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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찡 Jan 26. 2016

정말 서른엔 늦을까?

ㅣ타인의 삶을 판단할 권리

바쁘단 변명으로 책을 등한시 하고 산지 꽤 오랜 시간이 흘러 마음에 찔림이 왔다.  업무에 필요한 문서를 읽거나, 필요한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과 달리 순수하게 독서만을 해온 시간이 오래 됐다. 온 지구가 냉기로 휩싸인 주말에 전기장판을 따뜻하게 만들어두고 책꽂이에 꽂힌 책들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고 싶어서 일단 제일 얇은 책부터 집어 들었다. 20대 여성을 타겟으로 한 자기계발서였다. 성공한 '멘토'를 자처하는 작가의 얼굴이 프린트된 책이었다. 꽤 유명한 베스트셀러 중 하나였고 이해하기 쉽고 단순한 내용들이라 금방 읽었다. 쉬운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상당 부분 공감하는 글들도 있었다. 그렇게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든 생각?  불편했다. 왜 불편했을까?  


실패한 인생일까?

솔직히 말하면 불안했다. 글귀 중에 '서른에 그렇게 살기엔 너무 늦다.' 라던가, '서른은 늦다. 20대때부터 이렇게 살아야한다.' 라는 글들 때문이다. 내게 서른까진 2년의 유예기간이 남았는데 2년을 책에 나와있는 저자의 태도를 장착하지 않으면 '실패한 삶'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

글-쎄.


범람하여 드는 자기계발서들의 특징은 획일화된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는 거다. 그 메시지는 끊임없이 나이대별로 일정하게 변화한다.

 10대에는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이 영광의 합격수기를 쓴 것이 잘 나간다. 마치 인생의 모든 것을 이룬 것 같은 느낌마저 주고는 한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고 그 결과 이렇게 해외 유명 대학에 진학했다!' 라고.  아마 진학이 지상 최대의 퀘스트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조국의 교육열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겠지. 그러나 짧은 시간안에 그것은 하나의 판타지에 불구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20대에는 10대와 다르게 선택해야할 것들이 너무 많다. 해야할 일도 많다. 공부도 해야하고 경력도 쌓아야하고.  아파야 청춘이라고. 당신이 지금 힘들고 고민스러운 것은 청춘이기 때문이라고 포장하거나 더 나아가 더 바쁘고 열심히 살아야 된다고 다그친다. 서른은 늦었다고 겁을 주면서 말이다.

막상 서른이 되어서는 '고작' 서른밖에 되지 않았다고,  마흔에는 마흔대로 "이렇게 살아야한다"고 규정하면서 성공한 삶을 살기 위해선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심지어 열정만 있다면 여든도 젊다는데..

수많은 '아픈 청춘'들이 공감했던 장면. 청춘은 꼭 아파야만 할까?


정답입니다?!


흔한 자기계발서가 범하기 가장 쉬운 오류는 본인의 생각이 가장 이상적이고, 더 나아가 다양한 인생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솔루션인양 구는 것이다. 너무 많은 변수들이 존재하는데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정답' 이 과연 존재할까? 세상엔 너무도 다양한 인생들이 있는데 말이다.


다양성은 나와 다름을 인정할 때 생긴다고 믿는다.  나의 경우는 동생과의 관계가 그러했다.

동생은 나와 극도로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는 평생을 죽도록 싸웠다. 같은 한국어를 하지만 구사하는 언어 자체가 다른 것 같았다. 평생 내 동생만큼 이성적인 사고의 극을 달리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너무 맞는 말만 해서 내가 상처를 받을 때도 있었다. 권력지향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을 가진 나는 그런 내 동생을 무력으로 탄압했지만 동생은 성장하면서 두뇌만큼 힘도 세져 결국 우린 전략적 공생관계를 이어갈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내가 동생과 싸워봤자 나는 한 주먹거리도 안됨을 몇번의 싸움 끝에 깨달았던 것이겠지.)


동생이 수능을 앞두던 시절에 나는 언니랍시고 이런저런 충고를 했었다. 동생은 내 경험을 상당 부분 존중해주었지만 팽팽하게 맞서던 부분이 있었는데 바로 '야간자율학습'이다.

- 참 우스운 것이 우리 부모님은 우리 자매에게 자율을 굉장히 중시하셔서 간섭을 한 적이 없으신데 나는 유독 내 동생의 학습에 관심이 많았다.- 각설하고.

