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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나무 Dec 29. 2023

태풍과 함께 오른 지리산

- 안개 커튼 속 천왕봉 

“이번엔 어디 산으로 갈까?” 하는 질문에서부터 새로운 산행이 시작된다. 여러 번의 산행을 통해 다리힘도 길러졌지만 의논하는 실력도 쌓였다. 서로를 잘 알게 되었다. 아들이 좋아하는 산행 코스는 힘들더라도 정상까지 빠르게 올라가는 길이다. 그래야 주말 게임시간이 한 시간이라도 더 확보되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중요한 것을 알게 되고는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은 아들과 새로운 곳에 간 김에 맛집에도 들리고 싶은 것으로 충돌하지 않게 되었다. 내려오자마자 가자 가까운 곳에서 시원한 것 마시고 아들이 원하는 분식을 간단히 먹으니 집에 돌아오는 길에 다툼이 없어졌다. 명절에 할아버지 댁 근처에 아빠가 소풍 다녔던 산을 다녀오자 제안하니 “왜 그렇게 낮은 산을 가려고 해!”라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설악산에서 등산 초보가 왜 이렇게 높은 산만 오냐며 다시는 천 미터 넘는 산은 안 오겠다던 녀석이 그 사이 마음이 변했다. “나는 지리산 천왕봉을 언젠가 함께 가고 싶었는데 그렇다면 이번에 거기 갈래?” 물으니 아이가 답이 없다. 침묵으로 수락하셨다는 부처님의 대답법을 떠올리며 “가겠다”는 뜻으로 듣고 천왕봉에 오를 준비를 시작했다. 


천왕봉은 1,915m 높이로 지리산의 최고봉이자 남한의 최고봉이다. 한라산과 더불어 남한에서 1900m가 넘는 두 개의 봉우리 중 하나다. 이곳을 아들과 함께 갈 기회가 생겨 감개무량했다. 천왕봉에서 장터목대피소가 가장 가깝다. 이곳에서 하루 묵으며 새벽에 천왕봉에 올라 일출을 봤었다. 아들과 다시 한번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을까? 장터목까지 오르는 가장 빠른 길은 백무동코스가 편도 4시간 걸리는 최단코스다. 아침에 집에서 출발, 점심 먹고 산행을 시작하면 해지기 전에 장터목 대피소도착이 가능할 것이다. 주말 대피소 예약은 꽉 찼고 금요일에만 대기자리가 있다. 대피소 취소자리가 생겼다는 연락이 왔다. 천왕봉으로 가는 문이 열렸다. 준비해갈 식사는 저녁, 아침 두 끼다. 코로나 여파로 모포 대여가 되지 않아 침낭도 챙겼다. 그런데 하산하는 날 비 예보가 있다. 역대급 태풍 힌남노의 방향이 한반도를 향하고 있다는 뉴스도 있었다. 입산금지는 대피소 판단 몫으로 두고 등산준비를 이어갔다. 배낭이 금세 가득 찼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보니 오른쪽 차 창으론 높고 맑은 가을에 솜사탕을 잡아 길게 뺀 듯 옅은 흰구름이 드리웠는데 앞 창으로는 딴 세상인 듯 흐린 하늘에 구름으로 가득하다. 흐린 구름 사이 구멍으로 맑은 하늘이 살짝 보여 구름만 넘어가면 맑은 하늘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왼쪽 창 밖은 이번 산행은 글렀다고 얘기하는 듯이 날도 어둡고 구름이 뒤엉켜 흐르고 있다. 온통 잿빛이다. 과연 어떤 날씨가 기다리고 있을까. 인월에 도착해 점심을 먹었다. 마트에서 고기와 김치를 보충했다. 남편은 계속 늦겠다며 재촉하는데 입소까지 여유 있었다. 인월 하나로 마트부터 백무동 코스 입구 주차장까지 길은 꼬불꼬불 뱀처럼 이어진다. 빗방울이 차창에 하나 둘 부딪히기 시작했다. 주차장은 산으로 이어진 길 끝자락에 버스터미널의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 다음번엔 버스를 타고 와도 좋겠다.


