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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해서 쓰는 글

나는 지금 잔뜩 술에 취했다.


핸드폰을 윙크하고 봐야 할 정도로 취하진 않았지만, 이성적인 판단을 잃고 치킨을 주문했으며,

우당탕탕 몸을 씻고 옷과 가방은 아무렇게나 벗어

재낀 채 누워서 위장에서부터 비롯된 깊은 알코올 향기를 맡으며 글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발행 버튼을 누르고나면 평소에 하던 오탈자 체크도 하지 않고 글 저장도 하지 않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 지금의 순간, 껍질 없는 날것의 기록.


대학교 서양화 수업 시간에 나의 이목을 끌던 친구가 있었다. 수줍고 여리한 모습으로, 모두가 경계하고 평가질을 하는 크리틱 시간에 무방비의 순수함으로 앞에 나온 그녀였다.


그녀의 유화 그림은 참 평범하고도 나의 일상과 맞닿아 있었는데, 주제가 ‘술에 취한 자신의 모습으로 본 신촌의 거리-습작들’이었다. 물감들은 거칠고 경계가 없는 터치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녀가 얼마큼 취한 상태로의 시선을 표현했는지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참 얌전하게 생긴 얼굴에

그렇지 못한 시선이랄까? 그녀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그 적나라함이 좋았다. 솔직함. 투명한 시선.


나는 지금 그런 글을 쓸 수는 없겠지

그래도 2020년 7월 31일 금요일, 술에 취한 김에 떠올린 그녀에 대한 회상은 참 값지다는 생각을 한다.


누가 술을 옳지 않다고 하는가?


중국에는 취한 듯 비틀거리며 상대의 정곡을 찌르는 ‘취권’도 있고, 대학시절 가슴 아리며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전람회의 ‘취중진담’ 이라는 노래도 있는데, 술 취해서 쓰는 글을 주사라고 치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시원하게 다 글로 싸질러 버렸으니

이제 육체는 뻔질나게 뻗으러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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