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가에서 우연히 발견한 볼품없는 나무 가면. 가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힘에 얼굴을 갖다 댄 주인공은 초능력을 가진 슈퍼히어로로 변한다. 영화 <마스크>. 내가 어렸을 적 수차례 돌려 본 영화다. 비디오 대여점에서 연체비를 두 번 넘게 내야 했을 정도다. 주인공 스탠리는 항상 풀이 죽어있는 은행원이다. 가면을 쓰면 폭풍우가 치고 얼굴이 변한다. 재미없던 스탠리가 유쾌하기 그지없는 로맨티시스트가 된다. 주연을 맡은 짐 캐리를 사랑해서기도 했지만, 마스크가 사용자의 은밀한 욕망을 이끌어내 극대화한다는 설정이 볼 때마다 쾌감을 안겨 줬다.
가면은 정체를 숨겨주는 동시에 다른 정체성을 부여한다. 중국의 전통극 '변검'은 배우가 눈 깜작할 새에 얼굴에 붙어 있는 가면을 연속해서 바꾸는 퍼포먼스로 유명하다. 부채가 얼굴 앞을 스칠 때마다 왕비였다, 무사였다, 사자가 된다. 몇 초 만에 정체성을 이리저리 넘나드는 이 퍼포먼스를 사람들이 흠모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일상 속 고정된 페르소나로부터 해방되고 싶다는 욕구일 테다. 인생은 연극이라는 셰익스피어의 말은 비유보다는 사실 묘사에 가깝다. 우리는 사회나 공동체 속에서 규범과 의례, 연속되는 규칙 속에서 일종의 연기를 펼친다. 어떤 순간과 장소에서 무슨 가면을 쓰고 있냐에 따라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거라는 기대를 받는다. 이 기대를 배반하는 행위는 눈살 찌푸리기부터, '네 가면에 맞게 행동해'라는 폭력적인 압박으로까지 이어진다.
은행 창구 직원과 같은 일명 '서비스직' 노동자가 상시 수행해야 하는 역할 놀이가 있다. 감정노동이다. '안녕하세요' 한마디에도 미소를 얹어야 한다. 손'님'들은 "퇴근하고 나랑 시간 보내자"고 성희롱하기, 초장부터 반말하기, 지체되면 욕설하기, 돈 내야 하는 거 '절대 안 낸다'고 떼쓰기 등을 쏟아낸다. 서비스 영역 외부의 부탁들이 쇄도한다. 거절하면 '어린놈의 스키가'부터 외친다. 종로에서 뺨 맞고 꼬투리 잡을 게 없나 먹잇감을 노리는 이들까지 있다. 이런 손'놈'들의 공격에 찰나라도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가는 신성한 '고객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민원에 올랐다가는 실적에 목매는 팀장에게 곤죽이 될 때까지 깨지기 일수다. 감봉, 휴가 취소 등등 불이익이 눈에 훤하다. 속으로는 어금니 꽉 깨물더라도 겉으로는 방긋 웃으며 안간힘 써야 했던 게 은행 창구 직원들이다.
그런데 영화 <마스크>가 스탠리에게 찾아왔듯, 코로나 시대의 일회용 마스크가 현실의 은행원들에게 찾아왔다. 스탠리에게 <마스크>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들에게 해방감을 안겨주고 있다. 코로나 시대, 고객 응대 시 마스크 착용이 필수. 목소리 톤은 여전히 하이 플랫이어야 할지언정, 표정만은 썩소를 짓든 무표정을 짓든 씨씨티비조차 알 도리가 없다. 스탠리는 마스크가 준 초능력으로 자기가 다니던 은행을 털어버렸다. 그만큼의 쾌감은 아닐지라도, 손'놈'들을 마주하는 현실세계의 은행원들이 마스크 뒤에서 느끼는 해방감이 알 만하다.
가끔 가면에 금이 가 한숨이라도 튀어나올라치면 여기다 대고 악다구니를 퍼붓는 이들이 있다. 자신은 완벽하게 가면 잘 쓰고 있는데 너는 왜 못 그러냐는 거다. 맛집 리뷰들을 보고 있자면 별점 1점인 리뷰들은 죄다 이유가 '불친절'이다. '알바 표정 때문에 입맛이 상했다'거나 '말투가 그따구니 사람들이 안 오지', 소리를 질러댄다. 이런 리뷰들을 보고 있자면 사람들이 우리 모두가 가면극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끔, 아니 너무 자주 잊어버린다는 생각이 든다. 역할 놀이하고 있는 상대방도 인간이다. 인생의 짠맛, 쓴맛, 매운맛을 매일같이 치열하게 견디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인생이라는 가면극 동안 서로에게 조금만 더 관용을 가져볼 수는 없을까? 물리적으로는 또 다른 가면에 가까운 일회용 마스크가 오히려 각박한 역할놀이와 감정노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고 있다는 아이러니함. 이 모순을 해소하려면 마스크를 잠시 내려놓고 숨통을 틀 수 있도록, 서로 조금씩 틈을 마련해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