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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 Oct 11. 2015

#001. 로드무비

이제는 보인다

석원아, 너한테 할 말 있어. 나… 너 사랑해도 되냐?

중2병.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시절을 일컫는 말이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허세가 '중2병'의 기본 증상 중 하나인데 돌이켜 보니 나도 이 병을 심각하게 앓던 시절이 있었다. 내 취향은 당연히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라야 했다. 남들이 동방신기에 열광할 때 크라잉넛의 제대를 기다렸고, 친구들이 인수분해 공식을 외울 때 홀로 기타 코드를 연습했다. 귀여니 소설에 코웃음 치면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읽었다. 난해한 것일수록 찬양하고 열광했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모두 수준 낮은 것으로 치부하는 흑백논리로 가득 찬 잔인한 열다섯이었다.


내가 <로드무비>를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당시의 기억으로 이 영화는 불쾌하고 어두웠다. 정신지체로 보이는 만삭의 노숙자가 헬렐레 팔렐레 돌아다니다가 깊은 밤 역사 안에서 피 흘리며 진통하는 모습, 그를 도와주기는커녕 쳐다보지도 않는 주변 노숙자의 시선이 충격적이었을 뿐이다. <로드무비>는 분명 나와 다른 것의 범주에 속하는 영화였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서 나는 어느덧 20대가 됐다. 키가 크는 것처럼 당연하게 이뤄지리라 생각했던 모든 것이 나를 비켜갔다. 꿈도, 대학도 모두 높은 현실의 벽 건너편에 있었다. 스무 살이 되면 나도 현실의 벽만큼 커져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으리라 믿었건만, 일찌감치 성장을 멈춘 내 키와는 다르게 벽은 나날이 두껍고 차가워져 갔다. 그리하여 '근자감'으로 충만했던 시절이 부러워질 때 즈음, 문득 <로드무비>가 떠올랐다. 거의 공포영화를 보는 수준으로 두렵게 봤던 것 같은데, 무슨 내용이더라?


십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다시 본 영화는, 사랑 이야기였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석원(정찬)과 길에서 거칠게 살아가는 대식(황정민)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 어릴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 특히 아파서 썩어 문드러져 가는 대식의 속마음이 비로소 보였다. 그는 한때 전도유망한 산악인이었다. 누군가 그 시절을 물으면 버럭 화를 내지만, 그의 겉옷 안주머니에는 산 사진이 소중하게 들어 있다.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그리움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안다. 나도 어린 시절부터 배우를 꿈꿔왔다. 지금은 꿈을 내려놓았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은 애틋함은 지워지지가 않는다. 대식 또한 스스로 꿈을 포기하고 방랑의 길로 들어설 만큼 아픈 상처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대식 앞에 찾아온 사랑은 참으로 지독해서 이미 아픈 사람을 더 아프게 만든다. 


열다섯의 내가 이것을 사랑이라고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영화가 그들의 여행을 마냥 낭만적으로 포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모든 상황을 가장 최악으로 밀어 넣는다. 아름다운 색으로 감싸지 않은 검은 알맹이는 현실이었고, 그 벽의 높이를 실감했을 때만 또렷하게 보이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이 열다섯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은 사람이면서도 결국 같은 사람이 아닌 이유일 것이다.


2012-08-11 

학생리포터 활동 당시 첫 칼럼. 

내 글이 지면 한켠을 고스란히 차지한다는 것은 참 영광스럽고 가슴 벅찬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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