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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현 Aug 19. 2023

나의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착각

교육은 어떻게 미시적 성공을 정당화하고 고착화하는가

입학사정관제는 유대인을 뽑지 않으려고 만들어졌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골치아픈 문제를 겪고 있었다. 그 문제란 바로 학생들 중 유대인이 너무 많았다는 점이다. 당시의 선발 기준은 정직했다. 바로 성적이었다.


모든 유대인들이 똑똑한 것은 아니지만, 똑똑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유대인이 많았다. 유대인들이 수천 년에 걸친 디아스포라로 중동, 유럽, 북아프리카로 흩어진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금융업에 종사는 그들의 생존방식 중 하나였다. 어디서든 외부자 취급을 받으며 차별 속에서 살았던 유대인 입장에서는, 어디서든 차별없이 통용되는 돈과 지식을 축적하는 것을 내부적으로 보상하는 문화(특히 유대교 전통)는 가족과 민족집단을 보호하는 훌륭한 장치였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학습을 중시하는 종교적 관습을 일상적으로 오래 유지해왔다. 많은 유대인 아이들은 다른 문화적 배경의 또래들보다 학업성취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해진다. @Shutters


그리고 이 장치 덕분에, 금융업이 단기간 안에 특히 빠르게 성숙한 미국에서 유대인은 미국이 슈퍼파워로 떠오르기 전엔 19세기부터 이미 중요한 집단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1927년 유대인은 미국 인구의 3% 정도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무렵 미국 동부 대학들의 유대인 비율은 10%(하버드)에서 15%(존스홉킨스, 펜실베니아 대학) 정도였다. 뉴욕 시립대는 80% 가량이 유대인이었다. 


100년도 전인데다가, 양극화가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회문제였던 미국에서 물론 대학교육은 소수 엘리트들의 전유물이었다. 누가 대학을 다니느냐는 미국 국민들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다만 대학 당국과 주류 백인들의 우려사안이기는 했다.


그 결과로 미국 대학들은 학업성적 이외의 자질을 평가 요소에 넣기 시작했다. 그 평가 요소는 '독립심', '신체능력', '용기' 같은 어휘로 표현되었고 구체적으로는 교과외 활동기록을 학업성적과 함께 제출하고, 면접을 통해 그러한 '자질'을 검증하는 평가방식으로 나타났다.


한마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입학사정관 제도가 이 시기에 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제도를 적용한 대학의 유대인 지원자가 크게 감소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여전히 유대인 입학자들의 비율은 크게 낮아지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새로운 선발제도의 혜택을 본 주류 백인 남성들의 비중이 높아졌다는 것 정도다.



입학사정관제의 포용적 효과


이 제도는 미국에서 다양한 인종을 포용하는 정책과 맞물려 활용된다. 숫적으로는 다른 소수자보다는 큰 집단이지만 사회적으로 열악한 지위에 있는 여성과 흑인은 물론이고, 다양한 인종과 사회 집단 출신의 '능력있는' 젊은이들을 선발하는 준거로 지금까지도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2020년 하버드의 입학생 인종 구성. 다양한 인종 출신의 학생들로 구성되며, 미국의 데모그래피를 고려하면 아시아계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Harvard Crimson


1차대전과 2차대전을 거쳐 막대한 부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패권국가가 된 미국에서, 이러한 주요 대학 출신을 졸업한 청년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엘리트 집단을 형성한다. 이들 집단은 개인적으로 그리고 사회적 수준에서도 다양성이라는 사회적 명분을 등에 업고 능력주의(meritocracy)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실제로 미국 주요 대학에서, 이른바 '백인 남성'의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그 외의 인종 비율은 미국 인구의 평균적인 구성보다 높은 편이며, 새삼스럽게 지적할 필요도 없이 남녀 비중은 흡사하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상대적으로 불리한 환경에서도 다방면의 재능과 특성을 가진 학생들이 입학하여, 학업을 마친 후에는 그 능력에 대한 보상으로 높은 임금의 일자리 혹은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커리어 기회가 주어진다.



포용적 능력주의가 드러내지 못하는 것


능력주의는 정의로운 것처럼 들린다. (그런 측면이 있지만 나는 능력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능력주의는 자칫하면 바로 사회 계층과 양극화 문제를 도외시하게 만든다. 쉽게 말해서 "가난한 사람들은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라는 '성공한 이들의 정당한 비난'이 정치적인 힘을 얻게 된다.


미국식 포용적 능력주의는 정치적으로도 무결하고, 사회 정의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특정한 사회의 엘리트 교육은 그 사회가 그동안 이룩해온 문화적 자산과 부(wealth)에 기반한 일종의 사치재다. 그리고 그러한 자산과 부는 평범한 사람들의 눈먼 노동에 근거하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와 국가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근로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눈먼 노동'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들 대부분은 삶의 경로를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부모님들만 보아도 그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불행하다거나 수동적인 존재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주어진 환경과 조건을 뛰어넘어 완전히 다른 경로를 선택할 수 있는 생애사적 기회가 흔치 않다는 뜻이다. 미국의 아이비리그에, 혹은 우리나라의 좋은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은 그것을 온전한 '자기 노력'만으로 얻어낸 것인가? 


