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ckchain and Digital currency
이번 글은 화폐와 지급결제, 그리고 블록체인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넓은 범위에서 화폐는 '개인 또는 기관 간 서로 인정한 금전적 가치'를 의미하고, 지급결제는 그 '금전적 가치의 이전'을 뜻한다. 이 글에서 블록체인은 화폐 및 지급결제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기반기술로서 다뤄지지만, 적용의 이점과 가능성을 논할 뿐, 블록체인이 디지털화폐나 차세대 지급결제 방식을 구현하는데 필수적이라는 주장을 하진 않을 것이다. 기술적용의 이점이 있더라도, 그 이점이 투자비용 대비 크지 않거나, 적용 자체가 현실적으로 어렵거나, 의도치 않은 새로운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블록체인에 대한 오해
블록체인을 기사로 접하다 보면 다양한 적용사례를 보게 된다. '시중은행이 자체 암호화폐 또는 블록체인 기반 결제시스템을 개발한다', '스마트계약을 통해 보험금을 자동지급한다', '사물인터넷 기기 간 블록체인 결제를 구축한다', '블록체인으로 증권/채권 자산 거래시스템을 만든다' 등의 다양한 사례가 언론을 통해 세어 나오는 걸 보면 마치 블록체인이 곧 실생활에 도입될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위 내용들은 기업홍보적인 요소가 강하고 아직 현실 가능성이 적은 아이디어일 뿐이다. 그 이유는 첫째 '모든 규제금융의 거래는 법정화폐로 이루어져야 하고', 둘째 '블록체인 기술 그 자체만으로 절대 화폐의 신뢰를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1) 규제금융은 기본적으로 법정화폐 기반의 경제활동이다. 개인 간 거래는 암호화폐든 조개껍질이든 합치에 의해 성사될 수 있지만 (이 마저도 법적 제약이 많지만) 기관 또는 법인 간의 지급결제는 법정화폐인 원화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소관하고 인정하는 기관은 중앙은행이 유일하다. 중앙은행이 인정하지 않는 이상, 법정화폐가 아닌 다른 형태의 금전적 가치 (예. 암호화폐)로 지급결제가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즉 블록체인 기반의 결제시스템을 구축할 경우, 법정화폐 자체가 블록체인 기반으로 구현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2) 블록체인을 포함한 그 어떠한 기술도 법정화폐의 신뢰를 제공할 수 없다. 법정화폐의 신뢰는 중앙은행이 '법적'으로 제공한다. 즉 시중은행이 자체적으로 블록체인 기반의 화폐를 발행하거나, 담보금을 블록체인화 또는 토큰화 한들 거래상대방인 다른 시중은행이 그 토큰을 신뢰할 수 없다. 애초에 시중은행은 법정화폐를 발행할 권한이 없을뿐더러, 시중은행들이 중앙은행에 예치하는 지급준비금의 직접적인 결제 없이, 독자적으로 발행한 화폐의 건전성을 거래상대방이 그대로 믿을 수 없다.
다시 말해, 결제업무가 포함된 금융영역에 블록체인이 적용되려면, 중앙은행의 참여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한국은행의 결제망인 신한은공동망 (BOK-Wire+)이 블록체인으로 구현 또는 연동되지 않는 이상, 지준계좌의 증빙과 이체가 블록체인 환경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한, 앞에서 언급된 아이디어는 실현될 수 없다. R3 (Corda), IBM (Fabric), JP Morgan (Quorum), Clearmatics (USC) 등의 블록체인 사업자들이 전 세계 중앙은행들과 다양한 테스트를 하는 이유도 여기있다.
디지털화폐 (Digital currency)
결제 관련 금융 애플리케이션을 블록체인으로 개발하기 위해서 중앙은행의 참여가 필수적이라면, 중앙은행은 어떻게 블록체인을 적용할 수 있을까? 먼저 디지털화폐의 접근방식을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1. CBDC (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2. CBDR (Central Bank Digital Reserve; 중앙은행 디지털 준비금)
CBDC는 소매금융 (retail banking)에서 사용되는 대중(개인)이 접근할 수 있는 디지털화폐를 의미한다. 지폐와 동전의 전산화된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주로 소액결제에 사용되며, P2P 결제로 암호화폐와 유사하다. 중앙은행이 직접 발행한 형태의 화폐이기 때문에, 카드나 모바일 결제처럼 단순히 시중은행에 예금한 자금을 편의를 위해 전산적으로 표현한 것과는 개념이 다르다. 이러한 소매금융의 디지털화폐는 시중은행의 근간을 흔들고 전자기기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가 접근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단기간에 적용되기는 어렵다.
