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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룸펜 Sep 27. 2016

남산 종주 : 부처님의 나라

삼릉에서 서출지까지

남산을 빼고 경주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경주로 여행을 가신다면 보통 며칠이나 계시는가? 대부분 1박 2일 아니면 2박 3일 정도 머무르시겠지. 그러면 그 짧은 기간 동안 불국사, 석굴암, 안압지 등 중요한 유적들만 보는 것도 시간이 벅찰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남산을 가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게다가 남산 종주라니...


  그러나 남산이 어떤 산인가. 7~8세기 서라벌 사람들이 이 땅에 새긴 불국토이자 신라인들의 정신적 고향이자 후손들의 입장에선 골짜기 골짜기마다 수많은 유물과 유적들이 숨어있는 거대한 노천박물관이다. 그러므로 남산을 보지 않고 경주를 제대로 봤다고 하기는 힘들다. 경주 여행 또는 경주 답사의 진정한 엑기스.

 



남산 답사의 속성 코스, 종주


  남산에는 볼 것이 너무도 많다. 하루나 이틀 정도에 다 보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 그럼 어떤 식으로 답사하는 것이 좋을까? 초심자라면 일단 남산 종주를 권한다. 보통 삼릉계곡의 다양한 불상들을 보면서 올라가 상선암에 잠시 쉬었다가 드넓은 배리 들판을 보면서 능선에 오른다. 금오산 정상은 의외로 시야가 좋지 않으니 사진 한 장 찍고 끝. 다시 능선길로 내려서 용장골로. 큼직큼직한 바위들을 밟으며 조심스럽게 내려가다 보면 홀연히 나타나는 용장사지 삼층석탑! 단연컨대 남산 종주의 백미라고 할 수 있겠다. 잠시 쉬었다 다시 왔던 길로 올라와 삼화령을 지나 동남산 통일전 쪽으로 내려가 서출지에서 마무리. 


  대략 3~4시간 정도 걸린다. 훨씬 더 긴 루트도 많지만 일반적으로 내가 많이 이용하는 코스이다. 그렇게 일단 남산에 대한 이해를 넓힌 후, 동남산과 서남산 산자락에 있는 유적들을 하나씩 둘러보는 것이 남산을 답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솔밭에서 부는 바람  


  그럼 남산 종주의 출발점인 삼릉으로 가자.  삼릉 하면 소나무, 소나무 하면 삼릉이지. 울진, 삼척에 있는 잘생긴 금강송보다 난 경주의 이리저리 뒤틀린 소나무들이 더 마음에 든다. 옛날 속담 틀린 게 없는 것이 '굽은 소나무가 선산 지킨다'고 하지 않나. 울진, 삼척의 그 잘생긴 소나무들은 경복궁이며 남대문 복원에 쓰일 부재로 잘려나갔지만 저 구불구불한 소나무들은 언제나처럼 이곳 남산을 지켜주고 있다.

 

철갑을 두르진 않았지만


  삼릉. 8대 아달라왕과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의 무덤이 모여있다 하여 삼릉이라 불린다. 모두 박씨 왕들의 무덤. 그런데 무덤의 연대차가 700년이나 나고 형식상으로도 왕릉으로 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시시비비를 따질 건 없고, 그저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즐기시면 될 듯. 


왕릉이 아니면 좀 어때




삼릉골을 오르다


  삼릉을 지나면 곧 계곡이 나타난다. 삼릉골을 남산 종주의 시작으로 잡는 것은 이곳이 남산에서 가장 많은 유물과 유적이 몰려있기 때문이다. 계곡 초입부터 석조여래좌상, 선각육존불 등을 만날 수 있다. 게다가 조금만 눈 밝은 분들이라면 바위 한켠에서 인위적으로 파 놓은 홈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옛날 불상을 조각하기 위해 돌을 깨다 만 흔적이겠지. 또한 7세기 이전 것으로 보이는 토기 편, 기와 편들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신라인들의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남산 종주의 큰 매력 중의 하나다. 



