ㅣ 사랑하는 그대와 나의 이야기
<응답하라 1988>을 재밌게 보았다. 드라마 배경이었던 1988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고 다음 해에 갓 태어난 사람이지만 이상하게도 공감가는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거의 한회도 빠짐없이 본방사수를 했다.
주인공 '덕선'의 남편이 누구인지 추리하는 것도 재미의 요소였지만, 나는 덕선의 언니인 '보라'를 좋아했다. 스스로가 보라와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집안의 맏이며, 뭘 하든 열심히 하고, 살뜰하고 따뜻한 여동생이 있고 - 물론 덕선이와 다르게 내 동생은 굉장히 똑똑하기까지 하다.- 그 여동생과 무지막지하게 싸워대는 것도, 엄마와 친한 것도, 연하 남자친구와의 나이차, 아버지의 직업까지 같아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보라와 아버지의 관계가 조명될 때는 마치 아빠와 나를 브라운관으로 옮겨둔 것 같았다.
우리 부녀도 동일-보라 부녀 못지 않게 무뚝뚝함과 어색함의 끝을 달린다. 마음은 그게 아닌데.
가끔 꿈을 좇아 사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 자식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가 바로 그 때인 듯하다. 스무살 대학에 입학하던 그 날부터 꽤 오랜 시간 부모님과 나는 떨어져 살았다. 갈수록 부모님과 함께 했던 시간 보다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는데 명절이나 휴가가 아니면 뵙기 어렵다.
보라는 아빠 퇴임식에도 꽃다발 들고 참석을 했지만, 나는 그날 기획한 행사 당일이라 참석하지 못했다. 사실은아빠 퇴임식도 당일 엄마한테 카카오톡으로 아빠한테 그동안 고생하셨다고 꼭 연락해라 는 메시지를 받고서 알았다. 성동일이 우리 아빠였다면 나는 '천하의 개딸'이라 욕을 들었겠지만 아빠는 단 한 순간도 내색을 한적이 없다. 수화기 너머로 "아빠" 라 부르면 "그래 애쓴다. 푹 쉬고 엄마한테 다 듣고 있다" 란 대답만 돌아올 뿐.
엄마와는 매일 통화를 나누고 애정을 표현하는 것이 정말 쉬운데 아빠에게는 일단 뭐라 말을 시작해야할지를 모르겠다. 아빠의, 아빠와 나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경남 마산. 지독히도 가난한 6남매 집 3대 독자이자 둘째 아들은 마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조흥은행에 취직 했다. 영특한 머리에 성적도 좋았지만 대학 진학을 꿈꾸긴 어려웠다. 서울에서 미술공부를 하는 누나의 뒷바라지를 해야했기 때문이다. 특별하게 공부를 하고싶단 생각도 별로 없었지만 축구가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신발도 못사고 운동도 못했던 것은 조금 속상했다. 사춘기도 오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장사를 하면서 자녀들을 키우셨지만 시댁에서의 갖은 구박을 들어야했다. 이웃에 살던 고모는 하루 걸러 집에 들러 어머니의 머리채를 잡았다. '남편 잡아 먹은 나쁜 년'이라며 어머니를 욕했다.
키가 자라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빚을 내서 교복을 새로 맞췄는데 도둑이 들어 홀랑 훔쳐갔다. 바짓단이 껑충 올라간 바지를 입고 등교하는 것도 창피했다. 그래도 몸이 커지면서는 고모가 어머니께 함부로 대하질 못했다. 어머니를 보호하고 아래로 넷이나 있는 여동생들이 학교를 다니려면 돈이 필요했다. 등교하고 나면 곧바로 불려가서 육성회비를 왜 내지 못하냐고 온갖 욕을 들었다. 그래도 참았다. 어머니에겐 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성장하면서 웬만한 일엔 표현을 잘 안하게 되었다. 살기 바빴다. 아니 그보다는 예민하게 굴어서는 본인이 살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라 했다.
그렇게 취직을 한 아빠는 은행에서 엄마를 만났다. 아빠는 자신의 성격과 정 반대인 엄마에게 첫눈에 반했다.
엄마는 똑똑하고 현명했으며 아름다웠고 상냥했다. 똑부러지는 성격인 엄마는 아빠의 모든 경제적 곤란함을 해결하는데 힘을 썼고, 시댁의 모든 빚을 청산하는데 이른다. 능력있던 아빠 -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렇게 명석하고 뛰어난 사람을 처음 보았다고 했다.- 는 점점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었고, 나와 동생이 세상에 나왔다.
은행에 계속 다니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젊은 직원들은 컴퓨터도 잘했고 똑똑했다. 아빠는 컴퓨터도 잘 다루지 못했고 노동조합에서 여러 일들을 하느라 은행에서 대하기 편한 직원은 아니었다. 엄마는 아빠에게 승진 욕심 내지 말고 버티기만 하라고 했다. 자식 둘 대학 등록금 지원받는게 어디 쉽나. 아빠도 엄마 뜻에 동의했고 최선을 다해서 버텼다. 그리고 2015년 2월, 30년 넘게 일했던 은행에서 퇴직했다.