CBDR은 도매금융 (wholesale banking)에서 사용되는 금융사만 접근하는 디지털 준비금을 의미한다. 금융사들이 중앙은행에 비치된 지급준비금의 고액결제방식을 블록체인/분산원장 기술을 통해 거래 감독이나 효율성 측면에서 개선하고, 더 나아가 해외송금이나 증권대금 동시결제 (Delivery-verses-Payment)에 원자성(atomicity)을 지원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새로운 단어에 대한 추가 설명은 아래에서 한다.) 이 글에서 집중하는 분야는 CBDR이다.
CBDR (Central Bank Digital Reserve)
CBDR의 이해를 위해 현재 시스템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내국 결제시스템은 크게 소액결제와 고액 결제로 나뉜다. 소액결제는 은행 간 소액의 자금이체가 필요할 경우 청산기관 (clearing house)인 금융결제원에 상계(netting)를 요청한 후 차액을 결제하는 방식이다. 초당 수백 수천 건의 이체를 매번 직접 결제하는 것이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다수의 은행 간 소액자금 이체를 모으고 일정 기간 이후 남은 잔액만 결제하여 효율성을 증대한다.
고액 결제의 경우는 실시간 총액결제시스템 RTGS; Real-time Gross Settlement)이라고 불리는 방법을 주로 사용한다. 일정 금액 (10억) 이상의 이체가 필요할 경우, 청산기관 없이 실시간으로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예치한 지준계좌의 자금을 이전하는 시스템이다. 시중은행과 중앙은행이 STP (Straight Through Processing) 형태로 연결되어 각자의 단말을 통해 시중은행이 결제를 요청하면 중앙은행이 체결한다.
CBDR은 CBDC와 혼재되어 사용되곤 하지만 간단하게 개인이 아닌 금융사 간의 결제시스템, 즉 블록체인 기반의 총액결제시스템 (RTGS)라고 보면 된다. 영국과 캐나다를 시작으로 싱가포르, 홍콩, 중국, 태국 등 여러 중앙은행들이 CBDC/CBDR 연구를 진행 또는 완료했으며, 캐나다 중앙은행과 싱가포르 통화청은 각각 Jasper와 Ubin이라는 이름의 프로젝트를 블록체인/분산원장 컨소시엄인 R3와 진행했다. 한국은행도 올해 국내 스타트업 및 학계와 협력해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중앙은행들이 테스트한 CBDR 구조마다 미세한 차이는 있지만 개념 자체는 유사하기 때문에 싱가포르 통화청에서 진행한 Ubin 프로젝트를 기준으로 설명한다.
기본적으로 CBDR 방식은 세 가지 업무로 나뉜다: 저당(pledge), 거래(transfer), 환매(redeem). 이 중에서 중앙은행은 두 가지 업무를 담당하는데, 지준계좌에 예치된 시중은행의 자금을 블록체인/분산원장 기반의 토큰으로 바꾸는 '저당'과 반대로 토큰을 기존의 자금으로 다시 전환하는 '환매'다. '거래'는 중앙은행 없이 은행 간 P2P 형태로 토큰을 주고받는 업무를 의미한다. 사설이지만, 블록체인 기반의 토큰을 캐나다 중앙은행은 'CAD-coin'이라고 부르고, 싱가포르 통화청은 예탁증서 (DR, Depository Receipt)이라고 칭한다. 싱가포르 통화청이 '코인' 대신 '예탁증서'라고 부른 이유는, 중앙은행이 블록체인 기반의 화폐를 신규로 '발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준계좌에 예탁된 자금을 담보로 잡고, 증서 형태의 토큰으로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지준금은 그대로 두고 신규로 디지털화폐를 발행하면 통화량이 증가하는데, 중앙은행은 이를 원치 않는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저당 = 중앙은행이 지준계좌에 예탁된 시중은행의 자금을 담보로 증서(디지털화폐)를 발행
- 거래 = 중앙은행이 발행한 토큰을 시중은행 간 P2P 형태로 거래
- 환매 = 시중은행 간 거래가 완료된 토큰을 담보로 잡힌 지준금으로 환매
결제 시나리오는 아래와 같다:
1. 시중은행 A는 중앙은행이 관리하는 지준계좌에 예치된 자금의 일부 또는 전부를 저당 (pledge) 잡으면 중앙은행은 블록체인 기반의 토큰 (=코인, 예탁증서, 디지털화폐 등 정해진 이름은 없음)을 발행한다.
