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찡 Oct 16. 2019

회사와 이별했다.

2019년 10월. 궁상맞은 퇴사후기.

얼마 전 회사와 이별했다.

4차 산업혁명이 어쩌고저쩌고, 평생 직장이 없다는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굳이 '이별'이란 단어를 쓴 이유는 특별하진 않다. 그저 나에겐 일도 회사도 연애와 같은 카테고리였다. 오그라들기 짝이 없지만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여느 이별과 마찬가지로, 아름답고 응원만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이별 후유증을 앓듯이 퇴사를 준비하는 기간동안 나는 몸과 마음을 많이 앓았다.


씁쓸하고 서운함도 있었지만 다 지나간 지금은 감사함이 더 크다.


퇴사를 하기 까지.


올 8월과 9월은 문자 그대로 정신없이 지나갔다.

야근을 하고, 밥 먹는 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을 쪼개가면서 9월 큰 프로젝트 하나를 마무리 했다. 우리 회사-아직은 어색하니 우리회사라고 하자.-는 이벤트 기획사다. 30개 국가에 60개 넘는 지사를 가진 외국계 회사로, 한국에서는 올해 10주년이 되는 회사다. 글로벌 네트워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사답게 근무하는 동안 여러 지사와 협력할 기회가 많이 있었다.  9월 말에 진행했던 프로젝트는 호주 지사와 협업으로 진행해야 했던 프로젝트였다. 호주 오피스의 지사장을 비롯해 경험많은 직원들과 함께 한국지사의 카운터파트너로 일하게 됐고, 대형 이벤트를 진행해보는 것은 처음이라 여러모로 긴장이 됐다.


참가자 규모도 크고, 국내외 여러 이해관계자가 개입된 행사라 현장 사무국 기간도 2주나 되고 매일 2-3시간 밖에 못자며 준비한 이벤트였다. 지난 5년간 여러 행사를 기획하면서도 손꼽게 이번 이벤트가 너무 힘들게만 느껴졌는데, 이번에는 유독 지원 인력이 없었다. 사실 7월까지는 혼자 일하는 것도 견딜만 했다. 그런데 행사가 임박해 8월이 되니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숨만 쉬어도 이메일이 금방 100통씩 쌓이기 시작하는데, 손은 모자라지 시간은 없지 야근은 불가피했다. 게다가 겨우 충원된 인력도 유난히 어린 후배들이었다. 각자 파트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말 걸어주고, 기분을 살피면서 일까지 쳐내려니 더욱 바쁘고 힘들었다.


그럼에도 이 행사는 한국 오피스에서 앞둔 올해 가장 큰 행사였고, 수익적으로 중요한 행사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했다. 인력 충원은 회사가 노력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 있는 형편이라도 잘 꾸려나가보자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회사에 대한 '로열티'였다.


같이 일하던 호주 지사장과 직원들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왜 너는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지, 왜 지원이랍시고 온 직원들은 현장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는지, 왜 나타났던 직원들이 사라지는지. 왜 지금 너밖에 없는지!

사흘 정도 지나자 나름 계산을 끝냈는지 더이상 묻지 않았다.


'끝은 나겠지, 하루씩 버티다 보면 끝나겠지' 라고 되뇌이면서 행사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호주 지사를 비롯한 해외 파트너, 클라이언트랑 일하는 경험은 정말 특별했다. 진짜 '글로벌 스탠다드'가 무엇인지를 배웠다. 영어도 많이 늘었고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에 고무되어 있었다. 다행히 열심히 노력한 것을 그들도 모두 알아주어서 좋은 평가까지 덤으로 얻었다.


문제는 행사가 끝나고였다. 행사는 잘 끝났지만 나는 더이상 구멍난 둑을 막는 소년처럼 다시 소위 '몸빵'을 할 자신이 없었다. 몸은 매우 지쳐있었고 그에 따른 신호로 여러 잔병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결국 대표를 비롯해 여러차례 구조 신호를 보냈고, 의미없는 공허한 대답이 돌아오자 나는 마음을 정할 수 밖에 없었다.


이번 행사가 잘 끝났으니 네가 겪은 어려움은 이제 지난일이며, 다음 행사에 바로 투입되어 다른 사람은 어렵지 않도록 도우라는 식의 태도는 이해를 넘어 서운했다. 더이상 내가 받아들이지 않고 'NO'라고 말하기 시작하자 이해할 수 없는 부당함은 더 크게 다가왔다. 나는 존중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회사가 좋아하는 직원이었다. 불만없이 어찌됐든 맡은 일을 스스로 해내고 마무리하니까, 편했을테지. 그런데 잃을까봐 노심초사하고 늘 살피게 되는 직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그동안 내 권리를 주창하지 않은 내 불찰이다. 그리고 인수인계를 하는 도중에 본격적인 이른바 '현타'가 오기 시작했다. 나 혼자서 끙끙대며 하고 있던 일을 4명에게 인수인계를 나눠서 하게 됐다. 심지어 아르바이트 직원도 2명이나 추가 고용해서. 이럴 거면 좀 더 빨리 못한다고 할 걸 그랬나 조금 후회했다.