그렇다고 대답할 학생들은 있을지 몰라도, 그 학생들의 부모와 보호자는 자신들이 아이를 위해 기울인 노력을 되짚어보게 될 것이다. 



기회의 평등만으로 좋은 사회를 보장하기 어렵다


미국은 인종적 분열이 경제적인 양극화보다 더 심각한 문제라고 여긴다. 엘리트들의 정치적 기반이 다양한 집단들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종문제를 한꺼풀 들춰보면 사실 그것은 고질적인 사회경제적 격차, 즉 양극화 문제와 밀접하다.


한 예로 범죄 가해/피해 데이터를 들 수 있다. 2020년 기준 미국에서 강력범죄 가해자의 약 60%가 백인, 40%가 흑인이다. 피해자는 백인이 65%, 흑인이 33%다. 이 데이터만으로는 무엇이 문제인지 알기가 어렵다. 여기에 인구구성을 대입하면 명백한 차이가 나타난다.


2020년 미국의 인종 분포를 백인은 57%, 흑인은 12.4%다. 범죄 가해/피해자 데이터와 비교했을 때 백인에 비해 흑인은 범죄에 연루될 가능성이 가해자 기준으로는 3배, 피해자 기준으로는 2.5배에 달한다. 


미국은 다양한 형태로 소수자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그 중 능력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적극적인 지원을 제공한다. 입학사정관제를 통해, 소수자 집단에게 인구 구성을 고려하면 확률적으로 더 높은 입학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그 중 한 사례다.


미국사회는 '다양성 보장'을 타협할 수 없는 가치로 여긴다. 그만큼 분열이 심각하다는 뜻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계층 문제는 상대적으로 덜 의제화된다. @Getty Images


그러나 능력있는 사람들이 보상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기조로, 그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차별과 격차 문제를 능력과 무관하게 직접적으로 해소하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미국 사회의 여러 갈등은 쉽게 해결되기 어렵다고 본다. 범죄연루율(피해/가해자 비율) 문제는 흑인들이 상대적으로 경찰력을 덜 제공받고 있을 가능성과, 다른 인종 집단에 비해 사회경제적으로 범죄에 연루될 가능성이 높은 환경에 처해있음을 암시한다.


특히 '능력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누리는 보상에 대해서 당연한 것, 혹은 타협할 수 없는 정당한 것이라고 여기는 문화는 이런 문제를 눈가림하고 결과적으로 악화시키는 요인이 된다.



언제든 공부하고 노력할 수 있는 기회


우리니라도 다른 상황이 아니라고 본다. 교육 제도와 교육을 통한 사회적 기회를 분배하는 문제에서, 특히 개인들이 그 경과를 따져보지 않고 '능력 그 자체'에만 근거해서 자신의 생존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풍조가 당연시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교육은 엘리트들이 '능력'을 명분으로 지위를 세습하고, 결과적으로 이미 존재해온 사회적 갈등 역시 격화시키는 악순환의 원인이 될 것이다. 능력이 있건 없건, 높은 보상으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꼭대기의 대학입학기회를 특정 시기(즉 부모의 지원 아래에서 학습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유아 청소년기)의 경쟁을 거친 사람들에게만 제공하는 모델은 그러한 경쟁에 기꺼이 참여할 조건을 갖춘 가정이나 계층에게만 유리하다. 


'이제 늦었다' 싶을 때에도 공부하고 노력할 수 있는 기회가 계속 주어지는 사회에서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능력과 그것을 통해 획득한 보상이 개인이 아니라 사회로 귀속되는 것을 자연스레 여기게 되지 않을까? 생애적으로 제공하는 평생학습적 시각이 갖는 의미가 여기에 있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교육받는 것을 당연시하는 풍조는 200년도 채 되지 않은 '기이한 문화'다. 인류의 본능적으로 죽을때까지 뭔가를 배우려고 시도해왔다.


결론적으로, 교육이 개인의 경쟁과 생존을 위한 수단을 넘어서서 사회적 협력의 기반이 되는 장치로 기능하려면 교육기회의 지속적이고 항상적인 보장이 필요하다. 경쟁을 통한 교육제도의 효율성 못지 않게, 언제 어디서든 접근할 수 있는 물리적인 환경과 교육의 최저선을 보장하기 위한 비용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혼자서 고립된 채로 성장하고 배우지 못한다. 언제든 배울 기회가 제공되는 사회라면, "나의 노력만으로 성공했다"는 착각 속에서 자신만의 생존이익을 도모하는 엘리트 집단의 행태로부터 조금은 더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참고자료

Numerus clausus

Jewish Population in the United States

1926/27-1945: Struggles of Jewish Identity in a Pivotal Era

The Education of Elites in the United States

“흑인, 꼭 범죄 피해자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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