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2025년 영화 결산. 늦은 만큼 더 늦기 전에 이름 한 번 불러보고 싶은 영화들로 골라봤다. 딱히 순위가 있지는 않지만 또 아예 없지는 않을 거다.
씨네21에 제출한 개인 베스트5 영화들은 목록에서 제외했다. 그런데도 다시 한번 또 적은 영화는 <히어>, <쇼잉 업>,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이다. 세 편 모두 베스트 영화를 다섯 편으로 줄일 때 무조건 그 안에 포함시키겠다고 박아둔 영화들이었다. <히어>는 씨네21에 비평을 기고했고, <쇼잉 업>은 [최신 영화]에서 토크로 정리를 했지만,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에 대해선 뭔가 하지 못했다. 언젠가 다시 시작하고 싶다. 이미 그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호나스 트루에바가 앞으로도 꾸준히 다작을 해준다면 홍상수와 비교될 수 있을 중요한 영화감독이 되리라 생각한다. 작년에 제대로 다시 본 호나스 트루에바의 전작 <와서 직접 봐봐>를 보며 확신을 가졌다. 아쉬운 점 한 가지는 영화에서 책 읽는 장면이 너무 많다. 그걸 우리와 같이 읽게 된다는 것, 그 비포와 애프터의 시간이 함께 공유된다는 것, 그리고 또 그 내용이 영화를 구성하는 핵심 철학이지만 일단 자막(혹은 번역) 때문에 실시간으로 소화가 잘 안된다. 그가 가끔씩 다른 방법도 고려해 줬으면 좋겠다.
씨네21 베스트 리스트에 눈물을 머금고 제외한 영화들로 <마리아>,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 <내 말 좀 들어줘>가 있다. 이 중에 <마리아>는 올해 덜 주목받아 너무 아쉬운 <히어>보다 더 적게 언급된 작품인 것 같다..였는데 관객수 찾아보니 <마리아> 관객수가 만 명이나 더 들음. [최신 영화] 주제 영화로 선정하기도 했다. 파블로 라라인의 <재키>, <스펜서> 같은 전기 영화를 너무 사랑하지만 사실 전기 영화라는 형식 자체는 사랑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영화가 되어야만 할 때 반드시 필요한 장면 같은 것들이, 나도 예상되고 만드는 사람도 의무감으로 포함시키고 있다는 뉘앙스가 느껴질 때 그만 보고 싶어진다. 아니 사실 처음부터 그래서 안 보고 싶어진다. 그러나 라라인 영화는, 혹은 좋은 전기 영화는 그 전기를 가끔 같이 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관련하여 리들리 스콧의 <나폴레옹>(2023)의 오프닝을 좋아하는데 이것도 씨네21에 비평을 적었었다. <마리아> 또한 그 전기 속에 당시 살던 시민으로서 참여한다는 느낌이 든다. 당시 이 위인을 위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너무 늦게 마리아를 알아본 것에 대한 안타까움..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가 강력히 암시하는 것 또한 '너무 늦기 전에'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상황에서 시작된다. 이 영화엔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은 사람들의 표정이 담겨 있다. 똑같은 사건이 다른 시점에서 반복되지만, 이 표정만큼은 반복되지 않는다. 너무 늦은 것은 반복할 수 없다. 현실 또한 반복할 수 없다. <내 말 좀 들어줘>의 주인공 팬지는 그 사실을 뼛속까지 흡수한 사람 같다. 우리는 팬지가 한 번쯤은 마음을 열고 나이스한 리액션을 해주기를 바라지만 그는 변하지 않는다. 감동도 없고 반전도 없다. 제발 뭐라도 말해주고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끝난다. 아니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 어쩌면 <내 말 좀 들어줘>와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는 엔딩이 같다.
왜 자꾸 삶의 황혼기에 접어드는 사람의 이야기에 끌리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 청춘인데! <제이 켈리>를 보니까 작년에 아꼈던 영화인 <마에스트로 번스타인>(2023)이 떠올랐다. 후회하는 사람들한테 자꾸 마음이 쓰인다. 후회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들한테. 또 마음이 쓰이는 부류는 매니저다. 직업으로서의 매니저 말고 그 이상의, 패밀리보다 더 헌신적인 종교적 매니저라고 해야 되나. 내 모든 것을 버리면서까지 진심으로 타인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들과 관련한 영화는 판타지 같다. 간혹 배우자 또는 뮤즈 같은 존재가 그런 역할을 해냈다는 것으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곤 한다. 그것보단 봉급을 받는 매니저가 더 현실성도 있고 더 이야기로서 흥미진진하다. 배즈 루어먼 감독의 <엘비스>(2022)도 그런 영화여서 재밌었다.
마지막으로 다시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 이 부부의 진짜 진심이 알고 싶다. 이 '레전드 커플'은 서로가 잘 되기를 얼마나 진심으로 바랐던 커플이었을까. 이제 그만한다는 것도 또 다른 방법의 진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을 즐길 수 있는 이에게 주어지는 완전한 편집권"이라고 한 줄 평을 썼었다. 어제 본 흑백요리사2 마지막 대결의 주제는 '나를 위한 요리'였다. 최강록 요리사가 지켜보는 사람들 그 누구도 유추하지조차 못한 자신만 알고 있는 깨두부의 완성을 자기만 아는 타이밍에 끝낸 게 기억에 남는다. 2025년 봤던 영화의 끝을 생각한다. 영화의 끝을 생각한다.
<히어> <쇼잉 업>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
<마리아>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
<내 말 좀 들어줘>
<제이 켈리>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컴플리트 언노운>
<프랑켄슈타인>
<씨너스: 죄인들>
<머티리얼리스트>
<여행과 나날>
<시빌워>
<노스페라투>
<리얼 페인>
<슈퍼 해피 포에버>
<왼손잡이 소녀>
<엣 더 벤치>
<발코니의 여자들>
비개봉작
<인서트>
<그래도, 사랑해.>
<검은 소>
<광야시대>
<사무라이 타임슬리퍼>
그리고 12월 31일에 개봉한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는 내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