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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룸펜 Jan 14. 2017

불국사와 석굴암, 한 시대의 절정

한국사를 공부하다 보면 묘하게도 3~4세기에 한번씩 나라의 기운이 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3세기설. 그리고 어김없이 그 시대를 대표하는 찬란한 문화유산이 존재한다. 우선 진경시대라 불리는 18세기 영정조 시대. 대표적인 문화유산을 꼽으려면 열 손가락이 모자란다. 김홍도와 정선의 산수화, 정약용이 만든 수원화성, 그리고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 한마디로 천재들이 단체로 그라운드를 누비던 시대라 하겠다.


  세월을 거슬러 세종대왕이 다스렸던 15세기.  말할 필요도 없는 우리 역사에서 최고의 전성기. 개국 초기 어지러웠던 정세가 안정되면서 조선은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에서 때이른 절정을 맞이한다. 대표적인 유물은 뭐니뭐니해도 바로 한글. 그 이전은 11세기 고려 문종 연간. 고려의 황금기라 불리었던 이 시기의 대표적 유물은 그 유명한 청자. 강진 앞바다를 연상시키는 그 고운 비취색의 순청자를 기억하시는지.


 3세기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8세기 경덕왕 시절. 일통삼한을 이루어내고 정치적 안정을 찾은 신라는 당나라와의 관계도 호전되어 비로소 진정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대를 상징하는 위대한 두 건축물이 있었으니 바로 불국사와 석굴암이다.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불국사와 석굴암 창건과 관련된 이야기는 알고 계실 듯. 그래도 복습하는 샘치고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 옛날 모량리에 살던 가난한 여인에게 '대성'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대성은 젊어서 죽고 말았다. 그가 죽은 날 밤 재상 김문량의 집에 이상한 일이 생겼다. "모량리의 대성이라는 아이가 너의 집에 환생하리라."하는 소리가 지붕에서 들렸다. 그 후 김문량의 아내가 임신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의 손바닥 안에 '대성'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쇠붙이가 있었다. 따라서 아이 이름을 '김대성'이라고 하고 전생의 가난한 어머니도 모셔와 편히 살게 하였다.      


  부잣집 아들로 다시 태어난 대성이 장성하여 토함산에 올라 곰을 잡았다.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해 원망하며 말하는데 "네가 나를 어찌 죽였더냐"하며 으르렁댔다. 두려움에 잠에서 깬 대성은 크게 반성하고 깨달아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세우고, 옛 어머니를 위해 석불사 곧 석굴암을 세웠다. 때는 대략 750년 전후한 시기였다고 한다.




  그럼 먼저 김대성이 김문량을 위해 지었다는 불국사로 가보자. 토함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이 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절일 것이다. 연못과 천왕문을 지나면 소나무가 심겨진 너른 마당에 도착하게 되는데 불국사 전면의 석축과 계단들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전형적이지만 아름다운


  불국사 전면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자연과 인공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석축 기단. 그랭이 공법을 쓰고 있는데 이는 원래 목조건축에서 기둥을 세울 때 쓰는 기법이다. 즉, 울퉁불퉁한 다듬어지지 않은 기단석 위에 나무 기둥 밑면을 정교하게 다듬어 딱 들어맞도록 맞추는 기법을 말한다. 그런데 불국사에서는 놀랍게도 그 단단한 화강암으로 이 공법을 구현하고 있다.      


화강암을 떡 주무르듯


  위 사진을 잘 보시라. 바닥부터 아주 큰 자연석을 켜켜히 쌓아 올리다 판석을 놓았는데 판석의 아래를 울퉁불퉁한 자연석에 맞게 깎아 절묘하게 맞물리게 했다. 신라인들의 돌을 다루는 솜씨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리고 좀 멀리서 보면 기단 아래에는 크고 자연스런 돌을 쓰다가 올라가면서 인공적인 돌로 바뀌고 있다. 모든 악기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웅장한 교향곡을 듣고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불국사 앞마당에서 볼 만한 것이 그 뿐이랴. 연화교와 칠보교, 청운교와 백운교는 다리 자체도 아름답지만 그 사이의 아치형 터널 또한 일품이다. 예술과 과학의 행복한 만남. 자하문 양 옆의 화려하고 섬세한 범영루와 단순한 좌경루가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화려한 범영루 뒤에는 단순한 석가탑을, 단순한 좌경루 뒤에는 복잡 다양한 다보탑이 서 있어 전체적으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렇듯 불국사를 제대로 보려면 대웅전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한 세월이다.      


