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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Gwon Sep 09. 2024

아픈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것은(feat. 돌봄)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 신성아 지음


'돌봄'이라는 키워드를 각인시켜 준 책

고령인구가 많아지면서 돌봄에 대한 수요가 급증할 것이다. 그 수요에 비해 제대로 된 돌봄의 공급은 부족하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돌봄의 중요성을 아무리 들어도 마음에까지 와닿진 않았다. 왜 제대로 된 돌봄이 어려운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돌봄을 수요만큼 충분히 제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며 '돌봄'이라는 키워드가 마음에 제대로 박혔다.


가족 여행을 계획하며 일상을 살던 엄마가 갑작스럽게 초등학생 딸 윤이의 백혈병 진단을 받은 후로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감성팔이 책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현실이라 마음을 저몄다. 병원 다인실에서는 커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자는 입에 밥을 넣고 있는데, 옆자리 사람은 소변통에 오줌을 눈다. 플라스틱 소변통에 소변 떨어지는 소리에, 환자복 바지를 내리고 올리는 소리까지 다 들린다. 아무 기척도 없이 갑자기 병상 커튼을 확 젖히며 의사가 들어오기도 하고, 복도 멀리서 간호사가 오늘 똥 쌌냐고 큰 소리로 묻기도 한다. 저자는 "굴욕적이다. 생사를 다투는 투쟁의 현장에서 가장 먼저 파괴되는 것이 인간의 존엄이다."라고 했다. 병원에서 환자는 다면적인 인격과 스토리를 가진 한 사람이 아니라 질병으로 인식된다. 저자는 현대의학에 노동은 있을지언정 마음은 없다고 했다.


저자는 돌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가사노동보다도 돌봄 노동이 더 평가절하되어 있다고 꼬집는다. 돌봄은 인류의 생존에 필수적임에도 성별균형도 심하게 맞지 않고, 모성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여성이 돌보는 것을 당연시 여기며, 돌봄 노동의 양과 강도는 측정되지도 않는다. 돌봄은 훌륭하고도 창의적이며 능동적인 일이다. 약자를 존중하면서도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윤리와 고도의 전문적 능력과 이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매들린 번팅의 말을 빌려 저자는 돌봄이 미래에 인공지능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가장 창의적인 일이라고 한다. 또한 돌봄은 결코 본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힘주어 말한다.


의사로서 환자가 질병에서 회복할 수 있도록 도우려면 환자의 질병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다. 환자가 질병을 경험하면서 가장 연약할 때 가장 오래 접촉하는 사람이 바로 돌봄 보호자이다. 돌봄 보호자가 어떤 태도로 환자를 대하는지가 환자 회복에 큰 영향을 끼친다. 심지어 환자가 아이라면 더욱더. 돌봄 보호자에게서 짐짝 취급을 받는 환자와 소중한 존재로 대접받는 환자가 질병에 맞설 때의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돌봄 보호자에게 어떻게 환자를 함부로 대할 수 있냐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옛말이 왜 있겠는가. 건강한 사람도 돌봄을 맡아하다 보면 몸도 마음도 지쳐간다. 돌봄 보호자도 돌봄이 필요하다. 이 책에서는 간병이 꼭 갓난아기를 돌보는 것과 같다고 했다. '무력하면서도 전능'하다는 면에서 돌봄보호자와 갓난아기의 엄마는 같다. 아이를 잘 키우는 법에 대한 정보는 많은데 아픈 사람을 잘 돌보는 법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다. 돌봄 보호자가 환자를 돌보며 어떤 어려움을 겪는지 알아내어 이를 해결해 준다면, 돌봄 보호자의 번아웃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돌봄 보호자가 건강해야 환자도 더 잘 회복할 것이다. 엄마가 건강해야 아이도 잘 크는 것처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저자는 돌봄이 곧 사랑이라고 했다. 그리고 저자가 정의하는 사랑이란 상대의 필요를 내 필요보다 중시하는 것이다. 즉, 나보다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사랑이다. 이 정의는 더 나아가 상대의 고통(passion)까지도 함께하는(com) 것, 바로 compassion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조건 없는 돌봄이 바로 compassion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살면서 compassion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마음을 다해 상대를 돌보고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다른 이에게 그것을 돌려주게 된다 한다. 저자의 돌봄은 윤이의 치료 성과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윤이도 투병과정에서 돌봄을 경험함으로써 아이와 저자의 삶에 compassion이 스며들어 진가를 발휘하길 바란다고 했다.


