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이 없는 나라
노르웨이에서 발견한 '소비'에 대한 단상
노르웨이에 살기 시작하고 한 달쯤 됐었을 때일까.
여자라서 그런 건지,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습관에서 못 벗어난 것 때문인지, 아니면 그 둘다의 이유에서든지, 나는 길을 걸어 다니며 이 곳 사람들이 옷을 어떻게 입나, 어떤 스타일로 꾸미고 다니나를 자주 보곤 했었다. 패션은 정말 1도 모르고 큰 관심도 없지만 '유럽'이라는 막연한 동경에서 이곳 사람들은 어떤 스타일로 입고 다니나 궁금했다. 겨울에 다들 롱 패딩을 입고, 봄이면 트렌치코트를 입는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여기에서도 그런 '트렌드'같은 것이 있나 싶었다. 그런데 눈에 띄게 예쁘게 입은 사람도 없었고, 사치품(luxury brand의 luxury를 직역해서 이와 같이 씁니다) 하나를 든 사람도 없었다. 공통으로 발견되는 '트렌드'같은 것이 없었다. 공통이라면 하나같이 그렇게 칙칙한 무채색의 옷들 뿐이라는 것. 옷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인 '몸을 둘러싼 물건'이라는 목적을 다 하고 있을 뿐.
어느 날은 남편(당시 남자 친구)이랑 오슬로 중심가, 시내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루이뷔통이니 샤넬이니 하는 사치품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물론 루이뷔통과 샤넬이 '내가 그 루이뷔통이고 그 샤넬이야'라고 로고를 드러내거나 티를 내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내가 아는 루이뷔통의 티가 팍팍 나는 그 가방들이 없었다. 한국에서 길을 걸으면, 특히나 그게 시내면 한 시간에 한 번씩은 봤을 그 루이뷔통을, 여기 온 지 한 달, 두 달이 되어가는데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엇?" 그러자 여기에 루이뷔통이나 샤넬 매장이 있기나 한 건가 하는 생각에 미쳤다. 한창 오슬로 구경을 하고 다니던 터라 쇼핑몰이며 백화점이며 어디며 여기저기 다 구경하며 다녔는데 그 흔한 '사치품 매장'한 번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거다. '뭐지, 이 녀석(당시 남자 친구)이 내가 그 매장 보면 백 하나라도 사달라고 할까 봐 일부러 그런 곳만 피해서 나를 데리고 다니는 건가.' 하는 생각을 잠시, 아주 잠시 하며 잠깐 눈을 치켜떴던 것도 같다. (너는 몰랐겠지만 미안하다.) 그리고는 '그래, 네가 안 데리고 가면 내가 찾아보지 뭐.' 하고는 구글 맵을 켰다. 루이뷔통 검색. 샤넬 검색. 루이뷔통이 있기는 하네.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 딱 하나. 심지어 샤넬은 없다. 빈티지 샵만 나온다. 와. 진짜로 매장이 없을 수가 있구나.
근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샤넬 매장이 꼭 있어야 하는 건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곧 '아, 내가 이렇게나 이런 것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살아왔구나. 루이뷔통이고 샤넬이고 그런 사치품 하나도 안 가지고 있는데도. 그런데도 그런 매장은 당연히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었구나.' 하고 나를 돌아보게 됐다.
그러자 노르웨이의 텔레비전 광고들이 떠올랐다. 한국에서 봤던 무수한 광고들. 정말 없는 광고가 없이 다 있었다. 이거 새로 나왔는데 봐봐 멋지지. 이것 너 말고 다 있어. 사야 될 것 같지 않아? 이게 트렌드라고, 이걸 사야 한다고 말하는 광고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내가 노르웨이에서 본 광고는 몇 종류 없었다. 통신사 광고. 중고 물건을 사고파는 웹사이트 광고. 지오다노 같은 느낌의 브랜드 옷 광고. 그리고 대부분을 차지하는 마트 음식 광고. 아, 그리고 빠지면 섭섭한 인테리어 브랜드 광고(역시 북유럽은 북유럽인가). 차 광고. 그런데 내 생각에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광고의 50%는 마트에서 파는 식료품 광고였다. 코코넛으로 만든 요구르트가 새로 나왔다며 광고를 할 때도 있었지만 여기에서 홈플러스나 이마트 같은 느낌의 마트들이 세일 중임을 알리며 저렴하게 사라고 말하는 광고들도 있었다.