예술과 과학의 만남


  이제 대웅전으로 들어가자. 푸른 구름(청운교), 흰 구름(백운교)를 지나 불국토로 들어가야 마땅하지만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서는 불가능한 일. 샛방살이 하듯 옆 문으로 들어서는데 기분이 좀 거시기하네. 그렇지만 그런 찝찝한 느낌은 순식간에 없어지게 되는데 바로 그 유명한 두 개의 탑, 석가탑과 다보탑이 눈 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석가탑과 다보탑은 법화경 <견보탑품>의 내용을 건축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견보탑품>에는 부처의 지혜와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 칠보로 장식된 화려한 보탑이 떠오르고 부처님이 그 보탑을 열고 들어가 정좌하고 있던 다보여래 옆에 앉아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허공회 의식'이 나온다. 당연히 다보탑은 다보여래를, 석가탑은 석가여래를 상징한다. 다보탑이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복잡 다양한 형태를 띄고 있는 것도 다 이런 연유에서이다. 이렇듯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은 말 그대로 건축으로 쓴 불교 경전이라고 하겠다.


  자칫 화려한 다보탑에 정신이 팔려 석가탑은 대강 보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는데, 석가탑이 보통 탑인가. 감은사지 삼층석탑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신라 특유의 삼층석탑 양식은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거쳐 이 곳 석가탑에서 정점을 찍게 된다. 삼층석탑의 특성상 안정감과 상승감이라는 미감을 동시에 구현하기는 매우 어렵다. 초기의 감은사지 삼층석탑이나 고선사지 삼층석탑은 규모가 엄청 커서 안정감은 있으나 사실 날렵한 맛은 없다. 신라 하대의 석탑들은 하늘로 날아오를 듯 날씬하지만 뭔가 불안정한 구석이 있고. 그런데 석가탑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이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지 미감을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다.

            

  이것말고도 대웅전이랑 비로전 극락전 등 전각에 모셔진 불상들 또한 하나같이 보물 아니면 국보이다. 정말 불국사는 하나하나가 다 걸작이라고 해야겠다.     


  끝으로 하나 더. 보통 대웅전에서 관음전을 지나 극락전 옆으로 나오게 되는데, 그 때 보이는 불국사 서쪽벽을 이루는 석축 또한 일품이다. 잘 다듬은 긴 석재를 그리드(격자)처럼 구획하고 그 사이를 작은 돌들로 쌓아올렸는데 지형에 맞춰 올라가는 석재들이 굉장히 율동감이 있다. 그랭이 기법으로 이루어진 불국사 앞쪽 석축에서도 느꼈지만 이 절을 건축한 분은 음악에 조예가 깊 분이었으리라.

웬지 음악소리가 들리는 듯

      



그리고 석굴암. 혹자는 우리나라에 엄청난 천재지변이 나서 모든 문화유산이 파괴되어도 이 석굴암만 남아있다면 우리가 문화민족이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했다. 문화재에 등급을 매길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가치로 따져서 국보에다 번호를 매긴다면 단연코 국보 1호로 등재될 걸작 중의 걸작, 국보 중의 국보이다.    

 

안에서는 사진을 못 찍게 하니


  그런데 난 석굴암이 싫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부담스러웠다고 하는 게 맞겠지. 어릴 적엔 대단한 것은 알겠는데 한치의 오차없는 그 절대자의 모습이 웬지 거북했다. 차라리 남산 골짜기의 어설프게 만든 불상들이 더 정겹고 좋았다.      


  그런데 나이 드니까 또 달리 보이더군. 그리 완벽해서 정내미 떨어지던 석굴암 본존불이 왜 이리 위대해 보이는지. 몇 해 전에는 밀려드는 관광객들 사이에서 꿋꿋이 서서 30분 가량 넋을 잃고 멍하니 쳐다보기도 했다. 어디 그 뿐이랴. 본존불을 둘러싸고 있는 십대 제자상과 인왕상 등은 하나같이 희대의 걸작이다. 완벽한 비례와 과학적 정밀성, 일본인들에 의한 훼손과 더 어처구니 없이 진행된 복원 등에 대한 내용은 논외로 치자.


60-70년대 복원 후 남은 부재들


  이렇듯 석굴암은 그 자체로 완벽한 예술작품이지만 그 이면에 자리잡은 어마어마한 역사의 흐름이 있어 더욱더 큰 감동을 준다. 다들 아시겠지만 경배의 대상으로서 불상을 조성하기 시작한 곳은 기원전후 인도. 초기에는 석가가 고행하고 있는 잔혹한 모습 그대로를 조각했다. 목숨을 건 구도 중에 뼈만 남은 모습의 불상을 보신 적 있으시리라. 그러다가 박트리아(지금의 아프카니스탄)의 알렉산더 대왕의 후예들의 영향으로 좀더 풍만하고 원만한 모습을 띄게 된다. 바로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간다라 미술의 특징이다.


