뜻


진정한 불심이란


  남산종주를 마쳤으니 이젠 동남산에 있는 유적들을 살펴볼까. 처음으로 갈 곳은 칠불암. 사실 칠불암은 종주하면서 들르는 게 젤로 좋다. 그래야 서출지 거쳐 동남산 답사를 자연스럽게 이어가기 좋으니까. 근데 이상하게 인연이 안되더만.  밀린 숙제같이 남아있던 칠불암을 처음으로 가게 된 건 2010년 겨울이었다. 


  경주 시내에서 칠불암으로 가려면 우선 10번 버스를 타고 통일전에서 내려야 한다. 그리고 남쪽으로 한참을 걸어가 잘 정돈된 마을을 지나면 본격적인 산행 시작. 그래도 그리 힘들진 않고 조금 가팔라졌다 싶을 때 울창한 대숲이 나온다. 그리고 좀 만 더 걸어가면 칠불암에 도착한다.


3+4=7


  암벽에 새겨진 삼존불과 그 앞의 사방불때문에 이 암자를 칠불암이라고 부른다. 당시엔 보물로 지정되어 있던 마애불들이 국보로 승격되어 꽤나 들뜬 분위기였던 기억이 난다. 깔끔하게 단장한 암자도 보기 좋았고. 근데 여기서 차를 한 잔 마셨던가...


차를 한 잔 마시긴 한 것 같다


  불상엔 영 잼병이라 수박 겉핥기 식으로 '사방불이 참 특이하네' 하고는 바로 신선암 마애불로 오른다.  남산종주 편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남산은 전형적인 화강암산으로 보기보다 험하다. 특히나 칠불암에서 신선암 마애불 올라가는 길은 상당한 주의를 요한다. 그런데 힘겹게 올라가다 뒤돌아보면 보상이라도 하듯 이렇게 감동적인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그 옛날 서라벌의 중심이었던 배반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작지만 높은 산, 남산


  올라갈수록 전망은 죽음. 그렇지만 여기서 하이라이트는 무엇보다 바로 신선암 마애불이다.  도대체 그 누가 이런 곳에다 불상을 새길 생각을 했을까. 불상 앞 공간은 정말 협소하다. 겨우 예배를 드릴 만한 공간이 있을 뿐 두 세 발자국만 걸어가면 바로 낭떠러지. 그러니 이 좁은 공간에서 저 단단한 화강암을 깨고 쪼으며 불상을 새기는 것은 진정한 불심 또는 예술혼이 아니면 엄두도 못 낼 불사(佛事)이었으리라. 이 불상을 새긴 이름 모를 도공께 그저 경배를. 


  좌향 또한 기가 막히다. 동남쪽을 바라보고 있는 이 마애불은 토함산 넘어 떠오르는 태양을 정면으로 보게 되어 있다. 이른 새벽, 일출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나는 불상의 모습은 얼마나 장엄할 것인가. 동남산 아래 마을에 자고 일찍 일어나 이곳에서 일출을 맞는 것이 나의 오래된 소원 중 하나이다. 


불심 또는 예술혼




신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들


  역시나 올라올 때 만큼 힘겹게 내려간다. 숲을 지나 마을로 내려서면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일금당 쌍탑 형식인 두 기의 석탑이 보인다. 2009년에 복원되었다는데 그리 큰 감동은 없었다. 


전 염불사지 삼층석탑


그리고 다시 서출지. 겨울에 보는 서출지와 이요당은 좀 을씨년스럽다. 


꽃피는 서출지는 언제쯤 보려나


  잠시 쉬며 이 연못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을 되새겨보자.  바로 《삼국유사》〈기이편(紀異扁)〉 제1 사금갑조에 실려 있는 사금갑 설화. 내용은 대강 이렇다.

                            

  '때는 5세기말 소지왕 시절. 왕이 동남산에 행차했는데 연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와 편지(書)를 바쳤다. 겉면에는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씌어 있었다. 왕은 한 사람이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열어보지 않으려 했으나, 신하들이 그 한 사람이란 왕을 나타내니 열어볼 것을 청했다. 왕이 봉투를 열자, 그 안에 쓰여있는 글귀가 바로 '사금갑(射琴匣)'. 즉, '거문고갑[琴匣]을 쏘라(射)'는 뜻. 왕이 활로 거문고갑을 쏘니 그 안에서 궁주(宮主)와 승려가 정을 통하다 나왔다. 궁주와 승려는 처형되고 노인이 나왔던 연못을 서출지(書出池)라고 불리게 되었다.' 


  원래의 서출지는 아까 지나온 석탑 근처라고 하는데, 그 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당시 신라의 상황이 더욱 흥미롭다. 무엇보다 이 설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불교가 신라에 더 일찍 들어와 왕실을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다 아시듯이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6세기 초반 528년). 혹자는 이를 동남아에서 넘어온 밀교 계통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당시로서는 신흥종교였던 불교가 기존의 토착신앙과 상당한 갈등관계에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불교가 왕권 강화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도입되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이는 당시 신라에서 왕권보다 샤머니즘을 바탕으로 하는 기존의 세력들이 강력했음을 시사하기도 하고, 불교와 같은 고등종교를 받아들일만큼 사회가 성숙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갑자기 5세기 신라토기에 붙어있는 토우가 생각난다. 뭔가 원초적 생명력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세련되지 못하고 조잡해 보이기도 하는. 


  그나저나 연꽃피고 배롱나무꽃 피는 서출지는 언제쯤 볼 수 있으려나.

매거진의 이전글 남산 종주 : 부처님의 나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