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下第一 猪肉大會)
시골 마을이라고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내가 사는 마을에는 이웃들과 함께 하는 일들이 많다. 같이 책도 읽고, 같이 자전거도 타고, 같이 감자도 캐고…. 그런데 주로 아이들을 위한 활동이 많다보니 어른들을 위한 재밌는 모임이 없는 걸 아쉬워하는 목소리들이 있었다.
얼마 전 아내가 가까운 이웃들과 함께 하는 등산 모임에서 같이 모여 음식을 나눠먹으면 어떨가 하는 의견이 나왔단다. 메뉴는 누구나 좋아하는 제육볶음. 그냥 하면 재미없으니 경연을 하자고 했고. '오! 그럼 모임의 이름은 제육대회 어떨까요?'라는 기가 막힌 작명 또한 이어졌다. 그래서 얼떨결에 2024년 6월 15일 토요일에 제 1회 천하제일 제육대회(天下第一 猪肉大會)를 우리집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주변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반드시 최고의 제육볶음을 만들어 기어코 1등을 쟁취하겠다고 기염을 토하는 집들이 속출했다. 다들 먹고 노는 것에 진심이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내가 심사위원으로 뽑혔다는 것이다. 무슨 기준으로 선정되었냐고 아내에게 물으니 내가 제일 많이 자주 제육볶음을 먹었기 때문이란다. 나도 경연에 참여하고 싶은데…
날짜가 다가올수록 열기가 뜨거워졌다. 실제로 마을 단톡방에 미리 제육볶음을 만들어봤다는 메세지가 수시로 올라왔다. 덩달아 호스트를 맡게 된 우리도 바빠졌다. 아내는 데크를 다시 칠했다. 사실 제육대회 때문이 아니라 나무가 뒤틀리기 시작해서 원래 하기로 한건데 시기가 딱 겹쳐 제육대회를 위해 데크까지 정리한다는 소문이 났다. 나는 주말마다 마당에 풀을 뽑았다.
당일날 아침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날씨가 쾌청했다. 장하게 핀 수국도 한창이라 보기 좋았다. 청소하고, 빨래하고, 제육대회 행사장을 마련하느라 오전 내내 분주했다. 경연에 참가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워 나는 제육볶음과 잘 어울릴 음식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 토마토 달걀볶음. 마당에 그린빈이 튼실하게 자라 그것도 넣고 하기로 했다.
저녁 6시. 함께 노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마을 식구들이 속속들이 집에 도착했다. 총 6식구가 갈고 닦아 만든 제육볶음을 상에 올렸다. 그런데 갑자기 비! 할 수 없이 지붕 밑으로 자리를 옮겼다. 좁았지만 옹기종기 모여 함께 있으니 더 좋았다.
나보고 얼른 1등을 뽑으란다. 이런…. 난 그냥 같이 여유롭게 먹고 마지막에 1등상을 발표하는 건 줄 알았는데… 역시 다들 경연에 진심이다. 하나씩 맛을 보는데 스무명이 넘는 식구들이 나를 쳐다본다. 이거 왜 이렇게 떨리는거야!!!
그런데 참 신기하지. 그렇게 흔한 음식인 제육볶음인데도 식구들마다 다 개성이 있었다. SNS에서 같은 조리법을 보고 만들었다고 하는데도 맛이 다 달랐다. 불맛이 나는 것도 있고, 살짝 된장을 넣어서 풍미를 더한 것도 있고… 1등을 고르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가장 표준적인 맵고 짜고 달짝지근한 것을 골랐다. 다 같이 박수!!! 부상으로 홍삼세트를 들고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식사. 비는 쏟아지는데, 좁은 지붕 아래서 스무명이 넘는 아이들과 어른들이 옹기종기 모여 제육볶음을 먹었다. 이 제육은 이래서 맛있고, 저 제육은 저래서 좋았다고 웃고 떠들면서 먹었다. 다행히 내가 만든 토마토 달걀볶음도 인기가 괜찮았다.
식사를 마치니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남는 게 거의 없었다. 함께 먹으면 뭐든 더 맛있는 법이니까. 다들 이 재밌는 모임을 한 번 하고 끝낼 순 없다고, 분기에 한 번씩은 하자고 했다. 장소는 1등을 한 집에서 돌아가면서 하기로 했고. 일사천리다. 그럼 메뉴는? 고기 먹었으니 해산물도 먹기로 했다. 그리하여 2차 대회의 이름은
천하제일 해물대첩!
P.S> 제육대회의 한자를 찾아보다가 제육이 한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검색하면 제肉으로 나온다. 좀 더 검색하니 돼지고기라는 뜻의 猪肉(저육)이 음가가 변해서 제육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당황스러울 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