2. 시중은행 A는 정해진 거래기간 (예. 1일)동안 발행된 토큰을 원하는 거래상대방인 시중은행 B, C, D, E 등과 자유롭게 P2P 형태로 거래 (transfer)한다. 여기서 중앙은행은 '필요에 의해' 거래를 중단할 권한을 가질 수 있지만 중앙은행이 거래를 체결하는 업무를 담당하지는 않는다.
3. 시중은행 A는 정해진 거래기간 이후 남은 토큰을 중앙은행에 환매 (redeem)하여 그에 상응하는 담보금의 잔고를 갖게 된다.
CBDR이 기존의 결제시스템과 다른 점은 중앙은행이 단독으로 해왔던 결제 체결 업무가 필요 없어진다는 것이다. 중앙은행이 시중은행 또는 청산기관의 결제 요청에 반응하는 방식이 아니라 CBDR의 발행과 환매 역할만 하고 자금의 이체 자체는 시중은행들이 직접 자율적으로 한다.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화폐와 유사하게 법정화폐가 P2P 형태로 결제되는 것이다. 중앙은행이 자금의 원천이고, 토큰이 도매금융의 화폐 및 결제수단으로 인정받았으며, 지준금이 담보로 잡히기 때문에 시중은행은 거래상대방의 신용리스크(credit risk)나 유동성 리스크 (liquidity risk)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다만 추가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결제 완결성 (settlement finality)'이다. 현재 결제의 완결은 중앙은행이 '법적으로' 보장한다. 블록체인이 암호기술을 통해 결제 완결성을 시스템적으로 보장한다고 하더라도, 중앙은행 입장에서는 언제 결제가 완결됐다는 명확한 법적 기준이 있어야 한다. 만약 CBDR 시스템이 적용됐다고 한다면, 결제 완결성을 시중은행 간 토큰을 거래할 때 보장할 것인지, 거래를 마치고 중앙은행에 환매할 때 보장할 것인지 논의가 되어야 한다. (*결제 완결성이란 참가기관(예. 은행)의 지급 지시에 따라 지급결제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진 결제는 어떠한 상황이나 법률에 의해서도 취소(revocable)되거나 재지급(repaid) 되지 않고 지급결제 시스템의 운영규칙에 의거 무조건적(unconditional)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뜻함)
이점과 가능성
CBDR이 내국 결제시스템 (국내의 경우 신한은공동망, BOK Wire+)에 적용된다면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점은 다양한 블록체인/분산원장 기반의 금융 애플리케이션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다. 암호화폐 세계에서나 가능했단 다양한 스마트계약의 가능성을 그대로 법정화폐에 적용할 수 있다. 즉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화폐 (Programmable money)가 탄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해진 날짜에 결제(deferred settlement)가 이루어지거나, 원하는 거래(transaction)를 일괄적으로 모아 집단으로 결제(batch settlement)하거나, 심지어 금융결제원과 같은 청산기관이 담당하는 상계 업무도 상계 알고리즘 (netting algorithm)을 스마트계약에 심어 청산기관 없이도 상계거래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또한 블록체인/분산원장의 특성상 결제가 이루어지기 전, 도중, 이후의 투명성(transparency)이 명확하게 보장되고, 거래된 자금정보가 원장에 영속적으로 기록된다는 점에서 거래행위와 감사가 정확히 일대일로 매칭 되기 때문에 유동성 관리(liquidity management)가 개선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싱가포르 통화청이 집중한 CBDR의 다른 가능성은 바로 거래의 원자성 (transaction atomicity)이다. 원자적 거래 (atomic transasction)이라고도 불린다. 데이터베이스 용어인 원자적 거래는 쪼개질 수 없고(indivisible), 줄어들 수 없으며(irreducible), 참이나 거짓 중 단 하나의 진리 값을 가짐을 뜻하는데, 즉 금융에서 원자성은 1) 사용되었거나(spent), 2) 사용되지 않았거나(unspent), 3) 아예 유효하지 않거나(invalid)를 제외한 어떠한 경우도 없는, 상태가 모호하지 않고 결정적임을 의미한다. 싱가포르 통화청은 이 원자적 거래를 증권대금 동시결제 (DvP, Delivery verses Payment)와 외환 동시결제 (PvP, Payment verses Payment)에 적용하는 가능성을 논의했다.