차를 주차하면서 남편은 지금 올라가면 천왕봉까지 못 다녀오겠다고 푸념했다. 그런 계획이 있는 줄은 몰랐다. 내일 새벽에 오르려고 헤드렌턴을 챙긴 터였다. 남편이 인월에서 왜 그리 서둘렀나 알게 되었다. 다음에는 몇 시까지 주차장에 도착해야 천왕봉에 오를 수 있으니 서두르자고 말하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온통 새벽 날씨만 보고 있었다고. 아들과 산을 타며 하나씩 맞춰갔듯 남편과도 새롭게 맞춰가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함께 간다는 건 둘이 하나를 택해 가는 과정이니까. 주차장에서 정비를 마치고 출발한 시간은 낮 열두 시다. 남편은 25년 만의 천왕봉행이라 했다. 탐방센터 가는 길 가에 작은 음식점과 찻집이 있었다. 조금 아스팔트 길을 지나 산을 들어서니 작은 광장이 있다. 천왕봉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그려진 팻말이 붙어있다. 화살표를 따라 계단을 오르니 바위에 이불 덮은 듯이 이끼가 있다. 그 위로 색을 잃은 잎들이 내려앉았다. 시간이 앉은자리에 쌓여 그대로 있는 곳. 정지된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다. 삼십 분을 올랐는데 땀범벅이 되었다. 내가 신발끈을 묶겠다 하니 앞서 가던 아이가 내 쪽으로 내려온다. “내려오지 마! 절대로 내려오지 마! 산에 올라갈 땐 내려오면 손해야” 하고 남편이 외친다. ‘뭘 그렇게까지 못 내려오게 하나’ 싶다. 한 시간이 지나자 데크길이 나온다. 끝없이 오르막 연속인 바위길을 걷다 만난 데크길은 꽃길 만난 기분이다. 헉헉대며 오르는 나와 비교되게 남편과 아들은 힘들어하지 않았다. 매일 수영하는 남편은 이 정도는 가뿐한 듯 가고 있다. 아들은 한 술 더 떠 검도 3분 대련보다 오늘 등산이 쉽다고 한다. 나도 헬스 해서 등산 가면 몸이 많이 가벼워진 걸 느낄 거라 했는데 초반 1시간은 여전히 힘들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한 시간 걷고 나서야 몸이 좀 풀렸다. 남편은 페이스 메이커를 작정하고 나서 뒤쳐지는 나를 앞장 세웠다. 내가 멈출라 치면 “등속도 운동으로 계속 가는 게 안 힘들어. 멈추지 마!!!”라는 떠밀었다. 한 시간 반이 걸려 ‘참샘’에 도착했다. 남편의 '라테'는 샘이 있는 여기서 밥을 해 먹고 올라갔다고 한다. 인월에서 사 온 자두를 먹으며 쉬었다. 살이 많고 맛있다. 하산하는 분이 이제 올라 언제 내려오냐 묻는다. 대피소를 예약했다 하니 끄덕이며 내려가신다. 처음 탐방소를 지날 때부터  대피소 예약명단에 있는지 확인받고 올라온 터였다. 


오르막이 끝났다. 길이 편해지니 한결 수월했다. 4시간이 걸린다고 안내되어 있는 길을 3시간 반 만에 도착했다. 우리 가족 등산 역사에 길이 남을 산행이다. 안내된 예상 등산시간보다 빨리 올라간 건 처음이다. 남편은 아들에게 “너희 엄마가 빨라져 산악인의 평균 속도에 도달했다”라고 평했다. 이 영광을 모두 남편의 잔소리 덕으로 돌렸다. 장터목에 도착하니 주변이 하얗고 뿌연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예전 기억에는 시선이 닿는 곳마다 굽이굽이 산이 펼쳐진 모습이 장관이었는데 아들에게 보여줄 수 없어 아쉬웠다. 천왕봉 올라가는 길도 표지판만 바람이 불어 보일 뿐이고 바로 위 계단부터 구름커튼이 쳐져있다. 바람이 많이 부니 땀에 젖은 옷이 금세 식어 추워졌다. 오늘 천왕봉을 오를지 의논했다. 의외로 쉬고 싶은 건 나고 둘은 천왕봉에 다녀오고 싶어 했다. 지금은 아무것도보이지 않으니 내일 새벽에 날씨를 보고 오르던지 다음을 기약하자고 했다. 천왕봉 오를 수 있는 시간이 오후 4시까지인데 아직 10분 전이다. 대피소에 체크인하는데 공단 직원도 하나도 안 보일 텐데 뭐 하러 올라가냐고 한다. 옷 갈아입고 쉬었다가 저녁을 해 먹기로 했다. 화장실 가는 길에 바람이 “쉬이 이이잉~”소리를 내며 불고 있다. 


대피소가 텅 비어 혼자 2층을 다 쓰는 줄 알았는데 저녁에 계속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다. 반대방향에서 종주해 왔다는 이들의 우비가 홀딱 젖어 있다. 옆에서 식사하시는 분이 연하천에서 넘어오는 길에 바람이 거세서 날아갈 뻔했다고 알려준다. 우리도 라면 끓일 물을 뜨러 계단을 내려갔다 와야 하고, 화장실도 건물 밖에 있어 거센 바람을 맞으며 다녔다. 비바람을 뚫고 이제 대피소에 도착해 취사실로 들어선 몸들에서 김이 모락모락 난다. 취사실에서 라면에 햇반과 고기를 구워 먹었다. 짐을 최소로 줄여온 우리와 달리 옆 팀의 부부는 반찬 수가 우리가 집에서 먹는 것보다 많아 보였다. 자주 오시는 분인지 패킹실력이 남달랐다. 버너, 코펠, 음식들을 두 손에 주렁주렁 들고 다니는 우리와 달리 D팩 하나로 간단하게 들고 다녔다. 


