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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기억>

by 김철홍


언젠간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연기를 하고 싶은데 배우가 되고 싶지는 않다. 가끔은 평론가가 되고 싶었던 거지 평론을 하고 싶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연기에 관해선 아니다. 사실 나는 일상에서도 자주 연기를 한다. 모르는데 아는 척을 하고 아는 데 모르는 척을 한다. 평론가인 척을 하고, 평론가가 아닌 척을 한다. 자랑하고 싶은데 별것 아닌 척을 하고, 수치스러운데 떳떳한 척을 하고, 부럽고 질투 나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한다. 행복한 척을 한다. 상황이 매우 좋지 않은 척을 한다. 다 관두고 싶은 척을 한다. 다 관둘 수 있는 척 한다. 부지런한 척을 한다. 인스타그램을 별로 안 하는 척을 한다.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척을 한다. 천재형인 척과 노력형인 척을 섞어서 한다. 배우는 아니지만 이런 연기를 나는 아주 잘 한다. 반면 관심 없는데 관심 있는 척, 재미없는데 재미있는 척은 잘 못한다. 그 연기를 하다 들킬까봐 사람을 피할 때도 많다. 그걸 근거로 누군가에게 - 제가 재밌다고, 제가 좋다고 하면 진짜 재밌고 좋은 거예요 - 라는 말을 감히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나를 믿어달라고 하려고. 그러니까 내 연기를 믿어달라고 하려고. 이런 연기를 잘하면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을까 궁금하다. 좋은 배우는 이런 연기도 잘할까 궁금하다. 좋은 배우는 좋은 사람인 척, 재밌는 사람인 척도 잘하는가 궁금하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에 관한, 연기에 관한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최초의 기억>은 그런 영화다. 이 영화엔 연기하는 배우를 연기하는 배우들이 있다. 어디까지가 배우이고, 어디까지가 배우를 연기하는 배우인지 경계가 모호하게 느껴지는 영화다. 카메라가 찍고 있는 걸 인지하고 있지만 그걸 모르는 척, 카메라가 없는 척하는 것은 영화의 기본 세팅이기는 하지만, 배우가 배우를 연기하는 영화에선 또 다른 긴장감이 생긴다. 배우가 배우를 연기할 때 여기에 실제 배우를 얼마나 드러내고 또 숨기고 있는지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연기 워크숍 영화’는 더욱 재밌어진다. 현장에 있는 동료들이 모두 이 배우의 실제 모습을 잘 알고 있다는 조건이 하나 더해진다. 이때 배우는 완성될 영화를 위한, OK컷을 위한 연기를 하는 동시에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회적 나를 드러내야 한다. 그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진짜 나니까. 그런데 그러면서 은근 슬쩍 그 모든 연기가 걷힌 상태의 나, 누구인 척이 아닌, 사람들이 생각하는 내가 아닌 진짜 나를 꺼내기까지 한다. 카메라 앞에 서야 진짜 나를 드러낼 수 있다는 역설. 심리상담사로서의 카메라. 무엇이 진짜 진짜 나인지에 대한 비밀은 영화가 지켜준다. 나는 지금 언젠간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카메라 앞에 서면 비로소 진짜 나를 꺼낼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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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있을 행사를 생각하다 적은 글. 당일에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또 다른 척을 하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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