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다루었던 경주의 유적들은 대부분 걷거나 대중교통으로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야 ‘신라의 옛 도읍을 소요하듯 걷다’라는 주제에 맞으니까. 그런데 이번에 둘러볼 곳은 좀 다르다. 대중교통으로는 갈 수 없고, 자가용이나 렌트카를 이용해야 한다. 바로 원원사지다.
원원사지? 생소한 분들이 많으시리라. 사실 그리 유명한 유적이라고 볼 수 없다. 그렇지만 신라 석탑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운 삼층석탑이 있어 들러볼 만하다.
우선 원원사지에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자. 『삼국유사』 권5 신주6 명랑신인(明朗神印)조에 의하면, “또 신라 서울 동남 20여리에 원원사(遠源寺)가 있으니 속언(俗諺)에 전하되 안혜(安惠) 등 4대덕(大德)이 김유신(金庾信), 김의원(金義元), 김술종(金述宗)과 함께 발원하여 창건한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위 기록의 4대덕은 당나라와의 전쟁 시 큰 불력을 나타낸 신인종의 고승들인 안혜·낭융·광학(廣學)·대연(大緣)을 말한다. 이들이 일통삼한의 주역 김유신 등과 함께 절을 창건했다는 것은 원원사의 호국사찰로서의 성격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원원사지는 또한 경주와 울산의 경계인 모화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곳은 바로 동해로부터 들어오는 적이 지나는 길목이다. 즉 경주 방어에 매우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절이 자리잡고 있는 점 또한 원원사가 호국사찰이었다는 점을 뒷받침해준다.
창건 연대가 확실치 않으나 높은 축대를 조성하고 일금당쌍탑 형식의 가람을 배치한 점이 불국사와 유사하고, 삼층석탑에 장식적 요소가 나타나는 점 등을 통해 8세기 중반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원사지는 멀다. 벌써 10년 전 기억. 이 절에 가려고 버스타고 한참을 갔다. 내려서 보니 안내판 하나 없네. 지나가는 분들께 물어봐도 전혀 모르시고. 동네분들이 방향을 알려주셨다. 그런데, 걸어서 2시간 정도 걸린단다.
설마 하는 마음에 30분쯤 걸었는데 절이 보일 낌새조차 없다. 뭔가 이상했다. 산불 감시요원분께 다시 여쭤봤다. 1시간 더 가야 한단다. 이런... 할 수 없이 콜택시 불렀다. 도저히 다시 걸어 나올 엄두가 안나 기사님께 30분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드리고 뛰어 올라갔던 것도 이젠 추억이 되었구만. 새로 지은 절을 돌아 허겁지겁 올라가니 울창한 솔숲 사이로 잘 생긴 삼층석탑 두 기가 여행객을 반기듯 서 있었다.
상층 기단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는데 이전에는 보기 드문 형식이라고 한다. 1층 몸돌에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신라 예술의 최전성기인 8세기 중반에 만들어져서인지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9세기의 경직되고 양식화된 조각과는 차원이 다르다. 몸돌에서 튀어나올 것 같이 생생하다.
<불국사·석굴암> 편에서 잠깐 살펴보긴 했지만 탑의 기원과 우리나라에서의 도입 및 변형에 대해 정리해보자. 탑은 원래 인도의 무덤 양식에 부처의 사리를 모신 축조물에서 비롯되었다. 탑이란 말 자체가 무덤을 나타내는 인도어인 ‘스투파’를 중국어로 음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용어이다(스투파→탑파→탑).
가장 오래된 탑은 기원전 1세기에 인도에서 만들진 산치대탑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불교가 전해지는 과정에서 동쪽으로 전파되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다. 기원은 같으나, 각 국의 탑은 그 나라의 기후나 자연환경에 따라 모양이나 재료가 많이 다르다. 오래 전부터 벽돌을 많이 썼던 중국은 다층누각 형식의 전탑(벽돌탑)이 유행했고, 목재가 많은 일본에서는 목탑, 화강암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석탑이 유행하게 되었다.
도입 초기 중국의 영향으로 다층 목탑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전란이 발생했을 때 불에 타기 쉽다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이에 전탑이나 목탑의 형식을 갖춘 석탑들이 만들어지게 된다. 벽돌 생산이 쉽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석재를 벽돌 모양으로 잘라 전탑을 흉내 낸 분황사탑과 같은 모전석탑이 만들어졌다. 석재를 이용해 목재건물의 부재를 표현한 석탑도 만들어졌는데, 대표적인 것이미륵사지 석탑과 정림사지 석탑이다.
그러나 이런 탑들은 여전히 중국의 영향이 남아 있어 우리나라 고유의 탑 형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후 석재로 목탑의 부재를 표현하던 것들을 과감히 생략하고 기단-몸돌-지붕돌 -상륜부로 이루어진 우리만의 독특한 탑이 출현하게 되는데 바로 삼층석탑이다. 681년에 건립된 그 유명한 감은사지 삼층석탑이 가장 최초의 예라 하겠다.
초기의 삼층석탑이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거쳐 8세기 중반에 절정을 맞게 되는데 바로 불국사 삼층석탑이다. 삼층석탑의 형식상 안정감과 상승감이라는 미감을 동시에 구현하기 매우 어렵다.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고선사지 삼층석탑은 상승감보다 안정감이 훨씬 두드러진다. 좋게 말해 안정감이지 어찌 보면 좀 둔해 보이기도 하고. 그런데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은 놀랍게도 이 두 가지 미감을 동시에 구현하고 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말 그대로 최고의 걸작.
형식적인 면이 완벽히 정립되자 이후 삼층석탑은 다른 방향으로 변화를 모색하게 되는데, 다보탑과 같은 이형탑이 나타나기도 하고 몸돌에다 조각을 하는 장식적 요소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원원사지 삼층석탑이다. 9세기에 접어들면 석탑의 장식적인 면모가 더 강해지고 다층석탑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처럼 원원사지 삼층석탑 앞에 서면 그 오랜 탑의 역사와 변천을 살펴볼 수 있다.
다시 10년 전 기억. 시기도 3월초 딱 이맘 때 쯤 이었던 것 같다. 서울과 달리 남쪽이라 불어오는 바람에 봄이 묻어났다. 겨우내 긴장된 근육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기다리고 있는 택시 때문에 30분 정도 밖에 머물지 못했지만 아무도 없는 조용한 절터에서 이른 봄바람을 맞으며 잘 생긴 석탑을 보던 일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추억으로 남아 있다. 언제쯤 다시 원원사지 삼층석탑 보러 갈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