문득, 나는 사랑이란 것을 해보았나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아니.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힘들 때에도 함께하며 조건 없이 상대를 돌본 적이..... 없다. 엄마처럼 나를 키워준 외할머니께서 보고 싶다고 언제 오느냐고 하실 때에도 이번 시험만 끝나고 갈게요, 이번 바쁜 일만 지나면 갈게요 하다가 외할머니 장례식에도 가지 못하고 묘지에서야 뵈었다. 내 가족을 돌보지 못하는 동안 병원에서 일하며 남의 가족을 돌보았다고 변명해 보아도, 다시는 외할머니를 뵐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외할머니께서 내가 필요하다며 내민 손을 외면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가족을 외면하면서까지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본 것은 진정 제대로 된 돌봄이긴 했는가? 병원은 마음보다는 노동으로 지탱된다는 문장에서 잠시 멈추었다. 딴에는 최선이었지만 환자와 보호자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어린 의사로서 그들에게 상처를 준 적도 분명히 있었다. 환자에 대한 배려보다 내 일을 빨리 마치는 것이 우선일 때가 분명히 있었다. 가족을 대할 때에도, 환자를 대할 때에도 내가 먼저였는데, 연인을 대할 때에는 더더욱 내가 먼저였다. 그렇게 사랑과 배려를 받아오기만 했으면서도 사랑을 주는 즐거움을, 사랑을 주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내가 먼저 배려할 때에는 되돌려 받을 생각을 했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다행히도 과거의 나를 반성할 줄 알게 되었다. 예전엔 내가 받은 상처만 생각했는데, 사랑에 서툰 나로 인해 상대가 받았을 상처가 조금은 이해가 된다.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저자의 말을 가만히 곱씹어본다.

여자라는 이유로

아이가 백혈병이라는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당연히 엄마가 간병인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아이가 백혈병이라고 진단받았을 때, 맞벌이로 경제적 능력이 충분했음에도 엄마인 저자에게 부양과 돌봄 중에 선택할 권리는 없었다. 돌봄은 엄마만의 의무가 아니라 부모의 의무임에도, 아이를 돌보는 의무를 다른 이와 나눌 수 있냐고 묻는 것 자체가 죄스러웠다고 했다. 간병을 하면서도 남편은 저자에게 간병의 피로를 달래주긴 했어도, 일을 그만두어 느낄 고립감과 초조함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고 했다. 맞벌이를 하면서도 아무도 '엄마는 우리 가족을 위해 돈 버느라 많이 바빠.'라든가 '엄마에게 중요한 시기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자'라고 아이에게 엄마를 변호해주지 않았다. 직장에서는 엄마라는 정체성이 일에 조금이라도 타격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를 썼다. 저자는 "모성은 당연히 본능이 아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뭐지 이 당당함은? 그 문장에 한참 머물렀다. "만약 모성이 본능이라면 이렇게 많은 임신 육아교실이 성행할 이유가 없다." 그저 본능을 따라가면 될 테니까. 저자는 "돌봄은 모성에서 뿌리내린 것도 아니"라고도 한다. 모성은 돌봄으로만 증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엄마의 돌봄 노동은 당연하지 않다.


그렇다면 저자가 아이를 돌보는 마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저자는 아이에 대한 감정이 "상호호혜적인 사랑"이라고 한다. 저자가 아이를 돌보는 것은 모성 신화에서 등 떠밀려 나온 헌신이 아니라 아이에 대한 의리라고 한다. 일방향인 것도 아니라고 했다. 다른 그 누구에게서도 아이가 저자에게 주는 사랑 같은 것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며, 아이에게서 받은 계산 없이 과분한 사랑에 저자는 시간과 자유를 기꺼이 희생하는 것이라고 했다. 돌봄은 가장 인간적인 특성이라고 하면서 메들린 번팅이란 사람의 말을 인용했다. 돌보는 마음은 "누군가의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꿋꿋하게 직면하고 버티면서 슬픔을 함께 나누고 변함없이 곁에 있어주고 신체 및 신체의 배설물로 엉망진창이 물리적 현실을 기꺼이 다루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사회적 인식이 변해야

남편이 돌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은 돌봄을 개인에게 떠맡기는 사회 구조라고 했다. 가족이 아니면, 아무리 실질적인 보호자라도 병원에서 동의서나 의료 처치 여부를 결정할 때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가족이 없는 사람은 아플 때 누가 돌봐주냐고 저자는 묻는다. 돌보는 마음의 가치를 인정하고 더 귀하게 여길 수 있도록 '생활동반자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이 돌보고, 돌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는 저자의 말대로 돌봄에 대한 평가가 정당하게 이뤄질 때에 비로소 집단적 변화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돌봄을 개인에게 떠맡기고 있음은 입원 병동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는 환자 침대 옆에 간병인 침대가 있다. 일부 중증 질환은 간병인이 없으면 입원을 못하기도 한다. 가족 중에 누군가 입원을 하면 다른 가족이나 전문간병인이 환자 옆에 있어야 할 때가 많다. 그런데 미국과 영국, 일본을 포함한 선진국에서는 대부분 간호간병통합병동을 운영한다. 간병을 간호사 선생님들이 맡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일본 병원 실습 때에 간병인 침대가 따로 없어서 보호자들은 어디서 지내냐고 여쭤보니, 일본 교수님은 당연하다는 듯 가족도 본인의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느냐며 간호사 선생님들이 간병까지 담당한다고 하셨다. 물론 그 때문에 일본에서 간호사는 힘든 직업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간호사 구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간호사 선생님들의 돌봄 노동의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이리라. 책에서는 선진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다른 돌봄 정책도 몇 가지 소개했다. 스위스는 가족 간병도 노동으로 인정해서 급여를 준다. 일본에서는 지역사회 돌봄을 활성화하기 위해 돌봄 화폐를 시행하고 있다. 후레아이 키푸(Caring Relationship Tickets)라고 부르는데, 평소 노인을 돌보아 시간 점수를 쌓았다가, 본인이 나이가 들었을 때 상환받거나,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 선물하거나, 현금으로 환급받을 수도 있다. 이러한 제도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돌봄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돌봄이 필요한 대표적인 대상은 노인이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인용하여 인간의 생동하는 삶을 위한 조건으로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를 꼽았다. 노인도 사회에 소속되어 생동하는 삶을 누리려면 일을 통해 관계라는 가치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저자는 노인을 '노인유치원처럼 퇴행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라벨을 붙여 공동체에서 분리'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좋은 일'을 노인이 할 수 있도록 사회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집에 계시는 것보다야 나와서 뭐라도 하시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은 노인의 삶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모두는 노인 노동자가 되는 만큼, 노인의 삶과 일에도 관심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다가올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인 소통과 논의도 필요하다.