 나는 동생에게 야간자율학습을 충실히 하기를 권했고 그 시간을 잘 이용했을 때 능율이 오를 것이라 했다. 나 또한 야간자율학습 시간을 잘 이용해서 성적이 많이 올랐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생은 그 시간에 부족한 과목을 학원이나 과외를 이용해 보충하기를 바랐고, 좀 더 빨리 귀가하는 것을 고집했다.  당시 동생은 외국어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차량을 이용한 편도 1시간 30분 거리를 통학했다. 게다가 야간자율학습을 하게 되면 12시 쯤 마치고 집에 오면 새벽 1시 반을 훌쩍 넘기기 마련이었다. 2-3시간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또 등교를 하게 되면 무엇보다 중요했던 학교 수업을 집중하기 어렵기 때문에 야간자율학습을 꼭 해야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 시간을 이용하는 것은 학습자에 맞게 변형할 필요가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제시한 방법은 나에게 가장 최적화된 방법이었던 것이다. 우리집과 학교의 거리, 나만의 학습 스타일,  집중도, 강점과 약점 과목이 동생과 나는 판이하게 달랐다. 누가 더 잘했냐고?  둘의 성적을 놓고보면 별 차이가 없다. 스타일의 차이일 뿐이었다. 더 다양한 학습 스타일은 존재한다. 필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자기주도 학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맹목적인 암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동일한 교재로 수업을 진행하더라도 습득하는 과정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어떤 것이 맞다, 틀리다라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본인이 경험한 선에서 평가의 말을 내뱉을 수 있을 뿐이다.


성공한 삶에 대한 잣대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누군가에겐 입신양명이 성공한 삶의 척도가 될 수 있을 것이고 또 누군가에겐 집에서 고양이 기르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성공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니 말이다.


늦었다는 것도 결국 누군가의 잣대일 뿐이다.


 '과연 나는 언제쯤 어른이 될까?' 스무살은 아닐거 같고. 대학을 졸업할 때 쯤인 스물세살이 되면 뭔가 어느 정도 어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학교를 다니면서 더 많은 것을 알 것 같았고, 견문도 많이 쌓았을 거라 생각했다. 막상 스물세살이 되어보니 나는 어른은 커녕 '인턴 나부랭이'에 불과했다. 인턴을 하느라 졸업을 미뤘고 시험기간 때는 '모른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으며 인생에 어느 갈피를 잡아야할 지 몰랐다. 그렇게 학부를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오니 나는 또  갈팡질팡 고민도 많고 과연 맞는 선택을 하는 것인지 복잡해질 때가 생기더라. 이렇게 처한 입장이 달라짐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기준'을 하나하나 인생에 적용하다보면 지치고 외로워질 때가 많은 것 같다.   '아직도?' 란 단어가 문장의 시작을 알리면 보통 뒤처진 느낌이 들기 마련이니까.  '아직 재수해?' '아직 취업 못했대?' '아직 결혼 안한대?' 등등.

그런 보편적인 기준이라는 것으로 사람의 인생을 이리저리 재단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지 않나 싶다.

진심으로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면서 사는 사람에게 현실에 안주하고 도전하지 않는다며 내 마음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나이 서른에 많은 것을 이룬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아무것도 성취한 것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인생의 경중과 성패를 논하기엔 30년은 너무 짧은 시간이 아닐까?

열살 어린이에겐 서른살이 어른이지만, 여든 줄에 든 할머니에게도 서른이 어른일까?


결국 내가 받아들이고 싶은대로 받아들이는 것일 것이다.

몇가지 기준만으로 인간의 삶을 무작정 높이거나  폄하부터 하는 것은 너무 슬플 것 같다.

세상엔 수많은 기준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깡그리 무시하고 '나는 나의 길을 간다'는 마음으로 살긴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응 너는 그렇구나.'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멘토를 자처하는 많은 작가들이 말하는 더 많은 청춘들이 풍요로운 인생을 살길 바란다는 순수한 진의를 깎아내리고 싶지 않다. 지면이라는 매체의 한계 때문에 단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다만,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많은 보편적인 기준 중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지고 싶고, 내 인생이 어떤 누군가의 잣대에 의해 평가받고, 나 또한 다른 이의 인생을 평가하기 원하지 않는단 고민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됐다. 괘씸함을 더한 불쾌함을 주었다면 그것 또한 내 짧은 사고와 표현의 한계이고 부족함 탓이다. 넉넉한 양해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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