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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Gwon Mar 20. 2024

선생님, 저 왜 살리려고 하세요?

웰다잉 인터뷰

오늘 비가 내렸는데 수현이가(가명) 떠올랐다. 의대 방학 중에 어느 대학병원 정신과에서 서브인턴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소아 병동에서 만난 아이였다. 비 내리는 날씨를 좋아한다 했다. 이유를 물으니 ‘저를 망가뜨리는 거잖아요.’ 했다. 아이는 음악을 좋아하고 스스로 작사 작곡도 했다. 아이는 우울증이 있었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해서 입원한 상태였다. 학업 스트레스가 심했고 진로 고민이 깊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어릴 때 나도 인생이 답답하고 공부가 다인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다양한 가능성이 보이더라는 것, 주어진 것에 집중해서 그때그때를 살다 보면 새로운 길이 나타난다는 것, 좋아하는 일을 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는 것, 너만의 시각과 감성이 멋지다는 것, 너나 나나 민감한 사람은 하나를 배워도 깊게 깨닫기 때문에 시간은 우리 편이고 경험과 시간이 쌓일수록 스스로가 점점 마음에 들 것이라 했다. 


'듣고 나니 어때?' 물어보니 아이는 희미하게 웃으며 '멋있어요. 여러 힘든 일 겪고 이렇게 잘 되셨잖아요.'라고 했다. 그런데 이게 아닌데 싶었다. 내가 원했던 반응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내가 잘났단 말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아이에게 도움 되리라 생각한 말을 쏟아내면서 내심 아이가 감동받고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길 바랐던 것이다. 나도 너와 다르지 않으므로 너 또한 너의 장점을 깨닫길, 죽음만이 답이라는 생각은 근시안적 생각임을 어렴풋이나마 알길 바랐다. 그런데 멋있어요 라니. 나와 그 아이 사이에 선이 느껴졌다. ‘(선생님은) 멋있어요. (그런데 저는 아닌 것 같아요.)’라고 들렸다. 아차 싶었다. 내 말을 들은 그 아이가 해야 하는 반응은 이미 내 안에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나의 일방적인 퍼부음은 아니었을까. 내가 건넨 위로는 나를 위한 것이었을까 아이를 위한 것이었을까. 나보고 멋있다던 그 말이 진심이긴 했을까.  


2주일 동안 매일 보다가 마지막 날이 되었다. 헤어지는 인사 때 수현이가 내게 그동안 즐거웠고 고마웠다고 해주었는데 내가 오히려 고마웠다. 그리고 안도했다. 수현이의 말이 진심이길 바라는 것은 욕심일 수 있지만, 나와의 시간을 적어도 겉으로나마 즐겁고 고마웠다고 해주어서. 주말에 나도 집에 가서 수현이가 그리울 것 같다 했다.  그리고 비 내리는 주말인 지금 나는 그 아이를 떠올리고 있다. 이런 말도 해줄걸, 저런 말도 해줄걸 하는 생각이 자꾸 스친다. 하지만 그 또한 그저 내 일방적인 말이 될까 봐. 살았으면 좋겠다는 이 내 마음이 행여 의사로서 내 이기심일 뿐이고 진심으로 그 아이의 삶을 위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스스로에게 들었다. 다시 수현이를 만난다면 어떻게 도와야 할까?


수현이를 만난 정신과 실습 당시 어느 암환자분이 자살 위험이 있어 정신과로 협진의뢰가 왔다. 80대 대장암 말기 할아버지셨는데 암 덩어리 때문에 항문으로 정상적인 배변을 못하셔서 배에 구멍을 내어 대변 주머니를 달고 계셨다. 장맛비가 여러 차례 왔다. 장이 마비되면 코에서 위로 이어지는 고무 콧줄을 넣는다. 그럼에도 장 마비가 낫지 않아서 배가 많이 아프다고 하시고 배가 빵빵한 느낌 때문에 불편해하셨다. 콧줄도 불편해서 스스로 콧줄을 수차례 뽑으셨다. 작년까지만 해도 농장운영을 다 하시고 건강하셨는데 치질인 줄 알고 병원에 가셨다가 그 길로 이렇게 됐다고 하셨다. 지금은 일상생활을 거의 못하시는 상태였다. 그때 병원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셨다. 레지던트 선생님께 할아버지는 두 손을 싹싹 빌면서 거듭 말씀하셨다. 젊은 사람도 아니고 나이 80인 노인이 이렇게 빈다며 그냥 죽게 해달라고. 이렇게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라고. 고향에 가기만 하면 뛰어 내려서 극단적 선택을 할 거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레지던트 선생님은 ‘대변주머니 달고 수술하고 나서 지금 상태가 힘드시군요. 저희 정신과에서 약으로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을 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하셨다. 글쎄, 딱 집어서 무엇이 문제라고 할 순 없었지만 더 나은 대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


병원 실습을 나가보면 응급실에 자살을 시도한 사람이 많이 왔다. 이번이 처음이 아닌 사람도 꽤 있었고, 목숨은 살렸지만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게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의료진뿐만 아니라 국가에서도 큰 예산을 들여가며 자살률을 낮추려는 노력을 한다. 그런데 그들을 살리려는 노력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았다. 이번에 살려도 또 죽으려고 할까 봐, 어설프게 살려놔서 오히려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게 될까 봐 걱정스러웠다. 살리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무조건 살려야 한다는 것이 억지스러웠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하는 사람을 왜 살려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너무 당연하게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이다.’고 여기는 것이 폭력적으로 다가왔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텐데 근본적인 해결을 해주지도 못하면서 가혹한 상황은 그대로 두고 이유 막론 살리고 보는 것은 오만하고 무책임하다고 생각이 들 수도 있지 않을까? 