내 남편은 신발이 딱 두 켤레다. 그나마도 하나는 구두라서 정장을 입는 날에만 신고(예를 들어 본인 결혼식), 다른 하나를 주구장창 매일매일 신는다. 이 옷에 맞춰 이걸 신거나 저 옷에 맞춰 다른 걸 신는 게 없다. 그렇게 신다가 헤지면 그 똑같은걸 또 사서 또 그렇게 주구장창 신는다. 내 남편의 오랜지기 친구도 똑같다(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심지어 같은 브랜드 같은 모양 신발이다).
내 친구의 남편은 티셔츠에 구멍이 숭숭숭숭 났는데도 계속 입어서 구멍 났으니 버려야 하지 않겠냐는 친구의 말을 듣고 그런가 했다고 한다(버렸는진 모르겠다.)
내 남편의 큰아버지는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신다. 70년대에 산 그 자전거로 아직도 출퇴근을 하신다. 나보다도 연식이 더 오래된 자전거인데 아주 잘 타고 다니신다.
여기 사는 한국인 분들은 한 번씩 한국 들어가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 촌스러워졌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하셨다.
Finn.no라는 유명한 중고 거래 웹사이트가 있다. 정말 모든 것을 다 중고로 판다. 공짜로 주는 것들도 많다. 많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서 안 쓰면 중고로 내놓고 공짜로 가져가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또 중고를 사서 쓴다.
노르웨이는 세상에서 손에 꼽히는 부자나라다. 석유로 들어오는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잘 모아서 국유 펀드를 만들고 복지에 투자했다. 사람 귀한 나라다. 인건비가 무지하게 비싸다. 알바만 해도 시급이 이만 얼마는 된다. 마트에서 일을 하든 공사장에서 일을 하든 내 한 몸은 챙기며 살 수 있고 돈 모아 휴가마다 여행 가고 저축할 수 있다.
근데 사치품 매장이 없다. 사치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도 얼마 없다(그마저도 외국인 일지 모른다). 물건 하나를 사면 헤지고, 고장 나고, (고장 나면 또 고쳐쓰기도 한다. 저 Finn.no에선 끊어진 케이블선 연결하는 방법 등도 알려준다.) 수명이 다 할 때까지 쓴다. 말짱한데 안쓸 것 같으면 다른 사람이 가져다 쓴다. 사람만큼이나 물건도 귀한 줄 안다. 남들이 산다고 나도 사는 게 아니라 내가 맘에 드는 걸로 사서 오래오래 쓴다. 남의 시선에 들게 물건을 사지 않고 내 만족에 들게 물건을 산다. 소비를 종용하지 않고 고쳐 쓰고 바꿔쓰자 한다.
이곳은 그동안의 내 소비를 되돌아보게 한다. 뉴스를 보러 들어간 포털 사이트에서 '남들이 다 샀다는 이 물건!'라는 광고를 보고 클릭해 들어가 '따라 샀던'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필요하진 않지만 싸다는 이유로 행했던 소비를 되돌아보게 한다. 유행이 지났다며 더 이상 입지 않던 옷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남에게 '있어 보이려' 했던 내 소비를 되돌아보게 한다. 나는 앞으로 어떤 소비를 하며 살 것인가 내다보게 한다.
# 제목의 사진은 장갑입니다.
노르웨이에서는 길을 걷다 주인잃고 땅에 떨어져있는 장갑이 있으면 주워서 근처 물건 위에 올려두거나 저렇게 나무에 걸어둡니다. 주인이 다시 찾아갈지가 의문인데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