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키는 프린트될 때 자주 덜컹거린다. 마치 진짜 올드-패션드 프린터기에서 종이가 출력되는 것처럼. 그냥 매끄럽게 출력되는 걸로 간단히 넘어가도 되는 이 장면을 봉준호는 여러 번 변주해가며 보여준다. 매끄러운 프린터기보단 구식의 덜컹거리는 프린터기가 아마 봉준호의 취향일 것이고, 그중에서도 ‘구식’이 취향이라기보다는 덜컹거리는 것이 그의 취향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예전엔 덜컹거려도 괜찮은 세상이었기에 구식 그 자체가 그리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은 최신 기술을 필요로한다. 새 시대가 요구하는 전문 기술을 보유하지 못해 하는 수 없이 자영업자가 된, 그런데 그마저도 그 흐름을 읽지 못해 망한, 그 결과로 우주선에 탑승할 때조차 아무런 기술을 요구하지 않는 역할군에 지원을 하게 된 미키는 그래서 ‘익스펜더블(소모품)’이 될 수밖에 없다. 유한하고 대체 불가능하기에 헌법의 기본권을 보장받는 인간의 신체가 소모품으로 전락하려는 상황. 영화의 오프닝, 인간의 신체론 올라오는게 불가능한 구덩이에 추락한 미키에게 약간의 기술을 가진 친구가 묻는다. “미키, 죽는 건 어떤 느낌이야?” 죽을 땐 순순히 죽지만 태어날 땐 덜컹거리면서 태어나던 미키는, 어쩌면 이때, 이제 다시 죽을 때도 덜컹거려볼까 하는 생각을 시작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봉준호가 생각하는 지금, 그래서 이번 영화로 창조한 세상은 인간을 도구로 전락시키는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최신의 기술이 필요한 상황이다. 인간의 신체가 미키처럼 손쉽게 프린트되는 거라면, 세상에 모든 노동법은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실 그리 새로운 문제 제기도 아니고,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나 <미키 17>은 분명 봉준호 취향의 영화다. 그래서 취향이 맞지 않는다면 영화 속 등장하는 여러 코믹 요소가 불필요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특히 체위 관련 이것저것들은 정말 별로였고 창작자로서의 봉준호의 감이 의심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들이 영화에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점만 취사선택해 사랑할 수 없다. 별로인 점만을 제거해서 누군가를 사랑하려는 생각은 인간을 복제하려는 욕망과 닿아 있다. 한 명의 대체불가능한 예술가임을 세계로부터 인정 받은, 그래서 하고자 하면 자신의 모든 덜컹거림들을 숨길 수 있는 봉준호는 <미키17>에서 그렇게 자신의 못된 취향들 모두를 드러낸다. 이래도 사랑해주실 건가요? 혹은, 난 이러니까 사랑하든지 말든지의 태도. 그 태도에서 어떤 후련함이 느껴졌지만,
미키는 영화의 끝에서 다시 한 번 프린터를 떠올린다…… 미련, 후회, 유혹 등등 … 의 감정까지가 곧 봉준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