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성경 누가복음 16장 19절에서 28절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기독교의 종말론은 성경이 계시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속한다.
비단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종말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왜냐하면 모든 살아있는 것에는 반드시 끝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알고 있다. 또 지구 역시 하나의 행성이기에 다른 별처럼 언젠가 없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때때로 각종 사이비 시한부 종말론이 횡횡해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를 보게 된다. 따라서 종말에 대한 바른 성경적 신앙을 확고히 해야 한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크게 두 부분, 곧 개인적 종말과 우주적 종말로 나눈다. 개인적 종말이란 죽음과 사후세계에 관한 것이고, 우주적 종말은 대 우주의 파국과 새 하늘, 새 땅에 관한 것이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는 죽은 후에 각기 다른 세계로 인도된다. 나사로는 천사들에게 이끌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부자는 음부에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다.
왜 두 사람의 운명이 그렇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명확한 언질을 주고 있지 않지만, 성경 전체의 진리를 보자면 나사로는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를 믿었고, 부자는 그렇지 않았다.
이처럼 성경은 죽음 후의 세계, 곧 사후세계를 명시적으로 말씀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죽음 이후에는 믿고 싶어도 기회가 없다는 것이며, 천국과 지옥은 왕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현 세계로 오고 갈 수도 없다는 점이다.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은 오로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종교와 문화에 사후세계에 대한 기억이 존재한다. 우리 민족은 이를 저승이라고 했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하데스’라고 불렀다.
또한 많은 임사 체험자들, 곧 죽음과 소생을 경험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죽음 후에 어떤 세계에 다녀왔다고 증언한다. 물론 우리는 과학이 증명하기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지식이다.
사후세계는 믿음의 영역이다. 성경이 이를 계시하고 있기에 우리는 그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의지해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믿는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지나친 호기심을 가지고 상상의 나래를 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천국과 지옥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삼가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천국은 신자들이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곳이며(고후 5:8), 지옥은 악인들이 최후의 심판을 받는 곳이라는 것은 분명하다(계14:11).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구체적인 묘사가 부족하고 사람들의 호기심은 크다 보니 자연히 각종 상상력이 동원된다.
천국에 가서 기와집을 보고 왔다는 둥 지옥에 갔더니 커다란 뱀이 계속 깨물고 있다는 등...... 이러한 이야기는 모두 불교에서 온 것들이다.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한에서 믿을 뿐이며 그 이상의 호기심과 상상력은 자칫 이단을 부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