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문정 Aug 19. 2019

19일: 스타벅스(Starbucks)

이방인들을 위한 도시 속 거점지

아지트 놀이

마닐라에서 세 번째로 맞이하는 월요일, 다시 일상이 시작되었다. 비교적 순조로운 집시와 메이의 수업은 규칙적으로 진행되었다. 부부는 불가피한 교통정체의 이유를 제외하고 수업시간에 늦거나 일정을 변경하는 일이 없었다. 고맙게도 아이와의 단기 영어 과외수업을 책임감 있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영어수업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 6회로 매일 4시간에서 5시간씩 오전과 오후 두 번에 나누어하는 중이다. 아이가 수업을 힘들어할 만도 한데 의외로 잘 적응하면서 영어를 배워나가고 있다. 특히 집시의 영어 수업을 늘 기다리고 좋아한다.


하루 일과를 마친 아이에게 저녁시간에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더니 집 앞에 있는 스타벅스에 가자고 한다. 밖은 비가 내리다 말다를 반복하고 있는 데다가 조금 귀찮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는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한다. (도대체 네가 언제부터 카페를 다녔었니?) 잠시 후 우리는 집 앞 스타벅스 창가 자리에 앉아 각자의 시간을 즐겼다. 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아이는 특별히 먹고 싶은 게 없다며 따로 주문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이의 목적은 무엇인가를 마시거나 먹는 데 있지 않는 듯했다. 와이파이로만 연결되는 구형 스마트폰으로 스타벅스 무료 와이파이에 접속한 뒤 간단한 게임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만끽하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게임은 집 안에서 하나 여기서 하나 똑같을 텐데, 왜 카페에 오자고 했어? 게다가 너는 뭘 먹거나 마시는 것도 아니잖아." 아이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여기 스타벅스만의 감성과 분위기가 있잖아. 난 그게 좋아." 이것이 초등학교 3학년 사내아이의 대답이었다.


스타벅스만의 감성과 분위기를 즐기는 아이


한국에서 스타벅스는 주로 누군가를 만날 때 약속 장소로 즐겨 이용할 뿐,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 찾는 곳은 아니다. 스타벅스의 커피 맛이 특별히 뛰어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지점에 따라서는 커피맛이 형편없을 때도 있기 때문에) 나에게 스타벅스는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 않는 무난한 '만남의 장'이다. 그러나 해외여행 도중에 스타벅스의 의미는 달라진다. 낯설기만 한 언어와 환경, 그리고 사소한 것까지 신경 써서 선택해야 하는 '결정 피로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안심할만한 아지트로 탈바꿈한다. 익숙한 인테리어와 잘 알고 있는 메뉴들이 이때만큼은 반갑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여기 필리핀 마닐라 도심에서도 한 두 블록마다 스타벅스 지점을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여행자들을 위한 그물망형 아지트로 삼기에 제격이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편히 앉아서 몸과 마음을 재정비하고 다시 모험을 떠날 채비를 할 수 있는 안심지대이다.


여행자들을 위한 그물망형 아지트


집시(Jipsy)

푸근한 인상의 집시는 낙천적인 성격을 지녔다. 그의 풍채로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음식을 좋아하고, 요리를 잘한다고 한다. 한때 파티용 베이커리를 주문받아 배달하는 작은 업체를 운영하기도 했다. 가장 좋아하는 일은 요리인데 현실적으로 가족을 부양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그 꿈을 접었다고 했다. 메이에게는 꼭 비밀이라고 하면서 집에서 모든 요리는 자신이 한다고 했다. (집시는 정말로 내가 이 이야기를 메이에게 전할까 봐 걱정했다.)


집시는 긍정적 에너지가 넘치고 대화하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가끔 아이의 수업 중간에도 나와 집시 사이에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갈 때가 많다. 집시는 일단 궁금한 게 생기면 바로 질문해서 답을 들어야 하는 성격인 듯했다. 특히 한국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다. 처음에는 케이팝과 한국요리로 시작한 질문들이 점차 한국의 기본 생활비나 원어민 영어 강사의 취업과 같은 질문들로 발전해 갔다. 해외 거주 경험이 많은 집시는 필리핀 마닐라가 아닌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말을 아끼기는 했지만, 마닐라에서의 삶은 그가 원하던 모습이 아닌 듯했다. 마흔 중반을 바라보는 나는 이제 스물여섯밖에 되지 않은 집시에게 많은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말해주었다.


유독 소통하기를 좋아하는 집시는 내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페이스북 계정으로 들어가 그간의 삶이 기록된 모든 사진을 하나하나 열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 덕에 나는 그의 알래스카에서의 선교 생활, 메이와의 연애, 모든 가족들, 그를 거쳐간 학생들, 그리고 현재 직장 동료들까지 다 알게 되었다. 그의 가족은 실로 방대했는데 현재는 이혼하신 부모님 사이에 형제자매가 다섯 명이 있고, 엄마 쪽으로 이복동생이 한 명, 아빠 쪽으로 이복동생이 두 명이 있다고 했다. 집시에게는 무려 여덟 명의 형제자매가 있었고 나는 그들 대부분을 사진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그 외에도 그는 살면서 겪은 재미있던 일들, 인상적이었던 사건들을 생각날 때마다 나에게 말해주었다. 집시는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을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사람이었다.


우연한 기회로 인연이 닿은 집시와 메이 부부는 그들이 바라는 최선의 삶을 위해 하루하루 노력하는 성실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삶을 찾아 고단한 인생의 항로를 잘 헤쳐 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그리고 그 소식을 앞으로도 전해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이전글 18일: 마인드 뮤지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