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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룸펜 Jul 05. 2019

가족여행 #1

  2013년 6월 진평왕릉에 갔다. 역시나 아무도 없이 조용했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도열한 듯 서있는 아름다운 진입로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앞쪽에서 아이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보니 아빠와 엄마가 유치원생 정도 되보이는 꼬마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진부하지만 그림같다라는 표현은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거겠지. 부러웠다. 언젠가는 나도 딸과 아내와 함께 와야지. 그렇게 경주 가족여행은 나의 오랜 로망이 되었다.     


부러우면 지는건데...




  여러번 경주로 가족여행을 계획했다. 그때마다 아내가 말했다. “지금은 가봐야 기억도 못해. 좀 만 더 기다리자.” 올 해 딸이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드디어 때가 된 것이다! 2019년 달력이 나오자마자 5월 연휴부터 확인했다. 2박3일 정도는 여행을 갈 수 있겠군. 행선지는 물어볼 것도 없이 경주! 아내도 동의했다. 그렇게 결정을 하고 나니 또 한편으로 걱정도 많이 됐다. 경주여행이면 유적지나 박물관을 줄창 돌아다녀야 되는데 딸이 지루해하지 않을까. 예전 도쿄여행 때 박물관에서 30분도 못 버텼는데... 아내가 딸과 함께 여행계획을 세워보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내놨다. 스스로 여행계획을 짜다보면 좀 다르지 않겠느냐고. 좋은 아이디어였다. 그때부터 함께 자료도 조사하고 루트도 같이 짰다. 딸은 의외로 적극적이었다. 삼국유사를 꼼꼼히 읽고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 물어봤다. “아빠, 능이 뭐야?”    


  그리고 지도에 자신이 가고 싶은 유적지를 표시했다. 2박 3일 일정도 시간대별로 꼼꼼히 정리하여 수첩에 적었다. 진지한 모습이 대견했다. ‘많이 컸네, 우리딸...’ 그리고 5월 화창한 연휴 첫날, 경주로 떠났다. 경주 톨게이트를 나서니 남산이 눈앞에 나타났다. 오랜만이야, 반가워. 오릉을 지나고 시외버스터미널이 가까워지자 능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빠, 능이다!” 차창 밖을 보던 딸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숙소에 짐을 풀고 처음으로 간 곳은 황리단길. 한번 가보고 싶었다. 여러 가지 추억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2014년 경주여행 때의 일이다. 남산 종주를 하고 내려왔는데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마침 이 곳을 지나가는데 목욕탕이 보였다. 버스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샤워라도 하려고 들어갔다. 마음씨 좋게 생긴 할아버지가 수부를 보시던 게 생각난다. 남탕으로 들어갔더니 깜짝 놀랐다. 저울같은 구식 체중계를 쓰고 있는 진짜 옛날 목욕탕이었다. 어째 목욕비가 너무 싸다 했더니...    


경주처럼 오래된


더 오랜 추억도 있다. 셋째 이모가 경주 토박이인 이모부와 결혼 후 시댁에서 마련해준 집이 대능원 담 바로 옆, 바로 이 동네에 있었다. 자매들 간에 유난히 우애가 깊어 이모네 식구들이랑 자주 경주에 왔다. 집들이 때 기억이 난다. 엄마와 이모들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아버지와 이모부들은 밤새 고스톱을 치셨다. 나와 조카들은 오래된 한옥의 반질반질한 나무바닥을 온 몸으로 쓸면서 놀았다. 그런데 이모는 이 집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셨다. 한옥이라 겨울에 춥고 뭘 고칠려고 해도 문화재보호법 때문에 손도 못댄다고 하셨다. 한번은 푸세식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고치려고 했더니 주변에서 몰래 민원을 넣었다고도 푸념을 하시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이모는 몇 년 안 사시고 황성공원 쪽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가셨다.    

 

그리고 얼마 전 황리단길이 뜬다는 기사를 봤다. 지도를 보니 딱 이 동네였다. 과연 그 때 그 목욕탕은 그대로 있을까. 이모의 신혼집을 찾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듯 했다. 그럼 어떻게 변해 있을까. 또 이상하게 변해있는 건 아닐까. 인사동, 삼청동, 그리고 전국의 무슨무슨 길들... 조금만 유명해지면 원래의 모습이 순식간에 망가지는 걸 너무 많이 봐왔다. 그래서 궁금하면서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번 경주여행의 첫 번째 행선지로 이곳을 택한 것도 그런 호기심때문이었다.   

 

예상대로 목욕탕은 없었다. 식당으로 바뀌어 영업하다가 얼마전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그것도 젠트리피케이션의 여파일까. 철물점, 복덕방들이 늘어서 있고, 어르신들이 지나다니던 한적한 거리는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 젊은이들로 넘쳐났다. 낯설었다.   

옛날의 그 목욕탕은 자취를 감췄다

  

대능원 돌담을 끼고 있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예전 이모네가 어딘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오래된 한옥과 양옥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던 조용하고 정겹던 옛 동네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역시나 사람과 차들로 넘쳐났다. 그렇지만 신축한 2층 한옥들이 유적지 분위기를 많이 해치는 것 같진 않았다.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앞으로 이 골목은 또 어떻게 변할까. 아직은 물음표인 것 같았다. 지나가던 커플이 말했다. “전주보다는 덜 번잡한 것 같은데.”    


몇 년전만해도 이런 모습이었는데
많이 변했다

요새 이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피자집으로 갔다. 소설가 김영하가 TV 프로그램에 나와 피자와 맥주를 먹던 곳이다. 그 장면을 보는데 솔직히 근사해 보였다. 대릉원을 바라보면서 시원한 맥주와 피자라니, 멋진 조합이지 않은가. 자리에 앉으니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돌담 너머 고분이 보였다.

 

고분이 보여야 경주지


생각해보면 경주에 혼자 왔을 때는 뭘 제대로 먹은 적이 별로 없다. 유물 하나, 유적 하나라도 더 보려고 미친 듯이 뛰어 다녔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기는 게 목표인 것처럼 전투적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나에게 경주는 공부하는 곳이지 즐기는 곳이 아니었다. 그런 경주를 가족들과 함께 와서 피자를 먹으며 여유롭게 앉아 있다니.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맥주를 마셨다. 시원했다. 피자를 다 먹자 딸이 일정을 적어놓은 수첩을 보며 말했다. “아빠, 엄마, 이젠 대릉원에 갔다가 첨성대를 보러 가야해요.”    


많이 컸다, 우리딸




계절이 계절인지라 황남대총 앞에는 이팝나무가 만발해 있었다. 사실 대릉원이 좋았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 대부분이 폐허인 경주에서 너무 깔끔하게 정리된 것이 도리어 그 매력을 반감시키는 것 같았다. 게다가 어떻게 천마총을 그렇게 헤집어 놓을 수 있는 거지? 근처에다 모형으로 내부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 전시관을 만들면 되지 않나? 그런데 이번에는 그저 걷기만 하는데도 좋았다. 날씨탓인가? 고분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은 풍경이다. 딸이 카메라를 빼앗아 사진을 찍었다. 난 그런 딸의 모습을 휴대폰 카메라에 담았다.  

   

딸은 석양을 찍고, 나는 딸을 찍고


첨성대는 딸이 제일로 가고 싶어했던 곳이다. 얼마전 과학교실에서 크리넥스 상자로 첨성대 만들기를 했단다. 그 때 미리 본 첨성대의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나 보다. 야간 조명을 받은 첨성대는 근사했다. 그런데 사람이 진짜 많았다.  번잡한 경주는 여전히 어색하다. 얼른 기념사진 찍고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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