돌봄이 필요한 또 다른 대표적인 대상은 소아이다. 그중에서도 이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대상은 윤이와 같은 소아환자들이다. 소아환자의 교육권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아픈 아이도 다른 아이들처럼 배우고, 성장할 권리가 있다. 이 교육권이 제대로 보장되어야 이후 사회로의 복귀도 수월하다. 건강한 아이들에 비해 아픈 아이들은 보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심리치료와 개별 맞춤 교육과정이 필요하다. 그나마 서울 대형상급병원에는 병원학교가 생겼지만 여전히 지방에서는 접근이 어렵고, 그나마 있는 곳에서도 중학교 이상의 학업을 이어나가기는 어렵다. 윤이의 컨디션에 따라 온라인 수업과 정상등교를 병행할 수 있는지 학교에 문의하니 신경 쓸 것이 많아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했다. 아픈 아이를 위한 시스템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저자는 학교에서 아픈 학생들을 위한 개별 과제-피드백 방식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구절벽 위기를 눈앞에 둔 만큼 단 한 명의 아이도 정부는 포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니 더욱 아픈 아이들의 교육권에 관심이 필요하다.


Unhelpful Support

웰다잉에 관심이 많아서 일본에 정신종양학(암환자의 정신건강을 다루는 분야) 실습을 갔었다. 정신종양학에서는 말기 환자의 가족과 유가족도 중요하게 다룬다. 그분들이 진료를 보러 오셔서 하소연하는 것이 바로 일반인들의 잘못된 위로로 힘들다는 것이었다. 배우자가 먼저 죽은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만나보라고 한다든지, 아이가 먼저 죽은 부모에게 다른 아이를 낳아보라고 한다든지 등등. 위로라고 건네는 말이 날카롭게 유가족을 할퀸다. 이런 것을 "Unhelpful Support"라고 한다.


이 책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나온다. 백혈병에 걸린 아이는 항암제 독성 때문에 머리가 빠지거나, 피부가 지나치게 희거나 검거나, 배가 나왔다든지, 발진이 있다거나 한 경우가 많다. 평범하지 않은 모습에 사람들은 한 번 더 쳐다보고, 응원이랍시고 '머리가 반짝반짝하네'라든지,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배가 귀엽게 볼록 나왔네' 같은 말을 던진다. 어른의 외모를 함부로 평가하면 안 된다고 알면서도, 아이에게는 왜 똑같이 예의를 갖추지 않는 것인가. 아이도 다 아는데. 저자는 시선이 가더라도 오래 눈을 두지 말고 다른 아이들을 대하듯 자연스럽게 굴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언젠가 소아암 생존자들이 다시 사회에 돌아왔을 때 위축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런 시선을 거두고 환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물론 악의를 갖고 하는 말은 아니었겠지만, 진정으로 상대에게 힘이 되고 싶다면 그분들이 어떤 말에 상처받을 수 있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약자들이 어떤 것을 불편 해하는지에 대해 일반인을 대상으로 교육이 필요하다.


저자는 레슬리 제이미슨의 말을 인용하며 공감을 강조했다. 공감은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상대가 고통에서 회복하기를 기원한다고 표현하는 것으로 완성되므로 공감은 신중하게 상상력이 필요한 일이라고 했다. 이러한 공감은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내는 데에 수반되는 갈등을 줄이므로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공감의 경제에서 얻을 이익은 아주 크다고 했다.


그동안 돌봄 보호자에 대한 생각은 많이 하지 못했다. 하루종일 환자를 보는 사람이니 내가 환자를 파악할 때 환자 상태를 물어볼 수 있는 사람 정도였다. 그런데 이 책 덕분에 돌봄 보호자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는 환자를 만날 때 그 옆의 보호자에게도 눈길이 갈 것이다. 보호자를 이해하고, 보호자와 환자의 관계를 이해한다면 환자라는 사람을 좀 더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돌봄에 대해 개인의 인식 변화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적인 인식의 변화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목소리를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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