회사에서 있었던 수많은 개인적인 비화들을 차치하고도, 내가 가고자하는 길과 회사가 유지하고자 하는 길이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 참고 견뎌야할 이유를 더 제시하지 못했다. 사람 간 관계에서도 익숙함을 빌미로 독약같은 관계는 끊어내야 하는 것이 맞듯이, 회사도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차라리 불확실한 미래에 뛰어드는 것이 더 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어떤 일을 해냈건 간에 나간다는 말을 한 이상 나는 더이상 충성심있는 직원이 아니었고, 언젠가는 나갈 사람이었을 것이니까.



그래서 결국 퇴사 했다.


마지막 날,  퇴직인사 메일을 작성하면서도 속상함이 울컥 올라왔지만 그럼에도 그동안 감사했다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나를 가장 함부로 대했던 임원 한분은 나의 퇴사가 괘씸하기 짝이 없는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모든 소통을 끊고 뒤에서 나를 씹어대기 바빴지만, 굳이 그 분 이름을 거론하며 가장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나왔다.


그리고 집에 곧장 돌아와서 옷만 갈아입고 누워서 울었다. 왜 울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실연을 당한 것처럼 우울했다. 내가 어떻게 했는데. 내가 이제껏 어떻게 했는데 라는 억울함이 울컥울컥 올라와서.

몸과 마음을 다했는데 내가 얻은 결과는 겨우 이거였다는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몸까지 아팠다. 고열과 근육통을 동반한 대상포진이 시작됐는데 정말 살을 스치는 것만으로도 너무 아파서 나라는 존재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프다보니 이상하게 정신이 또렷해졌다. 한참을 울다가 생각했다.


회사도 나를 잃는 것이 아플까?

아니-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아파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냔 말이다.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처방받은 약을 먹고 잠이올땐 자고, 잘 먹고, 일단 나를 토닥이면서 다시 생각했다.


내가 회사를 나온 이유.


일단 나는 더이상 소모품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회사와 함께 성장하는 것이 꿈같은 말이라 하더라도 나는 그 꿈을 이루고 싶었다. 그래서 프로젝트도 잘하고 글로벌 그룹 차원에서 진행하는 교육 프로그램도 들으면서 앞으로 더 큰 무대에서 미래를 그리며 회사와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한국 오피스는 나와 생각이 달랐던 것 같다. 그때그때 수익을 얻으면서, 현재에 만족하고, 누군가를 구하면 쓰고 아니면 외주를 주고 하면서. 그렇게 지내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배우고 성장하는 것보다 나를 소모하는 것으로 느껴졌고, 그것은 나를 되게 외롭게 만들었다.

내가 상처를 받으면서까지 굳이 그 곳이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어떤 관계에서도 '당연한' 것은 없다. 나의 노력을 회사는 당연히 여겨선 안됐었다. 함께 잘 커가고자 했던 것이었지 나를 즈려밟고 회사만 승승장구하는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어려운 하나를 해냈으니 이번엔 어려운 둘을 해봐."라고 하는 곳이라면 내 마음과 에너지를 다할 이유가 없는 곳이다. 둘을 해내면 나중엔 셋을 해내라고 할 것이 분명하니까.



퇴사를 하면서 여러군데 미리 인사를 했다. 그래도 성실히 일한 것은 맞는지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의 클라이언트가 무척 아쉬워해주고, 어딜 가든 편하게 보자고 응원해주었다. 무엇보다 위로가 됐던 건 함께 일한 호주 지사장의 코멘트였다. 회사를 나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겠단 내 말에 "They don't deserve you." 라며 어느 곳이든 당신이 나의 레퍼런스가 되어주겠다고 기꺼이 말해주었다.


울기도 많이 울고, 많이 웃기도 하며 정말 바쁘고 치열하게 일했다. 각별한 마음으로 회사를 대했고 나와 회사를 위해 매 프로젝트 최선을 다했던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러 큰 규모의 행사를 해냈던 것, 글로벌하게 일하면서 곳곳에 친구들이 생긴 것도 감사한 일이다.


열심히 일한 덕에 여러군데에서 좋은 오퍼를 받았다. 나의 다음 시작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지친 몸과 마음을 돌보며 잘 자고, 잘 먹고, 잘 쉬고 있다. 어찌된 일인지 회사 다닐때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하고 성경을 읽는다. 오전에는 필라테스를 하고 오후엔 글을 쓰며 저녁엔 맛있는 저녁을 먹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퇴사하게 되었을때는 그저 불안하고 억울하기만 했는데 서늘한 가을바람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저 행복할 뿐이다. 나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되게 오랜만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더 단단해질 수 있지 않을까. 이번보단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또 다른 시작을 앞둔 나에게, 진심으로 나를 응원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름 정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