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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잇나잇 Feb 17. 2020

그녀의 이름은

노르웨이에서 만난 한국인 입양아


 시엄마에게 초대받아 저녁을 먹으러 간 날 이웃 중에 두 명의 한국인을 입양해서 키우는 집이 있다고 들었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걸 듣고 굉장히 만나고 싶어 한다며 내가 꺼리지 않으면 만나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야 사람들을 만나는 게 신나는 사람이라 당연히 좋다고 생각하고, 한국인 입양아라니 솔직히 신기하기도 해서 더 만나고 싶다고 했다. 얼마나 가벼운 사람인지 나는. 


 내가 좋다고 대답하고 바로 이틀 뒤, 그 집에서 우리를 초대했다고 한다. 시간이 되면 주말에 오면 좋겠다고. 당일날, 엄마 집에 가서 냉동피자를 먹고 2분 거리의 이웃집으로 향했다. 나는 입양된 아이들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할 거라 생각했다. 첫째는 남자아이로 19살, 지금은 트론헤임에 있는 대학에 가있다고 했다. 둘째는 17살 소녀로 감기에 걸려 아마 오늘 만나지 못할 거라고 했다. 아이들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게 아니었구나. 양부들이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질문을 하고 싶다고 했다. 또, 입양한 양부모님은 두 분 다 의사라고 하셨다. 노르웨이에서 의사는 한국에서만큼 돈도 많이 벌고(세금이 많아서), 사회적 지위(한국만큼 직업에 귀천이 심하지 않음)가 있는 직업이 아니지만 어쨌든 좋은 집으로 입양 갔구나 생각하고 별생각 없이 그 집으로 들어갔다. 다른 노르웨이의 집들과 크게 차이가 있지 않았다. 싱글맘으로 내 남자 친구를 길렀던 엄마의 집과 집 구조도 똑같았다. 


 양부는 우리를 크게 환대해 주시며 내 재킷도 받아 걸어주셨다. 어색했다. 밝은 척 인사를 하고 들어가긴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몰랐다. 그래서 집을 둘러보다 입양 온 이 집 아이들의 아기 때 사진을 보게 되었다. 전형적인 한국 아기의 모습이었다. 아기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 옆으로 아이들을 집을 데려오러 한국에 갔을 때 인사동에서 산 것이라며 설명해주시는 전통 신랑 신부 한복을 입은 인형도 유리 상자에 담겨 한쪽에 진열이 되어있었다. 그 뒤로 한쪽 벽에는 예쁜 노리개가 액자처럼 벽에 걸려있었고, 부엌에는 조선시대처럼 보이는 생활화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걸려있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리고 아마 나보다는 잘 모르지 않을까 생각했기에 보이는 한국 물건들, 사진들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설명을 하면서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널뛰기라는 단어가 잘 기억나지 않았고, 강강수월래의 이름이 강강수월래인지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강강술래가 맞다) 아는 대로, 조금 틀린 설명을 붙였을지 모르게 설명을 하는 동안 감기에 걸려 볼 수 없을 거라던 딸이 2층에서 부엌으로 내려왔다.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두 번 정도 틀리고서야 이해하고 제대로 그녀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었다. 