소등 시간이 아직 안되었는데 대피소 안은 조용하다. 비 예보 때문인지 대피소에 어린이라곤 우리 집 아들 한 명뿐이다. 밤늦게까지 사람들이 계속 도착했지만 밖의 취사실과 탈의실을 이용해 짐정리를 하며 쉬는 이들을 배려했다. 도시에서는 바깥 날씨와 상관없이 일상이 이어지나 문명에서 이렇게 조금 벗어나도 날씨 따라 꼼짝없이 행동반경이 제한된다. 사람을 편안하게 살게 하는 도시를 생각하고 있는데 둘째에게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따뜻하고 포근한 친구네 아파트에서 파자마파티 중이다. 통화하려 찬 바람 속으로 나가야 했다. 위이 이이이 잉~ 나는 바람을 맞고 있고 딸은 따뜻한 방에서 친구와 색칠놀이를 하고 있다. 친구와 노느라 재밌는 게 수화기로 전해진다. 


9시가 다 되어가지만 잠이 안 온다. 발이 아직 뜨겁다. 가장 부피가 작아 가져온 거위털 침낭이 덥다. 초가을에는 작은 담요정도가 적당했나 보다. 옆자리 누우신 분이 가족끼리 와 좋아 보인다고 말을 건네신다. 가족이 안 가려 해 친구들과 다니는데 무릎이 아플 나이가 되니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줄어들어 아쉬운 분이셨다. 아래층에 77세 할아버지가 있다는 소식도 이 분을 통해 알게 되었다. 비까지 오니 대피소에 있는 사람들이 대단해 보였다. 비 속을 걸어와 김이 펄펄 나는 몸으로 식사 준비를 시작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새벽 산 길을 떠나며 서로 우비를 잘 입었나 봐주는 눈빛들도 생각났다. 그리고 초저녁인데도 서로 잘 쉬도록 배려하는 분위기가 이곳에 있다. 아들은 이 속에서 아낌없는 칭찬과 격려를 받고 있다. 이 모든 게 그리워 가족들과 여기 다시 오게 될 것 만 같다. 


새벽 4시에 눈이 떠졌다.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9시-10시 사이에만 비 소식이 없다. 천왕봉은 가는 길은 어제보다 구름커튼이 더 두터워졌다. 눈앞에 바람에 따라 안개가 뭉쳐졌다. 종주자들은 이미 출발했다. 가득 찼던 대피소가 헐렁해져 있다. 올라올 때 3시간 반 만에 왔으니 내려가는 길도 금방이다.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비바람에 체온을 뺏겼다. 아침을 안 먹고 빨리 하산할까 하다가 날씨 때문에 든든하게 먹고 출발하기로 했다. 배 비 오기 전에 도착하고 싶지만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다. 날씨는 어쩌지 못하지만 몸 상태는 조절해 볼 여지가 있다. 


태풍이 남에서 북으로 북상 중이라 하산길에 바람이 없었다. 걷기 시작하면 열이 나고 땀이 금방 차니 얼른 아이의 우비를 벗기고 잠바도 벗겼다. 변한 상황에 맞게 복장을 다시 정비하고 출발했다. 내려가는 길에 남편은 아이에게 주목나무를 찾아 알려준다. 살아서 백 년, 죽어서 천년을 산다는 주목나무를 소개하며 고향 산소에 할아버지가 심어 놓은 자리들을 알려준다. 구면인 아는 길 따라가며 편안한지 의식 따라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남편은 지리산 노래도 불렀다가 빨치산에 대한 이야기도 아이에게 들려준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는 시원하고 걷기 좋았다. 반달가슴곰을 조심하라는 팻말 따라 갑자기 곰이나 멧돼지를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지, 어디로 피할 것인가로 열띤 토론을 하며 빠르게 하산했다.  


두 시간 내려오니 소지봉이다. 대피소에서 2.5km를 왔고 백무동까지 3.0km가 남았다. 이제부터 급강하 구간이다. 길이 젖어 있어 다리에 힘을 주며 걸었더니 후들거린다. 아들은 빨리 가서 게임을 하겠다며 속도를 낸다. 두 시간이면 내려가겠다며 호언장담하던 남편과 아들이 나 때문에 느리다고 성화를 시작한다. 사진도 찍고 천천히 가고 싶어 둘을 먼저 보냈다. 결국 나는 올라갈 때만큼 시간이 걸렸다. 아빠가 잘 운전하려면 점심 먹으며 충전해야 한다며 식당에 들렀다. 오늘은 휴게소 떡볶이 대신 오리고기다. 


오늘 산행으로 천왕봉까지 양방향에서 올라봤다. 입구에 지도를 보니 중간에 음정으로 올라와 장터목으로 능선 따라갈 수도 있다. 난이도가 둘째도 갈 수 있어 보인다. 하산 길에 '반달 가슴곰’에 꽂힌 아들은 곰이 겨울잠을 자는 시기와 먹이가 충분해 사람 다니는 길까지 내려오지 않는 여름에만 오겠다고 한다. 각족들 각자 자기대로의 지리산을 품고 도시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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