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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nysmo Nov 08. 2023

킴스 비디오, 그리고 노란 문

기억 속 나의 첫 수집품은
영화 팸플릿들이다.

멀티플렉스들이 서울의 이곳저곳 들어서던 즈음 극장에 가면 곧 개봉할, 혹은 한창 상영 중인 영화들의 전단지들이 극장 곳곳에 비치된 스탠드에 꽂혀 있었고 나는 매번 모든 영화들의 전단지들을 한 부씩 들고 와서 정성스럽게 클리어파일에 보관했다. 심지어 여러 장으로 제작된 전단지라면 가운데를 정성스럽게 찢어서 자연스럽게 클리어파일을 넘기며 팸플릿을 읽을 수 있도록 보관할 정도였다. 물론 그렇게 정성스럽게 모아서 책장에 꽂아놓은 클리어파일들을 다시 내가 들추어 보는 일은 절대 없었고 계속되는 이사 중 어느샌가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아마도 웬 쓰레기를 모아뒀다고 생각하신 어머니가 내다 버렸겠지.

수집과 보관에 대한 내 집착은 이후로도 꾸준히 발전해 즐겨 듣던 새벽녘 라디오 프로그램을 예약녹음해서 보관하기도 했고, 시리즈 소설은 반드시 전 권을, 동일한 판형으로 구입해야 마음이 편했다. 예를 들어, 1권부터 3권까지는 미국판 블룸스버리 출판사에서 나온 해리포터 책을, 4권에서 7권까지는 영국판 스콜라스틱에서 나온 판본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나중에 기어이 전 권을 스콜라스틱에서 나온 판본으로 다시 구매하기도 했다.

수집과 보관은 어쩌면, 좋아하는 것을 두고두고 즐기고 싶은 마음과 언젠가는 떠나가고야 말 것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집착에서 비롯된 것만 같다.

그리고 최근에 본, 어쩌면 감독의 영상 에세이에 가깝다고 느꼈던 영화를 보며 수집이 갖는 의미에 대해 다시금 느끼게 되는 계기가 있었다.

머나먼 VHS 시절, 뉴욕의 하위문화 속 한편을 차지했던 비디오 렌털 샵 '킴스 비디오'에 대한 개인의 노스탤지어에 대한 이야기인 것만 같았던 영화는 보다 더 깊은, 그리고 슬픈 주제로 흐름을 확장한다. 전 세계 각지의 의미 있는, 그러나 쉽사리 발견되고 상영될 수 없는 영화들을 큐레이션 한 이곳이 사실 민간 시네마테크와도 같은 역할을 해왔음을, 그리고 영화라는 것은 결국 상영되었을 때 본연의 가치를 얻게 된다는 것을 설파하는 영화였다.

어쩌면 열정적인 누군가가 수집하고 보관한 덕에, 누군가의 노력과 고민의 결실인 예술 작품들이 덧없이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서 살아남아, 먼지를 끌어안으면서 누군가에게 드러날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훌륭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산업의 논리 속에서 수지타산이 맞지 않을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선택받지 못한 채 버려진 작품들을 누군가는 소중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마음을 공감하는 누군가가 선뜻 나서서 카탈로깅한 엄청난 수의 해적판 비디오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애정을 표하는 영화를 보며 오묘한 생각이 들었다.

킴스비디오의 컬렉션을 매매의 대상으로 여겨본 적 없다. 내게 킴스비디오의 컬렉션은 라이브러리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교보재로 흔쾌히 내줄 수 있다. 내가 영화를 학교에서 공부할 때만 해도 영화를 구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 필람 할 영화가 학교에 있다 한들 대기 리스트에 늘 예닐곱 명이 포진해 있었다. 그런 어려움을 알기에 기꺼이 학교별로 3~4만 개의 컬렉션을 내어줄 수 있었다. ('킴스 비디오' 김용만 대표, [씨네 21] 인터뷰 중)

우리는 항상, 소위 K-콘텐츠가 지니는 경제적 가치를 추산하기 급급하고, 저작권자에 정당하고 공정한 보상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물론 영화/영상 산업이 가지는 의미와 성과, 그리고 그 성과가 산업에 기여하는 모두에게 공정하게 돌아가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 산업의 근간을 떠받들고 있는 것은 결국 영화/영상을 관람하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고 경험과 생각을 나누는 문화라는 것을 쉽사리 잊어버렸던 것은 아닐지.

그 뒤 보게 된, 90년대 시네필 집단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노란 문]에서도 해외 유명 작품들을 찾아 보관하고 모으는 집착이 드러난다. 비단 국내외 예술영화를 수급하는 것뿐 아니라 영화에 대한 해외 이론서들을 학교 앞 복사집에 구비된 불법 복제본을 통해 읽었던 그들.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고 더 알고 싶었고, 그리고 수줍게나마 그렇게 무언가를 알고 있는 자신들을 드러내며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과거를 회고하는 90년대 시네필의 모습을 보며, 되려 그 시기였기에 가능했던 문화였던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여러 유명한 작품들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널리 퍼지고 회자되는 정보들에 비해 인프라는 부족했기에 실제로 그 정보를 접하기는 어려웠던 시기. 그에 비해 지금은 많은 정보들이 도처에 널려 있고 그렇기에 모든 작품들을 당연하게 열람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존재한다.

문화는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소비의 대상이 되었고 주머니에서 꺼낸
몇 인치 남짓의 화면을 통해 손쉽게 즐길 수 있는 가깝고 친숙한 존재가 되었다

영화 [노란 문]은 영화를 바라보는 태도, 영화를 즐기는 방식 등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집단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를 막연하게 좋아하던 사람들이 모여서 나만 영화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구나, 나와 같은 취향을 공유할 수 있고 나의 마음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

한 편, 이런 연대가 지금 2020년대에 가능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물론 대면을 초월하는 기술에 힘입어 많은 연결고리가 생겨나고, 문화를 공유하는 커뮤니티들도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집단에 대한 피로감과 반발 또한 팽배한 시대다. 촛불의 물결이 되고자 하는 열망과 무대 위 하나의 조명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혼재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모두가 각자의 생각과 관점을 갖고 사회 속의 파편이 되어 살아가고, 120분 이상의 영화보다도 120초 남짓의 숏폼 영상이 더 주목받으며, 웬만한 이야기도 머무르지 못한 채 휘발되어 사라지는 시대에, [킴스 비디오]와 [노란 문]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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