 거실에 차와 과자가 준비되어있었다. 안내받은 자리에 가서 앉았고, 양부, 양모와 그녀도 같이 탁자에 둘러앉았다. 처음 이야기는 양부가 시작했다. 남자 친구와 내가 무엇을 하는지, 직업에 대해 물었고, 노르웨이에 온 지 얼마나 됐냐고도 물었다. 뜨문뜨문 한국에 대해서도 물었다. 주로 양부가 질문을 하고 내가 대답을 했기에 17살 소녀는 한국에 대해 별 관심이 없구나, 정말 부모가 나에게 질문이 많아서 만나고 싶었나 보구나 생각했다. 양부의 질문이 끝나갈 즈음, 다행스럽게도 불닭볶음면이 떠올랐다. 유튜브에 불닭볶음면 챌린지가 유행할 만큼 큰 건이었으니 이 소녀도 알지 않을까, 혹시 이 아이도 먹어본 적이 있을까. 이 이야기를 꺼내자 그때서야 그녀의 목소리도 커지고 자신감이 묻어있었다. 매운 음식을 잘 먹는다며 자기도 먹어본 적이 있었고 그리 맵지 않았다고. 나는 그건 나한테도 매워서 나는 소스를 다 넣어 먹지 못한다고 대단하다고 했다. 그리고 한국에는 그게 여러 시리즈가 있는데 여기의 아시아 마켓에서는 세네 가지 정도밖에 못 봤다고, 그 못 본 것 중에 하나가 까르보 불닭볶음면이라는 건데 우리 집에 가면 많이 있다고, 다음에 엄마 집에 올 때 몇 개 들고 오겠다고 했다. 그녀는 그러면 너무 고맙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가 내게 처음으로 질문했다. 역시 케이팝에 대해서였다. BTS가 외국에서 먼저 유명해져서 나도 알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K-POP의 큰 팬은 아닌 것 같았지만 아이돌 얘기를 하는 것 보니 어린아이 기는 하구나 싶었다. 김치 이야기가 나왔다. 남자 친구나 내가 음식을 잘 만들면 언제고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고 싶은데 실상은 우리는 '몬스터 푸드'라고 불리는 음식들을 만들어먹고 있다고, 나중에 우리가 음식을 잘 만들게 되면 한번 한국음식을 대접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 달이 넘게 감감무소식인 한국에서 배로 오고 있는 우리 밥솥이 오면, 한국 음식 중 가장 쉬운 음식에 속하는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줄 수도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녀의 가족 얼굴에 웃음기가 띄었다. 18살이 넘으면 그녀가 한국의 가족을 찾을 수 있는 합법적인 나이가 된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한국에 왜 가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한국 사람들을 보고,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서 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친부모를 찾고 싶은 것인지 물었다. 조금 머뭇거리는 듯 보여 질문이 적절치 못했던 것 같다고 대답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녀는 영어로 말하기가 어려워서 그런 거라며 대답하고 싶다고 했고, 나는 남자 친구가 통역을 할 테니 노르웨이어로 편하게 얘기하라고 했다. 그녀는 자신의 친부모가 궁금하다고 했다. 자신이 태어난 곳이 보고 싶다고 했다. 거기엔 아무런 증오나 미움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런데 한편 그녀는 친부모를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친부모가 자신을 안 보고 싶어 하거나 죽었으면 너무 슬플 것 같다면서. 그래서 한국에는 가고 싶은데 친부모를 찾아봐야 하는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어려운 문제일 거라고 대답했다. 


 그녀의 집엔 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고 했다. 여기서의 대화가 얼추 끝나간다고 느낄 때 그 고양이가 떠올랐다. 그녀에게 고양이가 지금 어디 있냐고 물었다. 2층에 있다고 보고 싶냐고 하길래 올라가서 봐도 되겠냐고 묻고 따라 올라갔다. 2층으로 올라가는 길 그녀는 자기의 방이 더러우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아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방도 더럽고 사람들 방은 항상 더러운 법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잠시 뒤 열린 방안, 그녀의 하얀 침대 위에 커다란 고양이가 자고 있었다. 한국 우리 집에 있는 세 마리의 고양이중 막둥이 같은 소위 ‘고등어’ 고양이의 노르웨이판 같았다. 무늬도 비슷하지만 귀 끝이 조금 더 쫑긋하고 털이 더 폭실폭실한 느낌이었다. 다행히 사람 손을 많이 탄 고양이라 처음 보는 내가 만져도 골골 송을 부르며 쓰다듬을 즐기는 고양이었다. 고양이로 인해 우리는 단둘이 대화를 하게 되었다. 한국의 우리 집에도 고양이가 세 마리고 그 막내랑 얘랑 닮았다고. 남자 친구가 이 나라에는 길고양이나 길개가 없다고 하던데 그게 맞냐고. 이 애도 혹시 내가 본 다른 두 마리의 고양이들처럼 자기 혼자 밖을 왔다 갔다 집을 찾아 돌아오냐고. 그렇게 고양이 얘기를 하다, 우리 집 고양이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녀는 소녀처럼 말이 많았다. 1층에서 조용하고 수줍어하는 모습은 없었고, 들뜨고 수다쟁이의 17살 소녀가 거기 있었다. 