  그리고 불상들을 안치하고 예배를 드리는 공간으로서 석굴사원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이 석굴사원이 예배의 공간으로 아주 매력적이었는지 아시아 전역에 유행하게 된다. 대표적인 석굴사원들로는 아프카니스탄의 바미안 석굴, 중국의 돈황석굴,용문석굴 등.


  이처럼 석굴사원이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까지 전해지게 되는데, 문제는 한반도의 돌들이 단단한 화강암이라 석굴사원을 만들기가 무척 어려웠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기어코 석굴사원을 조성한다. 대표적인 예가 군위삼존불. 원래 있던 동굴을 약간 다듬어 불상을 안치하는 방식을 택했다. 경주 남산의 감실부처상도 이런 석굴사원의 한국적 변형이라 볼 수 있고.


  그런데 이처럼 역사가 깊은 석굴사원이 한반도 동쪽 끝에서 완전 새롭게 변신을 한다. 토함산 중턱에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인공석굴을 만들어 버린 것. 그리고 그 중앙에 세상 모든 중생들의 번뇌를 다 품어안을 것 같은 위대한 부처님이 앉아 계신다.


  그래서 석굴암 본존불 앞에 서면 저 먼 그리스와 인도에서 시작된 미술양식이 긴 세월을 거쳐 한반도로 넘어와 토함산 기슭에서 한 점으로 만나 절정을 이룬 감동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런 유구한 역사적 흐름을 생각할 때면 정신이 아찔해 진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보고 나오면 한 시대의 절정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뼈져리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예술품들을 만들 수 있었던 8세기 신라의 문화적 역량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려오면서 드는 의문. 18세기 이후 3세기가 지난 21세기. 3세기설에 따르면 지금이 태평성대여야하는데 왜 세상은 이 모양 이 꼴인걸까.




  몇 해 전 서울 어느 대학 면접인가 논술인가에서 위에 언급한 불국사 창건 설화를 통해 신라사회에 대해 알 수 있는 점을 서술하라는 문제가 나온 적이 있었다. 정답이 뭐라고 생각하시는가? 바로 골품제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당시 신라는 골품제로 인한 아주 완고한 신분제 사회였다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냐고? <삼국유사>를 잘 읽어보면 원래 모량리에서 태어난 '대성'은 성이 없다! 그런데 다시 태어난 아이는 재상 김문량 집에서 태어났으므로 진골이고 이름은 '김대성'. 이제 감이 잡히시나. 당시 신라 사회에서는 한번 정해진 신분은 절대 바꿀 수 없었다. 한번 평민은 영원한 평민. 죽어도 6두품이나 진골로 신분상승이 불가능했다. 오죽했으면 설화에서조차 죽었다 다시 태어나야 성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런 사회였으니 <토황소격문>으로 당나라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최치원같은 천재도 6두품이라는 신분 때문에 좌절했던 것이리라.        




  불국사, 석굴암 유감 하나.  다들 아시겠지만 석굴암 안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찍는다 해도 막혀있는 두꺼운 유리에 반사되어 제대로 찍을 수도 없고. 백번 양보해서 관리상의 문제로 그렇게 격리시키는 것을 인정한다 해도 문제는 심각하다. 불국사,석굴암 각각 입장료가 5,000원에다 왕복 버스비까지 합하면 2인 기준으로  20,000원이 넘는 돈이 든다. 근데도 우리가 석굴암에 가서 그 예술사적, 종교사적 의의, 과학적 정밀성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유리창 너머 멀리서 본존불상을 잠시 볼 수 있을 뿐. 주말이나 휴일에는 밀려오는 인파들 눈치까지 봐야 한다. 불국사에 가도 사진을 마음대로 찍을 수 있다는 것 빼면 별반 차이가 없다. 허망하다.  


  불국사, 석굴암 유감 둘. 수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불국사 구품연지를 복원하지 않은 것은 무척 아쉽다. 지금 자하문 앞은 소나무가 몇 그루 서 있고, 넓은 마당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원래 이곳은 연못이었다. 그 연못을 통과해서 깨끗이 정화된 몸으로 절에 오르라는 뜻이었겠지. 그런데 1970년대 복원 공사를 하면서 지금처럼 흙으로 덮어버렸다. 이른 새벽, 피어오르는 물안개 사이로 보이는 불국사 석축과 다리들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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