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과학을 멀리하려는 나의 구차한 입장에 관하여
이 글은 '당신을 위해 준비된 요즘것들 트렌드 뉴스레터, 주간 김정현'에도 실렸습니다.
나는 유사과학을 싫어한다. 민주주의는 경멸과 혐오를 금기시하지만, 내가 대놓고 경멸하고 혐오하는 유일한 것이 유사과학이다.
유사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인 것처럼 보이지만 과학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이란 무엇인가? 어떤 현상을 재현하여 사실 검증을 가능케하는 절차와 방법적 지식이다.
그렇다면 MBTI는 과학인가 유사과학인가? 당연히 유사과학이다.
그래서 나는 "정현님 MBTI가 뭐예여?"라는 질문을 들으면 미소를 짓지만, 사실 온몸에는 소름이 돋고 등 뒤에서는 식은땀이 흐른다.
가까운 사람들 중에 나에게 그 질문을 했던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그 순간에 당신을 도쟁이로 바라보고 혐오하고 있었다.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랬으니까, 굳이 변명을 하자면 당신을 혐오한 건 아니고 유사과학을 혐오한 것이다.
MBTI가 왜 유사과학인가? 그것은 DRM-VI 그리고 빅5와 더불어 심리학은 물론 임상에서도 널리 활용되는 과학적 도구가 아닌가?
어떤 지식이 널리 쓰인다고 해서 그것을 과학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 사주는 어느 때보다도 널리 쓰이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과학인가? 철학관에서도 그런 주장은 안 한다.
내가 보기에, 과학은 1. 재현가능 2. 검증가능 3.절차와 방법이라는 필요조건을 갖춘 지식이다.
유사과학은 세 가지 중 하나만 갖췄거나, 둘만 갖춘 것이다. 그래서 외관을 보면 과학 비스무레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사기인 것을 유사과학이라고 한다.
MBTI를 보자. MBTI가 갖는 유사과학적 외관은 3번, 절차와 방법 뿐이다. 그것은 수백 개의 설문과, 응답 결과에 따른 평가척도를 갖고 있다. 어떤 순서와 방법으로 진행해야 하는지 가이드라인이 제시된다.
나머지 두 가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1. 재현가능성이다. 나는 정식 MBTI를 2번 해봤고, 인터넷으로 도는 간편버전은 수십번도 더 해봤다. 그리고 결과는 매번 달랐다. 한마디로 재현가능하지가 않다.
물론 나는 기분이 좋아서, 유사과학에 좀 관대해질 수 있을 때에는 "상태가 좋을때는 E인데 피곤할 때는 I 되고 그래요 호호" 같은 말도 한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하는 순간조차도, 컨디션보다는 어떤 시기에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에 따라 적절히 대처하는 능력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2. 검증가능성이다. MBTI 검사도구로 내가 XYZK라는 성향을 가졌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하자. 그 결과가 맞다는 것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가?
예를 들어 내가 외향성인지 내향성인지 확인하기 위해 나를 스몰토크 파티에 1000번 참석시키고 내가 몇 명과 대화를 나누었는지 세보아야 할까?
MBTI 결과는 낯선 사이, 친해지고 싶은 상대와 나누기 좋은 주제다. 그러니 사실 혐오할 것까지는 없을지 모른다. 가끔 내가 유사과학에 짜증을 내더라도, 당신에 대해 유감을 갖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가 유사과학에 알러지를 일으키는 이유는 그와 같은 가짜지식이 인류를 어떻게 타락시켰는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을 빙자한 종교인, 인종학살을 일삼았던 정치인, 거짓된 연구결과로 돈과 명성을 누린 게으른 과학자. 이들은 모두 유사과학, 즉 가짜지식을 가지고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이미 MBTI 결과를 가지고 채용과정에서 차별하는 기업들이 있다는 뉴스가 몇 번이나 나왔다. 이 경우 우리가 동정해야 하는 것은 채용과정에서 손해를 본 지원자들일까, 아니면 유사과학을 경영에 활용한 인사담당자들일까?
나는 유사과학을 혐오한다. 그러나 나의 혐오는 존엄 자체를 위협하는 반민주주의적 발상으로서의 혐오가 아니다.
나는 자기 자신의 멍청함 때문에 다른 사람을 차별해도 괜찮다는 망상보다는, 다른 사람과 사회에 대해서는 사실과 주장을 구분할 줄 아는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바란다.
MBTI 측정 결과는 '그 순간에 내가 그렇게 답하고 싶었을 뿐'이라는 마음이 반영된 것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임상에서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도 유감이 없다.
그들은 MBTI 측정결과가 피험자의 심리를 들여다보는 수많은 판단지표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MBTI 결과는, 다른 수많은 관찰된 지식과 결합할 때 간신히 근거로 삼을 수 있을 뿐이다.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하고, 일제가 조센징을 차별한 것은 일상에서 기능하는 '당연한 듯한 담론' 덕분이었다.
가까운 사람 간에 농담거리로 삼기는 좋겠지만, MBTI가 스몰토크 주제를 넘지는 않았으면 한다. 그것은 당연한 것도, 그 자체로는 엄밀한 지식도 아닌 '유사과학'에 불과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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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요. 장담한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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