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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건우 Jul 22. 2020

죽음을 대비하는 사회

북저널리즘 "셀프 부고 쓰는 사람들" 기사를 보고

중학교  늦은  죽음에 대한 생각에 짓눌려 이불을 발로 걷어찼다. 가끔은 망각했다. 하지만, 죽음이 엄습한 순간들을 마주할 때마다 죽음은 다시 늦은 밤 찾아왔다.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이 충족돼 가장 여유롭고 행복할  불현듯 찾아오기도 했다. 죽는다는 사실이 감은  위로 떠오를 , 더 이상  누구와도 상호작용할  없다는 영원한 고독 같이 느껴져서 청승맞게 혼자  적도 있다.
우연히  영상을 봤다. 70살까지 산다고 했을  남은 주의 수가 2300 주라고 한다. 상태 메시지를 "2300"으로 바꿨다. 1주가 지날 때마다 숫자 1 차감했다. 수치로 환산하니  많아 보였다. 교통사고의 위협부터   없는 변수들이 거리를 지배하는 현대사회. 내일이라도 비명횡사할  있다고 생각해 사실 마음속 상태 메시지는 항상 "1"이었다.
죽는다는 사실은 나의 존재를 우주 속의 먼지로서 시각화할  있게 돕는다. 폭력과 고통의 기억 속에서 나의 마음을 괴롭히는 권력자 역시 결국 '죽는' 존재다.  역시 수많은 먼지들  나라는 먼지 바로  또 다른 먼지일 뿐이다. 내가 죽는다는 사실이  현실을 또렷이 보여준다.  머릿속 우주 속에서, 주변인들의 동조와 카리스마에 둘러싸여 있던 거인이 나와 같은 운명을 받아 안은 1mm 안 되는 먼지로 작아진다.
죽음은 규범과 구조에 둘러싸여 직시하지 못하던 본질을 보게 해 준다. 어차피 죽는다면, 남들이 뭐라 하던 진실된 나로 살다 죽어야 하지 않겠나. 내일 죽는다면 까짓것 지금  목소리 내지 못할   있냐.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보여도 옆의 사람  잡아주지 못할 이유  있냐. 용기를 준다.
죽는다는 사실이 진실된 상호작용을 가능케 한다. 내일이 없다면 눈앞의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자칫 지루하게 들릴  있는 상대의 말에서 그라는 존재의 궤적과 입체성을 들여다보도록 한다. 뻔하고 익숙할 법한 만남에 숭고미를 부여해준다. 진심을 유보하고 유예하지 않게 한다.
죽음은 아마 잠에 빠져드는  같을 거다. 여느 때처럼 잠에 빠져 들지만, 내일이 없다.  사는 것만큼이나  죽는 것이 중요하다는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죽음을  대비하는 사회가 껍데기보다는 본질에  가까워지리라 믿는다. 지배-피지배의 규칙을 따르기보다는  같은 먼지들로서 서로의 손을 맞잡아주는 사회가 되길. 죽음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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