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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by 김철홍

새로운 걸 쓰고 싶다. 어떤 새로운 메시지 말고 그냥 써진 것 자체가 새로운 거. 이렇게 써도 되는구나 싶은 거. 쓰기의 혁명 같은 거. 지금까지 써진 것들이 청산의 대상이라 생각하는 건 아니다. 아니 사실 가끔 그렇게 느낄 때도 있다. 또 진짜 가끔씩은 강력히 다 바꿔버리고 싶기도 하다. 그게 아니라면 쓸 필요를 못 느낀다. 그게 아니라면 왜 쓰는 걸까 생각한다. 왜 그들은 쓰는 걸까 생각한다. 또 누구는 왜 안 쓰지 못하는 걸까 생각한다. 그걸 생각하며 무얼 써야 하는지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 또 썼던 걸 쓴다. write일 수도 있고 use일 수도 있다. put on으로 생각해봐도 말이 안 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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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혁명.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마음.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귀중한 것, 젊음, 유한한 시간을 화염병 던지듯 투척하는 사람들의 운동 에너지. 그걸로 쏘아 올린 공이 실제로 사회에 공명을 일으키는 광경을 눈앞에서 목격할 때 느껴지는 카타르시스. 어쩌면 섹스보다도 더 큰 자극을 선사하는. 그래서 계속해서 더 큰 폭발을 좇게 되는. . . 시작은 그저 터뜨리는 게 좋아서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폭발 애프터 어나더가 ‘배틀’이 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는 자신들이 무작위로 터트린 것들을 나열하며 특정한 움직임으로 포장하고 호명해 주는 사람들로 인하여 더욱 발기된 것일 수도 있다. . . 말하자면 처음부터 완성된 빅픽처를 그려둔 채 이것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말을 또 하자면 처음부터 새로운 무언가의 완성 단계를 정해놓은 상태로 이것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혹은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시작하면 애초에 혁명은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 . 물론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사후 분석되어 신화화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혁명에서도 그렇지만 영화에서도 그렇다. 마치 머릿속에 편집이 완료된 한 편의 영화가 있는 듯 카메라로 현실을 뭉텅뭉텅 오려내는 한 예술가의 초상. 그렇게 누군가는 전설이 된다. 남들이 보지 못한 빅픽처를 본 사람. 시대의 밀물썰물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그 웨이브에 주도적으로 탑승한 사람. . . . 는 그 신화를 해체하는 영화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이를 조롱하거나 폄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오해받기 쉬운 영화는 맞다. 혁명의 반대 세력들이 신나서 이 영화의 이름을 들먹이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세상은 결국 혁명가들이 뱉은 말과 반대로 흘러간다고! ‘쥐새끼’가 되어 동지들을 팔아넘기는 이놈들을 보라고! 큰그림을 보는 자로 추앙받던 이들은 그들의 상반된 말년 때문에 조리돌림당하고, 마침내 그들이 열정을 쏟아부은 그 가치 자체까지 부정당한다. . . 여기서 더 큰 위기가 찾아온다. 빼앗긴 자들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그럼 그렇지 언제까지 빼앗기기만 할 그들이 아니다. 그럴 사람들이라면 애초에 그렇게 많이 거머쥐지 못했을 것이다. . 빼앗긴 자들은 빼앗긴 것을 다시 빼앗으려 할 뿐만 아니라, 혁명의 씨앗까지도 사실은 자신들이 뿌린 것이라 주장한다. 이것이 진짜 더 큰 위기다. 이것이 영화 속 숀펜의 대사 “rape in reverse”, 역강간이라는 표현에 숨겨진 의미다. 빼앗긴 것과 빼앗은 것, 원 소유주와 현 소유주, 어쩌면 네이티브 아메리칸과 지금의 아메리칸. 오랜 기간 모두의 공감을 기반으로 합의됐었던 단일한 역사 속 ‘빼앗은자-빼앗긴자’의 자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그들에 의하면 그들은 빼앗겨도 빼앗기지 않은 것이다. 강간당해도 강간당하지 않은 것이다. 빼앗겨도 강간당해도 자신의 자리는 바뀌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래도 지구는 자신들을 중심으로 돌아갈 거라는 프레임을 널리 퍼뜨린다. 그 프레임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그들이 정한 순서를 자연의 섭리, 세상의 진리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혁명은 동력을 잃는다. 혁명은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주어진 세상을, 기-득旣得을, 너와 나의 자리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영화는 없다. 그러면 세상은 영화가 안 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는 결국 이 장면이다. 이상하게 생긴 도로가 하나 있다. 위아래로 출렁거리는 파도처럼 생긴 도로. 왜 이렇게 생긴 건지 궁금한 도로. 도로가 이래도 되는가 싶은 생각이 드는 도로. 도로라는 게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기 위해 존재하는 거라면 이 도로는 탈락인 도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기 위해 존재하는 도로가 아닌 도로.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도로. 오르락내리락을 위한 도로. 여기서 저기로 간다는 결과는 바뀌지 않지만, 그 과정을 오르락내리락으로 채운 도로. 과정에서 자리를 바꾸는 도로. 그 오르락내리락을 더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된 아이맥스 촬영까지. . . 그 어지러움으로 인해 나는 이 영화 혹은 폴토마스앤더슨이 무엇을 지지하고 무엇을 조롱하는지 해석하는 것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보고 오랜만에 느낀 기분 좋은 어지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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