  몸에서 슬슬 땀이 나기 시작할 때쯤 또 하나의 걸작을 만나게 된다. 보물 제 66호 삼릉골 석불좌상. 이 불상은 깨어진 입 주위를 일제시대 때 시멘트로 어설프게 복원하여 '꺼벙이 부처님'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몇 해 전 고증을 통해 제대로 된 복원이 이루어졌다. 


  새롭게 복원된 석불좌상을 가까이서 보자. 뭐랄까, 반드시 성불을 이루어내고야 말겠다는 야심만만한 구도자의 얼굴이랄까. 성철스님의 범같은 젊은 날의 모습이랑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삼릉골 입구의 목 없는 석조여래좌상과 비교가 된다. 이 불상이 용맹 정진하는 청년의 얼굴이라면 석조여래좌상은 목이 없지만 왠지 원숙한 노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 같다. 



  다시 상선암으로. 길이 조금씩 가팔라진다. 입에서는 폐차 직전의 차 엔진 소리 같은 게 나기 시작하면 곧이어 상선암 도착. 물 한잔 먹고 조금 쉬었다가 상선암 마애석불로 출발. 그런데 아쉽네. 몇 해 전에 갔더니 마애석불 주변 바위들이 떨어지는 등 안전상의 문제때문에 가까이 갈 수 없게 통제하고 있었다. 대신 왼쪽으로 크게 우회하는 길이 생겼다.  조금만 올라가니 시야가 탁 트이면서 저 아래 배리 들판과 멀리 경주 시내까지 시원하게 조망되어 마애석불을 가까이서 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 준다. 


전망 좋군


  능선에 올라서니 길은 평탄하게 이어진다. 곧 금오봉 정상. 정상인데 조망이 더 안 좋다. 정상에서 길은 여러 갈래로 나뉘지만 나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 용장사지 삼층석탑을 만나러 간다. 벌써 가슴이 뛰는 것 같다. 

가자! 용장사지로!!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


  금오산 정상에서 용장사지 방향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서남산 포석정에서 시작하여 동남산 통일전까지 이어진 남산 횡단도로와 만나게 된다.  오래전에 관광 활성화라는 명목으로 이 길을 확장해 자동차 도로를 만들려고 했단다. 남산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만약 도로가 생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곳곳에 옻닭 파는 식당, 오리구이집, 모텔 들이 즐비했을 건 불을 보듯 뻔한 일.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멀리 고위봉이 보인다. 


이 정도니 얼마나 다행인가


  사실 남산이라는 산은 없다. 정확히 말하면 북쪽 금오산과 남쪽 고위봉을 합쳐서 남산이라고 부른다. 용장골은 그렇게 나뉘는 두 산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남산에서 가장 길고 깊은 골짜기이다. 남산은 해발고도가 500미터가 안 되는 낮은 산이라 다들 산행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하시는데 천만의 말씀. 전형적인 화강암 돌산이라 꽤나 험하다. 용장골로 내려서는 길도 마찬가지. 가파른 화강암 바위 사이로 난 길을 조심조심 내려간다. 발밑에만 신경쓰다 왠지 길이 좀 평탄해진다 싶어 고개를 들면 소나무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 용장사지 삼층석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남산 전체를 기단으로 삼고


  왜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이냐고? 사실 용장사지 삼층석탑은 8세기 후반에 세워진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으로 높이도 4.5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 시기의 석탑들은 대개 2층으로 기단을 만드는데 용장사지 삼층석탑은 1층 기단을 만들지 않고 화강암 바위를 기단으로 삼고 서 있다. 즉 남산을 탑의 기단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 곳의 높이가 못돼도 200미터는 될 텐데 세상에 이만큼 높은 탑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용장골 골짜기와 저 멀리 배리 들판을 아득히 굽어보고 있어서 실제보다  더욱더 높아 보인다. 그래서 이 탑은 나에겐 세상에서 가장 높은 탑이다. 