성탄절을 맞아 긴 휴가를 냈다. 추석에 잠깐 내려간 것 빼고는 집에 있을 시간이 없었기에 휴가를 부산에서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 날은 바로 아빠의 쉰 네번째 생신이였다. 여느해와 달리, 아빠의 생신은 좀 특별했다. 퇴직 후 처음 맞는 생신이기도 했고, 부모님 집이 이사하는 날이기도 해서 몹시 분주했다. 내 고향 부산의 하늘은 청량하고 따뜻했다. 케이크에 초를 꽂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나눠먹기 시작하는데 아빠가 가장 큰 조각을 내 접시에 놔두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였기 때문이다. 나는 게눈 감추듯 케이크를 먹어치웠다.
집에서 쉬고 있는데 아빠가 바다를 보러가자고 하셨다. 차를 타고 나섰다. 퇴근 시간과 딱 맞물려 고속도로는 막혀 엉망이었지만 그 날 아빠와 나는 울산 정자항까지 가서 대광어 한마리를 통째로 사왔다. 심지어 엄마가 너무 멀다고 아빠를 말리기까지 했지만 소용없었다. -보통 아빠는 전적으로 엄마의 의견을 따르지만 말이다.-
왜? 전날 내가 엄마한테 '광어회 먹고싶다'고 말한것을 아빠는 들었기 때문이다. 아빠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내가 '먹고싶어 하는 것'이었다.
아빠에게 굉장히 특별한 존재라 느끼는 건 항상 그 당시, 그 순간보다는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난 뒤다. 언젠가 남자친구와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는 회를 좋아하지만 구운 생선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유를 묻길래 생선을 잘 발라먹지 못해서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28년간 나는 생선을 스스로 발라먹어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항상 아빠가 생선살을 발라주셨으니까. 내 밥 위에 잔가시까지 곱게 발린 생선살을 늘 올려주셨다. 하루에 한 봉지씩 먹는 견과류들이 유행인데, 나는 아빠가 일일이 포장한 견과류 등을 바리바리 싸들고 늘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나는 그것이 아빠의 사랑 표현임을 알고 있다. 아빠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내 필요를 민감하게 감지했고 필요보다 풍족하게 채워주셨다. 아빠의 어린시절 가난해서 먹고싶어도 먹지 못했던 기억때문에, 늘 누나와 동생들에 양보했던지라 양껏 먹지를 못해서 나와 동생에게만큼은 남더라도 넉넉하게 주고 싶어하셨다.
음식 뿐만이 아니라 아빠와 엄마는 최대한 우리에게 지원해주려고 애쓰셨다. 월급쟁이 사정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만 부모를 닮아 영특한 두 딸들이 하고싶은 일 맘껏 하고 살려면 등록금 뿐만 아니라 학원도 보내야 했고 교환학생도 보내야 했다. 학비만 드나, 기숙사며, 용돈 등등 쓰는데 드는 비용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 뻔한데 그래도 가서 하고 싶은 것 하고 배우고 싶은 것 배우라고 하셨다. 우리 딸 앞으로 큰일 해야한다면서.
학부 시절 정치학 강의를 열심히 듣던 때에 아빠는 신문 스크랩을 하고 공부까지 하면서 나와 대화하고 싶어하셨다. 아빠는 내게 가장 좋은 선생님이었다. 아빠에게 처음 배운 것이 많다. 정치도 시사도 한문도 스포츠를 보는 법, 누구보다 성실하게 사는 법도...
그럼에도 아빠는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신다. 석-박사과정 유학을 지원해주지 못해서, 서울에 번듯한 집을 얻어주지 못해서 말할 거리도 안 되는 것들을 일일이 나열하며 더 지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더 능력있는 아빠를 만났다면 더 잘됐을지 모르지 않겠냐고.
아니, 나는 아빠 딸이라서 더 잘 살고 있는 거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저 쑥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아빠 지점에 들렀던 적이 있었다. 아빠와 똑닮은 내 얼굴은 말하지 않아도 아빠 딸이냐며 반김을 받았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의 전형인 아빠지만 나를 소개할 때 굽었던 어깨가 쭉 펴지고 입술 밖으로 나오는 단어들 마다 자랑스러움이 묻어났다. 두 딸 중 누구냐는 물음들에 아빠는 딱 한마디 하셨다.
응? 이 아가 그 큰 딸.
아빠의 말이 끝나자마자 직원 분들은 그동안 아빠가 어찌나 내 자랑을 했는지에 대해서 증언했다. 나는 고된 아빠의 인생의 가장 큰 자랑거리였다. 큰딸이 똑똑하다고, 상을 받았다고, 속 한번 안썩이고 공부하고 알아서 착착 무언가를 해낸다고 온갖 자랑을 어찌나 했던지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그 날 이후로 뭘 하든 더 열심히 했던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효도는 그 '자랑스러움'을 선사하는 것 밖에 없었다.
동생처럼 살뜰한 애정표현도 못하고 그저 엄마만 찾는 나라 죄송한 마음 뿐이지만, 나 역시 아빠의 자랑거리로 사는 것이 행복했다. 자식들의 꿈을 지원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던 나의 아빠.
퇴직 후 제빵사로 제 2의 삶을 살게 된 아빠, 이제는 아빠의 행복만을 위해 오롯이 사시기를.
여전히 무뚝뚝하고 말 못하는 큰딸이지만 나는 영원히 그대의 자랑이 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