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영화제에서 관객과의대화를 진행했던 <더 킬러스>가 개봉했다. 부산 가기 전, 나에게 할당된 영화 리스트를 받아들었을 때부터 가장 기대했던 작품이었는데, 실제로 본 영화 또한 그 기대의 담장을 거뜬히 넘겨버리는 영화였다. 야구 비유를 든 건 지금이 내가 응원하는 팀 기아 타이거스가 KBO 한국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는 시기인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이 영화가 네 명의 연출자 팀이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다. 1번 타자 김종관, 2번 타자 노덕, 3번 타자 장항준, 그리고 4번 타자이자 총괄 프로듀서인 이명세. 네 타자가 만든 네 편의 단편 영화 모음집이 곧 <더 킬러스>이다.
<더 킬러스>는 당연한 말이지만 킬러들에 대한 영화이다. 네 편의 영화엔 모두 누군가를 죽이려는 자들이 나온다. 그들이 죽이려는 사람도 다르고, 그 사람을 죽여야 하는 이유도 다 제각각이다. 그래서 네 편의 영화는 또 당연히 각기 다른 네 편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넷이 하나로 묶일 수 있는 것은 그 킬러들이 공유하고 있는 정서가 같기 때문이다. 타겟도, 사연도 다르지만 반드시 같을 수밖에 없는 단 하나. 그건 바로 누군가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킬러가 킬하기 위해서, 킬러가 킬er이기 위해선 무조건 기다려야 한다. 그 기다림의 정서가 모두의 영화를 하나로 만든다. 아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하나들이 ‘하나’로 묶일 수 있게 된다. 무언가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죽여본 사람들의 무언가(無言歌)? 그래서 이 프로젝트를 탄생시킨 이명세 감독의 단편의 제목이 <무성영화>일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한줄평으로 ‘결말을 다 알면서도 끝까지 기다리게 하는 힘. 그 힘이 곧 영화’라고 썼다. 뭔가를 기다리는 행위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뭔가를 기다렸던 기억을 떠올려 봤다. 뭔가 기다린다고 할 때.. 이건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 아직 정해져 있지 않은 미래를 전제한 상태로, 그러니까 혹시 모를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 기다림을 지속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행위이지만, 이제 그 미래에서 다시 과거를 바라보면, ‘룩 백’해보면, 사실 결말은 다 정해져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의 엎치락뒤치락은 다 있겠지만, 멀리서 보면 다 알 것 같은 결말처럼 느껴진다. 킬러는 마침내 기다리던 자를 만나 방아쇠를 당겨 타겟의 목숨을 거둘 것이나, 그래서 그 다음은..? 영화 엔딩에 사족처럼 등장하는 ‘Apres cela’ 라는 문구가 계속 마음에 남는다. (Apres cela는 프랑스의 유명 설화에 나오는 말인데, 뜻이 ‘그 다음에’라고 한다.)
그러나 이 글은, 그리고 <더 킬러스>는,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 말하는 무언가는 아니다. 그것보단 비록 결말을 다 알지라도, 끝까지 몸을 비틀어보겠다는 선언에 가까운 글(영화)이다. <무성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기괴한 댄스, 그리고 “아무 말도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심은경 배우의 대사 등등이, 계속해서 인생을 -그리고 영화를- 지켜 보고 싶게, 내게 일어날 일을 기다리고 싶게 만들었다. 그 힘이 곧 영화 같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거기인, 뭐 더 새로울 거 없을 것 같은, 그렇지만 끝까지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기다리게 만드는. 내 시간(자신)을 죽이게 만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