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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와 류승범. 알고 모름의 얄팍하고도 엄청난 차이

  몇 년 전, 약간은 지루하던 평일 저녁에 엄마가 하얀 스티로폼 박스를 들고 TV를 보던 내 앞으로 오셨다. 시장에서 너무 싸게 팔길래 먹고 싶어서 사오셨다는데, 물러지기 시작해서 한 박스를 지금 바로 다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이길래 한 박스를 있는 자리에서 다 먹어야 하나 의문을 가진채 뚜껑을 열자, 전혀 익숙하지 않은 과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무화과였다.


 나는 먹기도 전에 '나는 안 먹을래. 안 좋아해 '라는 말부터 뱉어 버렸다. 말린 무화과를 먹었을 때의 그 딱딱함과 오돌 으슥 씹히는 씨앗의 식감이 마치 해감이 덜 된  조개의 모래를 씹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라즈베리보다 그냥 블루베리가 더 좋은 이유와도 비슷하다)


하지만 어머니들 특유의 절대 이길 수 없는 ‘초강력 권유'를 뿌리칠 재간은 내게 없었고 결국 고기쌈 싸 주듯 입에 넣어주시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닫혀있던 입을 벌리고 무화과를 허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내가 알고 있던 그 무화과가 아닌 것이다. 입 안에서 부드럽게 으스러지며 꿀을 머금은 과육이 촤악 퍼지는데 그 달콤함에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이게 도대체 뭐지?


생각해보니 나는 말린 무화과가 아닌 생 무화과는 먹어본 적이 없었고, '말린 무화과'라는 얄팍한 경험으로 마치 내가 그것에 대해 모두 알고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앉은자리에서 엄마와 함께 무화과 한 박스를 모두 허겁지겁 흡입하고 나서, 나의 아직까지 고쳐지지 않은 ‘선입견’이라는 적과 그걸 깨닫게 해 준 류승범이란 배우가 떠올랐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 나는 류승범이라는 배우를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싫어하는' 쪽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착하고 성실하고 겸손하게 생긴 이상형과 거리가 아주 멀기도 했고, 머릿속에는 '류승범=쌍꺼풀 없는 생 양아치'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있었다. 뭐, 그건 그렇게 인생에서 크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고 연예인에 목숨을 걸 일도 없었으니 그냥 나의 뇌 한구석의 '그런가 보다 방’ 한편에 명제 정도로만 조용히 남아있었다.


그렇게 대학생이 된 어느 날, 오전 수업이 없던 평일에 갑자기 혼자 영화를 보고 싶어 그 당시 상영관에서 제일 괜찮아 보이는 <용의자 X>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책 자체도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던 터라,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도 굉장히 기대가 되었는데 한 가지 마음에 걸렸던 것이 류승범이 주인공이라는 것이었다. 히키코모리 같은 수학자 캐릭터를 가볍게 표현할 요량인가?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 나는 엄청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내가 알던 양아치 류승범이 맞나? 어떻게 이런 가슴 절절하고 숫기 없는 연기까지 가능하단 말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그의 필모그라피를 되짚어보니, 충격적 이게도 나는 류승범이 나온 작품을 단 한 편도 본 적이 없었다. 단 한 편도 말이다. 아마 '류승범=양아치'라는 공식은 매스컴에서 보여진 짧은 영상, 찰나의 장면, 누군가의 한 줄 평, 가십성 대화 등이 조합되어 생겨났던 것 같다.


<용의자 X>  2012, 방은진 감독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작지만 더없이 강력했던 '선입견에 의한 판단'에 소름이 끼쳤다. 나는 남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건만 그것조차 굉장한 오만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일을 계기로 나는 류승범이 나온 작품은 모두 찾아서 보게 되었고 (그중 2002년 노희경 작가의 비운의 명작 <고독>이라는 드라마를 제일 좋아하는데, 언젠가 이 곳에서 다룰 수 있으면 좋겠다), 그가 양아치라고 단정 짓게 된 부분들이 실은 인생 밑바닥을 사는 자의 악에 받침, 사람을 대하는 능글맞음, 현실에 있을 것 같은 인간미 있는 심도 있는 연기들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류승범과 무화과라는 공통점이 없는 두 사건을 계기로 어떤 말을 하는 데에 있어 '내가 이거 알아!' 또는 '아니야 그건 아닌데?'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정말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 맞는가? 안다고 하면 어느 정도 아는 것인가? 안다는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들을 하면서 말이다. 내가 아는 것도 사실은 아는 게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겐 생 무화과도 꺼끌꺼끌 씨가 씹히는 싫은 과일로 표현 될 수 있고, 류승범이 실제로 양아치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을지 누가 안단 말인가.


다만 나는 삶을 살아가는 자세에 있어서 어떤 상황을 단정하고, 누군가를 단죄하고, 맹목적으로 좁은 시야로 무엇인가를 판단하지 않기 위해 무화과와 류승범을 떠올린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무화과와 류승범을 매우 좋아한다. 그리고 그것들에 감사하다. 벼도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고 하는데, 나는 과일과 사람으로 인해 고개를 숙일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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