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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철홍 Aug 30. 2024

<더 원더스> 모든 성장 서사는 마술적이다


예전에는 마음에 든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영화를 온전히 내 걸로 만들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이니, 

당연히,

그 영화의 모든 순간들을, 몇 분에 무슨 장면 나오고 어떤 장면에서 누가 무슨 대사를 치는지

이런 것들을 완전 달달 외울 정도로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뭔가 '평론가'라면 모든 영화에 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언젠가부터는 그걸 목표로 하지 않게 되었다.

인간 나무위키가 되기에는 내가 부족하다는 걸 느끼기도 했고,

또 그런 건 내가 소비자 입장이래도 재미가 없게 느껴졌기도 하다.

대신 어떤 영화를 보더라도,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인간이 되자.

어떤 '영화(에 관한)' 이야기가 궁금할 때 찾게 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영화를 본 '누군가의 이야기'가 듣고 싶을 때 찾게 되는 거 사람이 되자.

최대한 이런 생각으로 영화를 보고, 그 생각의 결과를 말과 글로 남기려고 했다.


하려던 말은 다른 얘기인데 서두가 길어졌다.

하려던 말 = 온전히 내 걸로 만들고 싶은 영화가 생겼다. 이다.

이젠 안 그러고 싶어졌는데.. 를 설명하려다 보니..


그리고 그 영화가 바로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더 원더스>. (사실 이 감독 영화 전부 다이긴 함)

씨네21 1469호에 쓴 <더 원더스> 비평 글에서는

영화를 온전히 내 걸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역시 그렇게 하지는 못했고,

대신 알리체 로르바케르 영화 얘기하면 맨날 나오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실체, 그래서 마술적 리얼리즘이 대체 뭐고, 그걸 영화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르바케르가 그걸 왜 했는지, 아니 왜 했어야만 했는지에 관한 내 생각을 적어봤다.




모든 성장 서사는 마술적이다.


마술적 리얼리즘 영화들의 계보 속에 있으면서도 고유한, 그래서 정말로 귀중한 영화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감독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더 원더스>는, 모두가 이미 알고 있듯 여기에 로르바케르의 첫 ‘마술’이 있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답사할 가치가 있는 영화임이 분명하다. 미래의 시점에서 무언가의 처음을 목격한다는 건 늘 생경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인데, 심지어 그 무언가가 마술이라면 보는 이의 입장에서 놀라움을 느낌과 동시에 마음의 벽까지 허물 수도 있다. <더 원더스>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마술이 그렇다. 이 쇼의 마술사는 가족의 대표 젤소미나(마리아 알렉산드라 룬구)이고, 관객은 젤소미나 가정에 위탁된 외부인 마르틴(루이스 휠카)이다. 젤소미나는 마르틴의 호감을 얻기 위해 입에서 벌을 꺼내는 마술을 선보인다.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상대의 긴장을 풀기 위해, 그럼으로써 관계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사용되는 이 마술이 알리체 로르바케르 영화의 본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관점에서 <더 원더스>는 로르바케르가 왜 마술을 할 수밖에 없는지, 어떻게 마술을 할 줄 아는 존재가 됐는지에 관한 설화로 읽히기도 한다.


젤소미나의 특별한 능력

<더 원더스>는 그 줄거리만 따지자면 젤소미나의 성장 서사를 담고 있는 영화다. 젤소미나는 낡은 시대관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 볼프강(샘 루윅)이 만들어놓은 양봉 가정의 비이성적인 규칙으로 인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지 못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아니, 그녀는 애초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잘 알지 못하는 상태다. 그저 지금 그대로의 삶을 최대한 연장시키려는 아버지의 욕망을 본인의 욕망이라고 믿고 있을 뿐이며, 때로는 동생들에게 아버지에게 배운 권위적인 모습을 보일 정도로 위태롭다. 여기서 이런 젤소미나를 (선배 ‘마술사’이기도 한)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1954)의 곡예사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와 비교하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은데, 특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 차이점이다. 첫째는 둘이 선보이는 쇼의 목적이 다르다는 것이고, 둘째는 <더 원더스>의 젤소미나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능력이다.


