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저널리즘 "셀프 부고 쓰는 사람들" 기사를 보고
중학교 때 늦은 밤 죽음에 대한 생각에 짓눌려 이불을 발로 걷어찼다. 가끔은 망각했다. 하지만, 죽음이 엄습한 순간들을 마주할 때마다 죽음은 다시 늦은 밤 찾아왔다.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이 충족돼 가장 여유롭고 행복할 때 불현듯 찾아오기도 했다. 죽는다는 사실이 감은 눈 위로 떠오를 때, 더 이상 그 누구와도 상호작용할 수 없다는 영원한 고독 같이 느껴져서 청승맞게 혼자 운 적도 있다.
우연히 한 영상을 봤다. 70살까지 산다고 했을 때 남은 주의 수가 2300여 주라고 한다. 상태 메시지를 "2300"으로 바꿨다. 1주가 지날 때마다 숫자 1을 차감했다. 수치로 환산하니 꽤 많아 보였다. 교통사고의 위협부터 알 수 없는 변수들이 거리를 지배하는 현대사회. 내일이라도 비명횡사할 수 있다고 생각해 사실 마음속 상태 메시지는 항상 "1"이었다.
죽는다는 사실은 나의 존재를 우주 속의 먼지로서 시각화할 수 있게 돕는다. 폭력과 고통의 기억 속에서 나의 마음을 괴롭히는 권력자 역시 결국 '죽는' 존재다. 그 역시 수많은 먼지들 중 나라는 먼지 바로 옆 또 다른 먼지일 뿐이다. 내가 죽는다는 사실이 이 현실을 또렷이 보여준다. 내 머릿속 우주 속에서, 주변인들의 동조와 카리스마에 둘러싸여 있던 거인이 나와 같은 운명을 받아 안은 1mm도 안 되는 먼지로 작아진다.
죽음은 규범과 구조에 둘러싸여 직시하지 못하던 본질을 보게 해 준다. 어차피 죽는다면, 남들이 뭐라 하던 진실된 나로 살다 죽어야 하지 않겠나. 내일 죽는다면 까짓것 지금 내 목소리 내지 못할 거 뭐 있냐.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보여도 옆의 사람 손 잡아주지 못할 이유 뭐 있냐. 용기를 준다.
죽는다는 사실이 진실된 상호작용을 가능케 한다. 내일이 없다면 눈앞의 이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자칫 지루하게 들릴 수 있는 상대의 말에서 그라는 존재의 궤적과 입체성을 들여다보도록 한다. 뻔하고 익숙할 법한 만남에 숭고미를 부여해준다. 진심을 유보하고 유예하지 않게 한다.
죽음은 아마 잠에 빠져드는 것 같을 거다. 여느 때처럼 잠에 빠져 들지만, 내일이 없다. 잘 사는 것만큼이나 잘 죽는 것이 중요하다는 한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죽음을 잘 대비하는 사회가 껍데기보다는 본질에 더 가까워지리라 믿는다. 지배-피지배의 규칙을 따르기보다는 다 같은 먼지들로서 서로의 손을 맞잡아주는 사회가 되길. 죽음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