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향을 이해하며 획일주의에서 벗어날 힘을 찾았다
오랜만에 9시에 잠들고 4시에 일어나는 요 며칠을 보냈다.
들리는 거라곤 가끔 우는 곤충 소리, 바스락거리는 이불 소리. 그리고 칠흑같이 어두운 그 새벽 시간을 나는 참 좋아한다. 특히 어두워서 형체가 거의 보이지 않을 때, 화장실로 걸어가는 소리 하나만 사각사각거리고 치약 뚜껑 따는 소리가 샴페인 터트리는 소리만큼 크게 들리는 그 고요함이 느껴지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이런 상황에서 마음 편안해하는지 몰랐다.
오히려 생각이 너무 뛰어다니고 한 번에 하고 싶은 게 많아서 충동적이고 산만하고 결정을 잘 짓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중을 하기 위해 항상 음악을 틀어놔야 했고, 일부러 태스크를 많이 부여해서 그 부담을 이용해서 몰아붙이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래서 나는 채도가 높은 화려한 색깔을 좋아하는 줄 알았고 활발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건 여전히 일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게 지내는 동안 나는 끈기가 없다며, 몰입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자책을 매 순간 했던 것 같다. 내 책장에 꽂혀있는 책에는 때로는 나를 이해하기 위해, 때로는 "왜 나는 이렇지, 왜 적응을 못하지, 왜 집중을 못하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훌륭한, 정상적인'사람에 해당되지 않는 내 특성을 다그치고 바꿔보려던 시도들의 흔적이 남겨져있다. 그래서 책장 부분 부분을 보고 있으면 각각의 시절들이 떠오른다.
'그냥 간단하게 생각해. 인생 뭐 없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라는 이야기를 수시로 들었다.
그때는 그 말이 맞다고 아무렇지 않게 넘겼지만 실은 살갗이 스치는 찰과상이 누적되어 아팠다 .
'그게 안 돼서 이러고 있는 건데 저렇게 쉽고 단순하게 대부분 사람들이 실천하며 사는 것을 못하는 나는 무능하고 의지가 박약해서 맨날 거절하는 법, 경계를 세우는 법, 심리학책을 읽으면서 지내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들을수록 '왜 어떤 부분 때문에 힘든지 알아보기도 전에 자기가 먼저 결론부터 내리고 처방하지? 왜 단언하지?'에 대한 반감도 컸다.
그런 나날이 반복되면서 '말해봤자 나는 별종이고 이해받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본모습은 숨기고 무난하고 입방아에 오르지 않을 목표와 모습들을 내세워 일상을 보내게 되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일반적이지 않은' 특성은 고쳐야 한다고 많이들 이야기하고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거다, 성숙하지 못한 거다'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상대에게 먹히도록 위협을 많이 한다.
'생각이 많으면 안 좋아, 현인들은 다 심플해, 단순해야 성공해'
'혼자 살면 불행해, 도전하면 불행해, 너무 예민해, 그거 허상이야, 남들 다 하는 거 제 때 하는 게 좋아, 그냥 넘겨, 나중에 후회한다?'
그 과정에서 당사자는 자기가 부정당하는 경험을 계속해서 하게 된다. '나는 잘못된 사람이구나, 나의 이런 특성은 잘못된 거구나.' 어느 순간까지 나도 그런 잘못된 것을 고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잘못 됐으면 좋은 방향으로 고치는 게 맞고 그건 좋은 거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르게 말하면 나는 내내 스스로를 '하자 있는 사람'이라 인식하게 돼서 나는 고쳐야지만 마땅한 사람. 지금의 나는 개선되지 못한 문제 있는 사람으로 나 자신을 포지셔닝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 새벽 오랜만에 혼자 조용한 시간을 보내며 내 책장을 다시 훑어봤다. 어떤 부분은 지금 봐도 쓰라리고, 어떤 반짝거리던 시절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아주 오랜 시간 나는 '나의 잘못된 특성'을 고치려 부단히 노력했던, 좋게 보면 자신을 단련시키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내 궤적을 보면 나는 생각이 많았기 때문에 '인지심리학'이라는 분야에 이끌려 선택하게 되었고, 거절을 잘 못하고 생각이 산발적이고 경계 세우는 걸 어려워해서 '의사결정'과 '범주, 분류'라는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게 되었다. 혼내고 잘라내려고만 했던 특성이 시간이 흐르고 보니 나를 만들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지만 사람은 타고난 특성과 기질이 유전적이다라고 대부분 이야기할 만큼 사람들은 각각 타고나는 자기 스펙이 있다. HSP(hyper sensitive person)라고 소위 말하는 예민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20%인 소리가 70%처럼 들리고, 그건 말의 강도도 그렇게 느낀다. 크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거절을 하거나 결정 내리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은 의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감각의 역치가 낮은 것에서 파생된 복합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니 내 특성이 보편적이지 않다고 잘라내고 없앨 것이 아니라 타고난 강한 특성을 어떻게 컨트롤시킬 것이냐에 집중하는 것이지 '그건 나빠, 별나'라고 부정하고 고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도 심심찮게 재단하고 판단하며 '보편적인 기준'에 준하지 않는다며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다.
하지만 나의 신체적, 심리적 특성을 이해하고 내가 편안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서 조금 별난 선택처럼 보여도 그런 삶을 조금씩 살아가기 시작했다. 9시에 자고 4시에 일어나는 것도, 강도 높은 의사결정처럼 느껴질 때 패닉될게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춰서 완충하는 방법도 모두 이런 과정에서 나올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음악을 듣지만 다르게 듣고, 같은 하늘을 보지만 다른 파란색으로 본다.
각자 원하는 삶이 다른 모습일 것이고 상식도 다를 것이다.
그러니까 ‘해, 하지마’보다 ‘어떻게 하고 싶은지, 왜 그런지’ 물어보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며 다른걸 그냥 다르게, 각각 예쁘게 봐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