  용장사지 삼층석탑은 보물 제 186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조형적으로 뭔가 특별한 탑은 아니다. 만약 이 탑이 경주시내의 어느 폐사지에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 탑을 볼때마다 이리도 마음이 벅찬 것일까. 그것은 이 탑이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이 곳에 있기 때문이다. 용장골 깎아지른 절벽 위에 하늘을 날 듯 날렵하게 서서 저 멀리 배리 들판을 굽어보는 용장사지 삼층석탑. 이 탑으로 인해 여느 전망 좋은 산 중턱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풍경은 극적으로 변모하여 하나의 위대한 예술로 승화되었다. 그래서 용장사지 삼층석탑과 용장골, 배리 들판이 함께 하는 이 공간은 안압지, 불국사, 석굴암처럼 통일신라 건축, 나아가 한국 전통문화의 가장 큰 특징인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오래 머무르고 싶지만 다음 일정이 있기에 삼층석탑 아래에 있는 용장사지 삼륜대좌불을 보러 간다. 길이 완전 절벽이다. 밧줄을 붙잡고 겨우겨우 내려갔다. 대좌가 우리나라에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탑 형식의 삼륜대좌라 특이하다.  그나저나 삼릉골부터 보았던 불상들 대부분이 훼손되어 있다. 종교의 의미가 퇴색된 기 21세기를 살아가는 나 같은 사람 눈에도 존엄해 보이는 여래좌상의 머리를 저렇게 파손시켜 버리다니... 고려말 조선초 기성 불교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가 얼마나 컸을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여래좌상 뒤로 마애불이 보인다. 잘못했음 그냥 지나칠  뻔했네.  8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아주 훌륭한 마애여래좌상이란다. 근데 난 잘 모르겠다. 역시나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동남산으로 


  더 아래로 가면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썼던 용장사지가 나오지만 난 보통 다시 남산 순환도로로 올라간다. 삼화령을 지나니 동남산 영역이다. 배반들이 보인다. 내려가는 길은 뭐 특별할 것도 없는 한적한 산길. 숲 냄새가 향기롭다. 간간이 물소리 새소리도 들리고. 얼마 안 내려가니 탐방지원센터가 나오고 곧 동남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접어들었다. 민박집 뒤편으로 조그만 텃밭이 있고 담장에는 붉은 장미가 피어있다. 부럽네. 나도 언젠가 동남산 한편에 조그만 집 한 채라도 마련할 수 있으려나...


부러우면 지는건데


  남산 종주의 마무리는 언제나 서출지. 통일전 입구에서 떠나는 배차 간격이 긴 경주시내행 버스를 기다리며 쉬기에 딱 좋다. 8월이면 강렬한 붉은 빛의 배롱나무와 은은한 연분홍 연꽃이 어우러져 더없이 아름답겠지. 한번도 본 적은 없다. 어떻게 그런 시기를 딱 맞출 수 있겠나. 그저 눈감고 한없이 아름다울 서출지를 상상해보는 것으로 만족할 뿐. 


연꽃 필 때도 좋긴 한데 그때는 너무 더워서...



 

 일반적으로 오전에 종주를 시작하시면 오후 1~2시에는 동남산에 도착하게 되는데 은근 배가 고프다. 이때 먹을만한 것이 칠불암 식당의 칼국수. 식당은 서출지 바로 옆에 있다. 엄청 맛있다고 할 순 없지만 산행 후에 선택하기엔 나름 괜찮은 메뉴. 면은 그리 쫄깃하지 않고 들깨를 넣은 국물은 약간 심심한 편이다. 그래도 조미료 크게 쓰지 않아 집에서 해먹는 칼국수처럼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게 장점.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도 감사하고. 


무난한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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