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에서 데자뷰로 보일, 2018년 4월 옐마노 패션칼럼(17)
이번 글에서는 영어권에서 범 백 혹은 패니 팩으로 불리는 작은 가방에 대해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언뜻 뭔지 모르시겠다는 분이 계시겠지만,
‘패션에서 어려운 것은 없다, 새로운 것이 있을 뿐이다.’
라는 말이 있듯 (사실 제가 지금 막 만든 말 입니다.)
한국말로는 ‘허리쌕’ 이라고 하면 바로 그림이 그려지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한국에서도 80년대 후반 나름 유행을 했었고, 이제는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나 나올 법한 아이템이지요. 그것이 셀럽과 디자이너들의 재해석을 통해 다시 슬쩍 돌아왔습니다. 패션계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잠언이 있지요.
‘유행은 돌고 돈다.’
그러나 흐르는 강물을 두 번 밟을 수 없듯, 이 작은 가방조차 그 때 그 모습으로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즉, 80, 90년대의 그것 그대로 메고 나가면 ‘패션 테러리스트’ 소리를 듣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대체 무슨 이야기 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미묘하고 주관적인 이야기를 꺼내어 보려고 합니다.
범 백(Bum bag) 또는 패니 팩(Fanny Pack), 왜 실물은 하나인데 영어 단어는 두 개 일까?
패니(Fanny) 는 미국식 영어로 엉덩이를 뜻하고, 팩(Pack)은 주머니, 배낭이라는 뜻입니다.
즉, 엉덩이에 걸쳐 매는 가방이라는 뜻이지요. 양손은 물론 어깨와 등 마저 자유롭다는 실용적인 특징때문에 여행자들 그리고 거리의 상인들이 애용했던 고전적인 아이템입니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이런 백을 Bum bag 이라고 합니다. ‘fanny’ 라는 영국의 영어 단어가 갖는 특수성 때문이지요. 슬랭이기는 하지만, 영국에서 fanny가 지칭하는 인체의 부위가 미국에서 쓰는 fanny와 다릅니다. Bum이 ‘엉덩이’ 라는, 인간이면 남녀 공통적으로 가진 공통의 신체 기관인 반면 영국에서 fanny는 여성만의 고유한 신체기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국 영어에서 bum 은 butt 에서 보이는 형태적 유사성에서 보이듯, 엉덩이를 뜻하기 때문에 bum bag 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현재까지 패션지 에디터 마다 제각기 편한 대로 쓰는 상황이라, 명확히 하나로 정해진 바는 없습니다. 스스로 판단컨대, 발음의 편의성, 친근성과 의미의 명확성이라는 측면에서 ‘범 백’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확신하기에, 이하 (띄어쓰기 없는) ‘범백’으로 칭하겠습니다.
*참고로 이탈리아어로 이런 류의 가방은 marsupio 라고 합니다. 어휘의 보고 라틴어 marsupium 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의 말은 또한 ‘작은 가방’ 이라는 뜻의 고대그리스어 marsypion (marsypos 의 왜소형)에서 온 것입니다.
웬만한 것은 합성어가 아닌 고대 단일어원에서 끌어와서 쓸 수 있는 풍부한 어휘를 가지고 있는 풍성한 언어가 바로 이탈리아어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탈리아, 프랑스 등 패션 강국이 가진 문화적 이점과 언어의 관계, 이들의 어휘가 가진 특성이 패션 그리고 디자인, 창의성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가 제가 요사이 호기심을 가지고 들여다보고 있는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유행은 어떻게 다시 돌아올까?
언제나 패션은 시대마다 다시 재해석되어 태어나고 그 때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명망있는 디자이너들과 셀럽이라고 칭해지는 감각있는 유명인들입니다. 이들을 통칭해 일단 패션 인플루언서(influencer)라고 하겠습니다.
시대를 이끌었던 아이템의 기원을 따져 보면 대부분이 이 인플루언서들이 그것들의 첫 길목에 도도히 존재하고 있던 경우가 많습니다. 범백의 경우도 예외는 아닙니다.
인스타그램 4천만명 팔로워에 빛나는 미국의 황금수저 패션모델 켄달 제너(Kendall Jenner)가 그 주인공입니다. 그 모습들을 좀 살펴볼까요?
그녀의 범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보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기본적으로 여러가지가 받쳐주는(?) 그녀의 신체 비례와 정련된 페이스 후광효과 때문에 무조건 스타일리시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켄달 제너라도 아쉬운 안습의 범백 아웃핏이 보입니다.
사실 제 눈에 이 멋지게 보이는 범백 착장은 오른쪽 사진들로 정렬했고 왼쪽의 라인의 사진들은 좀 아쉬운 수준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럼 제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물론 저의 기준이기 때문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들도 있으실 것 입니다. (이것은 사실 패션계 종사자들이 자주 겪는 ‘나의 주관’이 어떻게 ‘타인의 객관’으로 확장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 문제와 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소 파격적으로, 제가 굳이 언어로서 ‘기준을 정리하기’ 보다는 제가 생각하는 ‘지금은 맞고(O), 그때는 틀리다. (X)’의 이미지를 비교해 ‘보여드리는 것’으로 제 느낌의 기준을 전달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범백에 대한 느낌적인 느낌(?)이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글 역시 지면이 제약이 있는 관계로,
제가 생각한 시크하고 멋진 범백 아웃핏에 대한 언어적인 정리와 디자인적 측면에서의 논의,
더불어 정형적이고 고리타분한 격식을 벗어나려는 사회적인 유행이론에 근거한 범백 유행에 관한 저의 해석은 다음 글에서 한꺼번에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범백 같은 가벼운 힙쌕 하나 어깨에 둘러 메시고, 벚꽃놀이 잘 다녀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