이번 인터뷰와 해외 실습 전에 정신과 학생 실습을 하면서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했던 환자분과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분이 처한 현실은 내가 들어도 숨 쉴 구멍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의사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셔야 한다고 설득해야 하는데 함부로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내게 뚜렷한 생각이 서있지 않아서 환자를 설득할 수가 없었다. 예비 의사로서 인간이 살아야 할 이유를 고민해 보았다. 그런데 꼭 삶에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걸까. 살 이유가 없으면 죽어도 되는 것인가. 살아갈 이유가 없더라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가. 가만 보면 석가모니 말씀대로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다들 삶을 끝낼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아가고, 살기 위해 끊임없이 음식을 구해 먹어야 하는 실존적 고통을 겪어내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탄생을 선물로 여기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에게 탄생은 오히려 부담하지 않을 수 없는 짐이었고,  고된 세상살이를 물려주는 것이었다. 존재의 목적은 우리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을 뻔했음을 깨닫는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럼에도, 왜 살아가는가? 


   "살. 린. 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린다!"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의사가 외치는 대사이다. 극 중에서 한석규 배우가 의사였는데 살리기 어려운 환자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힘 있게 다짐하는 장면이었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을 여럿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무조건 환자를 살리겠다는 그 드라마 대사에 마음이 한동안 머물렀다. 무조건 살아야 한다는 말이 과연 그분들의 마음에 가서 닿을 수 있을까. 내 앞에 있는 그분들께 ‘그래, 한 번 살아보자.’라는 생각이 스며들기 위해선 내가 먼저 한 인간이자 한 의사로서 왜 생명이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지 고민해야 했다.


일본 S대학병원 정신과에서 말기 암환자를 주로 보시는 O교수님은 자살의 원인이 외로움 때문이라고 하셨다. 힘들더라도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면 인간은 고통을 참아낸다고 하셨다.  그에 비해 외로울 때는 쉽사리 인생이 무의미하고 허무하다고 느낀다. 이에 대해 미국 완화의학 전문의 L은 삶의 허무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삶에는 행복하고 따뜻한 것만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어딘가에서는 갈등도 있고 실패도 있다. 왜 이렇게 삶이 힘든지에 대해 고민하기보다 그것이 현실이고 정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이다. 삶은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해야 하고 서로 도우며 짧게나마 행복한 순간이 있으면 그 시간을 최대한 누려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일본의 O교수님께서 알려주신 ‘Negative capability(불확실성을 견디는 힘)’와도 일맥상통했다. 세상은 정의롭고 따뜻하고 행복해야만 한다는 생각의 틀이 완고하면 삶의 변화와 불확실성에 적응하지 못하고 쉽게 꺾여버리는 것이다. 불확실성을 견디는 힘은 약한 존재끼리의 연대에서 나온다. 우리는 함께함으로써 불확실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고, 죽음을 앞두었을 때에도 서로를 바라보며 잘 살아왔노라고 웃을 수 있다. 마음 깊이 함께하는 것이 바로 잘 사는 것의 핵심이자, 잘 죽는 것의 핵심이자, 자살 예방의 핵심이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의 또 다른 특징은 삶에서 기대할 것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중시하는 심리치료인 로고테라피(Logotherapy)에 따르면 세상은 여전히 그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고, 그들도 세상에서 무언가 기대할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는 삶의 의미가 자녀이다. 부모의 자리를 대신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또 다른 사람에게 삶의 의미는 사람이 아닌 일이기도 하다. 정성을 다해 쓴 책을 아직 완성하지 못한 상태라면 그 책은 누군가 대신 써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자신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살아야 한다는 책임과 삶의 의미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을 느낀다. 그 사람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고, 그래서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여기서 생각이 좀 더 나아갔다. 그렇다면 되돌릴 수 없는 뇌 손상으로 의식이 없거나 식물인간인 경우에는 다른 사람과 연결됨을 느끼지 못하고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 없으므로 안락사가 정당한 것일까? 누워서 생각도 할 수 없는 삶이라도 그 삶에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일본의 O교수님께서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환자 상태가 인간답지 못한 듯 보이더라도 그 과정을 겪으며 최선을 다했다고 느끼면 환자 사망 후 유가족이 애도반응에서 건강하게 회복할 수 있다고 하셨다. 환자뿐 아니라 그와 연결된 사람들도 중요하다. 환자 본인에게 무의미할지 몰라도 그와 연결된 사람에게는 그와 함께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 시간이 충분히 가치 있기 때문이다. 일본 완화의료 아버지라 불리는 의사 쿠니히코 이시타니 선생님은 이번 인터뷰에서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에는 자신을 위한 의무뿐 아니라 나와 연결된 사람을 위한 의무도 포함된다.’고 하셨다. 또한 일본의 O교수님께서는 누워서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삶이라 하더라도 살고 싶어 하는 분들이 분명히 있다고 하셨다. 집을 꾸밀 생각에 설레하던 사지마비 루게릭 환자분이 떠올랐다. 신체가 불편하다고 해서 그분이 삶을 비관할 것이라 함부로 속단했었다. 이런 편견이 나치즘의 우생학과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고 많이 부끄러웠고 반성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안락사에 긍정적인 의사도 만났다. 안락사가 합법인 캐나다 출신의 완화의학 전문의 C는 캐나다 호스피스 기관에서 15년 임상경험이 있고 영국 호스피스 기관에서도 10여 년 임상경험이 있었다. 캐나다는 다른 나라에 비해 안락사를 넓게 허용해 주는 편이다. 의사 C는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하는 오해가 바로 환자들이 안락사를 원하는 이유는 통증 같은 증상이 심해서 라는 생각이라고 했다. 그래서 적절한 완화의료를 통해 신체 증상을 조절한다면 환자들이 안락사를 원하지 않을 거라고 흔히 생각하는데, 사실 존재론적 문제가 가장 큰 이유라고 했다. 통증이 잘 조절되더라도 환자 스스로 삶이 무가치하다고 느끼거나 가족에게 더 부담을 주기 싫어서 안락사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캐나다에서는 이미 충분히 양질의 완화의료를 제공하지만 그럼에도 안락사 비율이 매년 높아지는 것을 보면 완화의료의 질과 안락사 선택은 별개라고 짚었다. 캐나다에서 안락사가 합법화된 배경에는 의료형평성도 작용했다. 부자나 거동이 가능한 사람은 유일하게 외국인 안락사도 허용하는 스위스에 가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전신 마비로 거동을 하지 못하거나 가난한 사람은 스위스에서 안락사를 하고 싶어도 죽음을 선택하지 못한다. 마지막 모습을 선택하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삶이 끝날 것 같을 때, 위험한 방법으로 목숨을 끊으려 하기도 한다. 살고 싶지 않다고 해서 이러한 고통이 강요되면 안 되며, 그 고통이 불평등하게 주어지는 것도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안락사를 시행하게 된 근거였다.


