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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짐니 Mar 18. 2016

1. 딸기 소주

스무 살, 딸기 소주 같았던 그녀의 첫사랑


근래에 과일소주 폭풍이 주류 업계를 휩쓸고 지나갔다. 익숙한 초록병에 노오란 뚜껑을 달고 나왔던 유자부터 시작해 자몽, 블루베리, 석류 등 달콤하고 달달한 소주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오늘 다룰 주(酒)님은 초록병에 담긴 과일향 소주보다 앞서 내 마음을 흔들어 놓으며 조금 특별한 추억을 선사해준 '딸기 소주'이다.



사실 내가 말하는 딸기 소주는 현재 유통업계에서 시판되는 소주 종류는 아니다. 나의 스무 살 시절엔 소주에 과일 시럽 혹은 생과일을 갈아 넣은 과일소주가 주점에 많았다.(지금도 있는 것 같긴 하다) 딸기 소주는 술이 약한 나의 친구 '치치'가 즐겨 먹던 술이다. 그냥 소주는 너무 써서 못 먹겠다는 그녀에게 아이들 감기약처럼 달달한 '딸기 소주'는 홀짝 거리기 좋은 술이었다. 술을 좋아하는 나와 치치가 만나면 늘 작은 안주 하나에 일반소주 1병과 딸기 소주 제일 작은 것을 시켜놓고, 홀짝 거리며 어른 흉내를 내곤 했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이쯤에서 느꼈으리라. '딸기 소주'에 얽힌 특별한 경험은 치치와 관련된 이야기라는 것을-





스무 살, 치치는 신기한 연애를 시작했다. 생의 처음으로 나간 소개팅 자리에서 첫사랑을 만나 서로 첫 눈에 반하는 사랑! '치치'는 그 남자와의 만남을 이렇게 표현하곤 했다. '정말 귀에서 종이 울렸어! 종이 울렸다니깐? 이게 사랑인가 봐. 어떻게 해. 세상이 온통 행복해 보여!' 치치와 벨보이(종을 울리게 만들었으니 앞으로 이 남자를 벨보이로 칭하겠다-). 두 선남선녀는 정말 예쁘게 사랑을 시작했고 참 잘 어울렸었다. 풋풋한 대학생 커플 답게 대학가를 걸으며 와플 한 조각을 나눠 먹던 소소한 데이트에 진심으로 행복해했던 치치였다.


고작 두 번 만나고 벨보이에 대해 다 파악할 순 없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벨보이는 꽤 괜찮은 친구였다. 치치의 생일날 나와 모의해 서프라이즈 파티를 열고, 치치가 친구랑 카페에 있을 때 홀연히 나타나 커피와 빵을 사주고 사라지던- 여심을 알면서도 사랑에 순수한 그런 남자였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막연하게 치치와 벨보이는 결국 결혼할 운명이란 생각을 했었다. 변하지 않는 사랑을 직접 보고 싶기도 했고, 정말로 이 둘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치치가 나와 만나 마시는 '딸기 소주'의 양이 점차 늘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내 걱정스러운 물음에 입을 꾹- 닫았던 치치는, 평소에 배가 되는 술을 먹고 나서야 고민을 털어놓았다.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벨보이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다고 했다. 짝사랑만 주야장천 해봤을 뿐 제대로 된 연애의 경험이 전무했던 스무 살의 나는 덩달아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걔가 널 안 사랑할 수가 있어? 그건 말도 안 돼!'라고 그녀를 위로했지만, 치치는 확고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치치가 느꼈던 충격은 우리가 연애하며 느끼는 일반적인 감정의 흐름 중 하나였다. 일반적인 연애 사이클. 맹목적으로 사랑에 목매었던 남자가 그녀와의 사랑을 뒤로 하고 하나하나 자신의 삶을 다시 박스에 주워 담기 시작한 때였다. 심지어 벨보이는 스무 살, 하고 싶은 것이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은 나이였다. 벨보이로부터 연락이 줄었고, 만남의 횟수도 줄었다고 했다. 사랑의 말도 줄어들었다고 했다. 치치는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마음으로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의 치치는 너무 어렸고, 모든 게 다 처음 겪는 당혹스러움 투성이인 감정이었으니까.


치치와 벨보이의 다투는 일이 잦아졌다. 치치는 집착했고, 벨보이는 불안한 치치를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노력은 했지만 그 미미한 노력은 치치의 기대치에 부합하지 못했던 것 같다. 외유내강이었던 치치의 우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되자 친구로서 벨보이가 미웠지만 차마 헤어짐을 종용하진 못했다. 그 둘은 특별한 운명으로 얽힌 사이라고 확신했으니까. 하지만 결국 유난히 봄바람이 따스했던 어느 날, 우리는 그녀의 첫사랑이 사실은 다른 이들이 이별을 마주하는 그 수순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인정했다. 치치는 보내야 할 때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헤어질 용기가 없다고 했다. 다시 이런 사랑을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불안감과 아직은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있다고 했다. 갈팡질팡 위태로운 결정의 선에서 홀로 외로이 줄타기를 하고 있는 그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심심한 위로뿐이었다.




손가락을 잘라야 해.
그럼 서서히 조금씩 베어내는 게 나을까?
아니면 한 번에 자르고 아물기를 기다리는 게 나을까.



치치는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비웠다. 다음 날, 치치는 손가락을 한 번에 잘라내기 위해 벨보이를 만났다. 그와 그녀는 처음 만난 그 카페에서 서로에게 이별은 건넸고, 서로의 잘린 손가락의 아픔을 마주 보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별했고 하나의 첫사랑이 끝났다.


치치를 보며 스무 살 때 이런 생각을 했었다. 사랑이란 게 참 딸기 소주 같구나. 처음엔 강렬한 붉은색에 매혹되고, 이끌림을 참지 못해 입술을 가져다 대면 퍼지는 달콤한 맛에 중독되는 것이 사랑의 시작과 참 닮아 있다. 한잔 두 잔 마시다 보면 어느새 내 주량의 역치를 훌쩍 넘어 헤롱헤롱 나를 잃은 채 우주를 떠돌게 되는 상태. 그렇게 잠시 꿈을 꾸고 눈을 뜨면 밀려오는 극심한 숙취의 고통. 사랑이 시작되고 끝나는 그 순간이 오롯하게 담겨있었다.  



지금은 스물일곱 살이 된 치치와 나는 아직도 종종 만나 술잔을 기울인다(더 이상 딸기 소주를 즐기지 않지만). 하지만 가끔 곱창에 자몽 소주를 곁들일 때나, 대학가를 지나치며 그때 그 술집을 볼 때면 스무 살 딸기 소주를 기울이던 우리가 그립다. 가끔은 스무 살에 반짝반짝 빛났던 치치의 사랑이 문득 떠오른다. 처음이라 참 아팠지만 씩씩하게 그 순간을 극복했던 치치. 딸기 소주에는 그렇게 스무 살의 첫사랑이 담겨 있었다.


참, 당연히 치치의 사랑은 벨보이가 끝이 아니었다. 새로운 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맛의 사랑을 했고 하는 중이다. 치치는 앞으로도 이별에 아플지도 모르지만 또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것이다. 숙취가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는 다짐을 할 만큼 큰 고통을 몰고 와도 며칠 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술병을 따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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