증권대금 동시결제란 증권인도와 대금지급을 동시에 결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증권과 현금이 동시에 스왑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만 현 증권대금 동시결제 시스템에는 원자성은 보장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자산 (예. 현금, 증권, 채권 등)의 소유권(ownership)과 그 기록(record)이 분리되어있기 때문이다. 현재 증권의 경우, 증권 자체는 예탁결제원과 같은 증권중앙예탁기관 (CSD, Central Securities Depostory)에 전산 형태로 보관되어있고, 그 증권 소유권에 대한 기록과 잔고만 증권사/은행 계정에 담겨있다. 증권거래가 체결될 때 바뀌는 것은 그 증권의 소유자와 두 거래상대방의 잔고이다. 만약 증권과 현금의 스왑이 원자적으로 이루어지려면, 증권과 현금 모두 단순 기록(record)이 아닌 소유권 자체를 분산원장 기반의 데이터로서 거래상대방 간 보관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결제가 늦어지거나 불이행되는 리스크를 시스템단에서 원천 차단하고 실시간으로 결제가 이루어질 수 있다.
외환거래도 마찬가지다. 해외 은행 간의 자금이체를 할 때, 스위프트 (SWIFT) 메시지로 하나 또는 그 이상의 환거래은행 (correspondent bank)에 예치한 자금의 이전이 일으키면, 결제의 원자성이 보장될 수 없다. 짧으면 이틀, 길면 일주일까지 걸리는 해외송금의 경우 언제 자금이 도착하는지, 어디에 묶여있는지 알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만약 외환거래 시 거래상대방의 중앙은행을 신뢰하고, 자금이 단순 기록이 아닌 디지털화폐 형태로 소유권이 직접 바뀔 수 있다면, 실시간 원자적 거래도 가능하다는 주장이 있다.
적용의 당위
사실 CBDR의 적용에 있어서 확신이 서진 않는다. 맨 처음 언급한 것처럼, 투자비용 대비 현실적인 이점이 크지 않을 수 있고, 그 이점이 크더라도 적용 자체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며, 기술이 받쳐주지 못하거나 의도치 않은 다른 문제들이 생겨날 수 있다. 일단 기술적으로 초기단계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경제의 중축이 되는 중앙은행이 만족할 만한 퍼포먼스나 보안, 안전성을 갖춘 블록체인/분산원장 기술이 존재하지 않다는 게 첫 번째 문제다. 프라이빗 블록체인은 아직 연구된 지 3년도 채 안된 기술이고, 이러한 급진적인 (radical) 기술을 안전이 최우선인 내국 결제시스템에 적용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아직은 어려워 보인다.
일단 기술을 떠나서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금융기관들과 세금으로 운영되는 중앙은행이 CBDR을 적용해야 할 당위성이 부족하다. 'CBDR 적용 이후'에나 존재할 스마트계약 기반 금융 애플리케이션의 가능성과 유동성 관리 개선 및 거래의 원자성 모두 검증되지 않은 이점일뿐더러, 현실적인 이점이라 한들 잘 돌아가는 현재 금융시스템을 바꿀만한 이점이냐는 것이다. 물론 블록체인 기술의 범용화를 기대하는 나로서는 블록체인의 미래 가능성과 혁신을 지향하지만, 금융계 당사자 입장에서는 꽤나 도전적인 발걸음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