먼저 젤소미나의 슈퍼파워는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본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젤소미나는 처음엔 그 능력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지 못하다가, 영화 속 사건들을 거치면서 점차 깨달음을 얻게 된다. 영화 초반부엔 젤소미나가 자신의 능력을 아버지의 왕국을 유지하는 데 사용하는 모습이 나온다. 젤소미나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동생이 취침 시간에 어둠 속에서 수상한 움직임을 보일 때 이를 가장 먼저 캐치하기도 하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동생이 작업 시간을 어기려는 행동을 보이자 다시 한번 어둠 속에서 동생을 발견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버지가 부족한 벌의 개체수를 지적할 때도, 새로운 벌집의 위치를 앞장서서 찾아나서는 것은 젤소미나다. 이처럼 젤소미나는 (곡예사 젤소미나처럼) 자신의 특별한 재능으로 인해 보호자의 애제자로 간택받고, 그의 길이 곧 자신의 길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상태다.


그런 젤소미나의 참재능이 발휘되는 순간은 가족의 미래를 볼 때다. 작업이 끝나고 아버지를 포함한 가족들이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즐길 때 젤소미나는 홀로 뭔가를 느끼고 마치 망을 보는 사람처럼 주변을 살핀다. 이대로 현재의 삶을 즐기다 맞이하게 될 불행한 미래가 눈에 보인 것일까. 그때 그들에게 TV프로그램 ‘전원의 기적’의 촬영 스태프가 다가옴에 따라, 젤소미나가 감지한 무언가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다. 그건 바로 기회다. 가족을 이 어둠 속에서 기적적으로 구할 수 있는 기회. 모두를 날려버릴 것 같은 세찬 바람이 부는 어느 날, 그래서 벌집이 든 상자의 뚜껑이 전부 날아가버릴 것 같은 어느 날, 온몸으로 뚜껑을 누르고 있던 젤소미나는 더이상 못 참겠다는 듯 말한다. “아빠, 우리 거기 참가해요.” 그렇게 젤소미나는 자신이 본 빛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 순간부터 가족들을 TV프로그램에 노출시키려는 노력을 펼치게 된다.


그리고 그 TV프로그램에서 젤소미나는 대망의 두 번째 마술을 선보이게 된다. 가족의 대표로 출연한 아버지는 자신에게 카메라가 왔을 때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이상한 말들을 내뱉는다. 그는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자다. 이를 알아차린 진행자가 다음 순서로 넘어가려 하자 젤소미나가 그를 붙잡는다. 그러곤 다시 한번 입에서 살아 있는 벌들을 꺼내는 마술을 행한다.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바꾸기 위해, 그리고 가족의 미래를 위해, 젤소미나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세상이 비추는 빛에 자기 자신을 던지는 이 순간, 젤소미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진짜 능력과 그것의 진정한 목적을 깨닫게 된다.


이것의 다른 말은 곧 ‘성장’이다. 우리는 한 인간이 자신의 능력과 그 쓰임을 정확히 인지하는 걸 두고 성장했다고 표현하곤 한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미래의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마술적일 수밖에 없다. 성장 전의 나와 성장 후의 나 사이의 간극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변화가 판타지 세계에 등장하는 ‘마법’이 아니라 ‘마술’인 것은, 이것이 분명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그렇다. 바로 이 현실에 기반한 성장 서사가 로르바케르가 스크린에 구현하고 있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실체다.


우린 모두 로르바케르다

비록 프로그램에서 좋은 결과를 얻진 못했지만, 이제 젤소미나는 확실히 무언가를 볼 줄 아는 존재가 되었다. <더 원더스>의 엔딩은 젤소미나가 그 능력을 통해 보고 있는 것을, 다시 말해 성장한 젤소미나의 시선을 영화가 관객에게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누군가가 묻는다. “젤소미나, 무슨 생각 하고 있어?” 젤소미나는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하는 대신 집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이를 따라 카메라가 제자리에서 패닝을 시작하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사라지고, 그들이 살던 빈집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것일까. 그 답을 할 수 있는 것은 젤소미나뿐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이제 능력을 정확히 쓸 수 있는 젤소미나가 가족이 집을 떠난 미래를 미래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서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곧 미래에서 과거를 보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뜻하므로, <더 원더스>가 <키메라>의 기원이라는 주장은 바로 이 엔딩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더 원더스>는 (국내 개봉 순서인) <행복한 라짜로> <키메라>라는 여정을 통해 경이를 목격한 관객들에게 첫 기적이 발현된 성지로서 순례할 만하다.


그러나 물론 로르바케르는 자신의 영화를 본 관객이 오로지 순례자 역할로만 남아 있는 것을 원치는 않을 것 같다. 다시 한번 로르바케르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성장 서사는 마술적이므로, 언젠가 성장할 우리, 인생 어느 시점에서 반드시 ‘마술’을 터득할 우리는 모두 젤소미나이자 로르바케르(가 될 것)이다. 그의 영화는 그래서 매혹적이다.


http://www.cine21.com/news/view/?idx=6&mag_id=105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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