하지만 안락사가 남용될 위험이 큰 것도 사실이다. 진정 환자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의사나 가족들이 지쳐서 환자에게 안락사를 종용한 케이스도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특히 개인주의가 강한 서구사회에 비해 가족을 중시하는 한국에서는 더욱 안락사 남용 위험이 크다. 신체나 정신이 불편한 사람은 고통스러우니까 빨리 죽는 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은 장애인은 열등하고 특정 유전자는 우월하다고 여기는 나치즘과 민족주의적 성향과 다르지 않다. 거만하고 편협한 생각이다. 안락사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사회적 논의도 충분히 필요하고 인간에 대한 믿음 또한 많이 필요하다.


만약 다시, 환자가 죽고 싶다며 왜 살아야 하냐고 묻는다면 앵무새처럼 자살은 무조건 안된다고 함부로 반대하기 전에 자살을 생각할 만큼 힘들었을 상대를 헤아려보는 노력을 우선 할 것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철학자들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삶과 죽음을 다루는 의사라면 마음에 담아서 두고두고 나름의 인생관과 죽음관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잘 죽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잘 사는 것이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이고, 왜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연결된다. 따라서 잘 죽는 것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도 많아져서 자살률도 낮아질 것이다. 각자 고유한 삶의 의미가 있고 그것을 찾는 것이 인생의 숙제이다. 환자가 아직 그 의미를 찾지 못했다면 찾을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것이 의료인과 주변 사람들의 역할이다. 환자는 어쩌면 지금 너무 지친 나머지 삶의 의미를 찾을 힘조차 없어서 죽고 싶어 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살아갈 이유를 찾기 위한 첫걸음은 삶은 고통스럽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나아가야 함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을 강조하신 여러 교수님의 말씀에서 생명의 힘을 느꼈다. 어느 책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삶의 유한성에서 나온다.’는 글귀를 읽었다. 올림픽 선수의 노력이 가치 있는 이유는 육체의 한계가 있음에도 그것을 넘으려는 피나는 노력 때문이다. 인간의 한계는 인간의 노력을 위대한 것으로 만든다. 언젠가 죽는다는 삶의 유한성이 있기 때문에 한정된 시간 안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노력이 가치 있다. 니체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작가인 니체는 루 살로메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가 배신당해 헤어졌다.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쓰면서 니체는 루 살로메와 함께한 시간을 돌아본다. 니체는 루 살로메로 인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함께한 시간 동안 니체는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을 느꼈다. 삶의 가장 찬란했던 그 순간을 반복하기 위해서라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마저 기꺼이 되풀이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니체는 차라투스트라가 되어 큰 소리로 외친다. 고통스럽고도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말이기도 하다.


“그것이 삶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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