 고양이 사진을 보여주려 사진 앱을 켰다가 한국 음식 사진도 많이 있길래 하나하나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건 갈비라고 하는 거야, 이건 소떡소떡이라고 휴게소에서 꼭 먹는 간식 같은 거야. 이건 삼계탕이고..... 그녀는 한국음식이 너무나 먹어보고 싶었다고 노르웨이에 이런 한국 음식점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밖에서 먹는 건 워낙 비싸니 먹어본 적도 많이 없고 자기가 먹은 게 한국 음식인지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에 가면 꼭 한국음식을 많이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음식으로 한국 이야기를 시작해서 내가 머리를 어떻게 염색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거쳐 그녀는 자신이 양쪽 편에 다 못 속하는 중간에 걸친 사람 같다고 얘기했다. 자신은 한국인처럼 생겼는데 자신의 부모는 두 분 다 완전한 노르웨이인의 모습이라 밖에 나가면 누구든지 자신이 입양됐다는 걸 바로 알아본다고 그게 조금 불편했다고 한다. 그래서 입양인에 대한 차별 같은 게 있냐고 물었고 그녀는 그런 건 없다고 했다. 그 없다고 말하는 대답이, 안도감이 들면서도 굳이 말하지 않으면 몰라도 될 일이 다른 외모에서 드러나고야 마는 일이라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정말 이상하게도 그게 자신의 유전자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은 아시아 음식에 끌린다고 했다. 1살도 되기 전에 입양이 돼서 평생 노르웨이 음식을 주식으로 먹고살았을 텐데도 그렇냐고 하니 그렇다고 대답하며 자신의 노르웨이 음식이 맛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아플 때 자신은 아시아 음식이 떠오른다며, 감기에 걸려 앓은 지난 3일 동안에도 자신은 초밥이 먹고 싶어 먹었다고 했다. 배가 고파 냉장고 문을 열어도 보이는 건 빵과 브라운 치즈인데 그러면 입맛이 떨어지지만 드라마나 영화에서 아시아 음식을 먹는 장면이 나오면 자신도 배가 고프다고 했다. 학교에서 체격검사를 하면 자신은 항상 저체중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고 한다. 살이 찌고 싶어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가 않는다 했다. 바로 어제 이 주제로 남자 친구와 이야기를 했었다. 나는 빵이 주식처럼 느껴지지 않아 빵을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다고, 아마 밥을 먹어야 하나 보다고. 그런데 그녀가 바로 나와 같은 이야기를 한다. 한국에서 채 1년도 살지 못한 아기였는데 32년을 한국인으로 한국에서 살아온 나와 똑같이 느끼고 말을 한다. 


 그녀를 만나기 전에는 노르웨이에 한국인 입양아가 이렇게 많은지 몰랐다. 2년 전 오슬로의 한국 대사관을 갔을 때 대사관 직원에게 노르웨이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몇 명이나 되냐고 물었다. 그는 입양아까지 합쳐서 2천 명이 채 못된다고 대답했다. 나는 속으로 입양아가 얼마나 된다고 입양아 얘기를 하지? 하고 말았다. 오늘 17살의 그 소녀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와 나는 노르웨이에 어째서 한국인 입양아가 있는지 궁금해졌고 그러다 노르웨이에 입양된 다른 사람들의 뉴스를 접할 수 있었다. 50년대야 한국전쟁 후라 전쟁고아가 많았다. 그때 홀트라는 미국인 부부가 한국에서 8명의 한국인 아이들을 입양했고 몇백 명의 아이들을 다른 나라로 입양시켰다. 나는 그게 몇 년 전이야 그랬지 요즘은 다를 거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 소녀와 그녀의 오빠는 각자 2002년, 2000년에 태어나 입양되었으니 전쟁고아도 아니고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시간대에 태어나 입양이 되었다. 한국에서 해외로 입양을 보내는 수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해마다 몇백 명은 되었다. 나는 그 숫자에 충격을 받았다. 아직까지 그렇게 많다고? 그리고 그 이유의 대다수가 미혼모라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화가 났다. 내가 화가 나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미혼모를 지원해주지 않는 사회 시스템에 화가 나야 하는 건지, 키우지도 못할 아기를 막무가내로 임신한 그 친부모들에 대해 화가 나야 하는 건지, 아니면 얼굴도 완전히 다르게 생겨 입양했다는 걸 일찍이부터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데도 이런 먼 곳으로 입양을 보낸 입양 기관에 화를 내야 하는 건지 모르겠었다. 


 그녀에게 친부모가 키우는 것보다, 이렇게 좋은 양부모를 만나 자라게 된 게 오히려 네 삶에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내가 어떤 말을 건네기엔 나는 그녀가 겪어야 했을 것들에 대해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감히 내가 내 생각 따위를 얘기할 수 없었다.  2층 그녀의 방에서 그녀와 내가 단둘이 있을 때 그녀는 내게 자신의 이름을 한국어로 어떻게 쓰는지 알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엄마 아빠한테는 아직 비밀이지만 자기가 충분히 큰 다음에 문신을 하고 싶다면서. 내가 쓰는 이 글씨가 본이 되어 그대로 그녀의 몸에 평생 남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한자, 한자 바르게 그녀의 이름을 천천히 종이에 적어내려 갔다. 


 그녀의 이름은 송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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