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주제를 모르는 회사의 썩어 문드러진 채용
나는 문과를 졸업하고 N 년 간 취준 밭에서 구르다 뒤늦게 이공계열 기술을 배워 중소기업에 취직을 했다. 지금 회사에 오고 싶어서 온 것은 당연히 아니고, 여기저기 지원서를 뿌리고 다니다 얻어걸린 회사 중 하나다. 나는 지금 회사에 붙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실무진 면접과 임원진 면접을 봤는데 둘 다 분위기가 그렇게 좋진 않았다.
첫 질문이 '결혼했나요?'였다. 설명 끝.
나 : 저는 이 회사가 간절합니다. 열심히 할 자신 있습니다.
그 : 그런 말은 누구나 한다.
나 : (???)
그 : 우리 회사는 XX 씨가 생각하는 그런 멋진 일을 하지 않는다.
나 : 그런 것 기대 안 한다. 차근차근 배워서 천천히 미래를 결정할 거다.
그 : 우리 회사에서 가르쳐 놓으면 다 딴 데 가더라.
나 : (어쩔..?)
그 : 질문 있냐.
나 : 없다.
그 : 왜 없냐.
나 : 제가 궁금한 건 실무 면접 때 이미 다 들었다.
그 : 보통 면접자들은 질문 열 몇 개씩 한다. XX 씨는 간절하지 않은 것 같다.
나 : 그렇다기보단 연봉, 복지, 팀 구성, 하는 일 등 필요한 걸 이미 다 들었기 때문이고 나도 회사에 많이 바라지 않기 때문에 묻지 않는 거다. 다른 면접에서도 이랬다.
그 : XX 씨가 잘됐으면 하는 마음에 하는 말인데 면접에서 질문이 없다는 건 좋은 게 아니다. XX 씨가 다른 데 가서 면접을 보더라도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
다른 면접관 : XX 씨. 얼른 더 어필해봐!
나 : 그렇게 보였냐, 죄송하다. 말씀하신 대로 제 준비가 부족했다. 근데 저 열심히 일할 자신은 있다.
그 : XX 씨.. 나쁜 뜻이 아니라 고집이 있는 것 같다.
나 : (;;;;)
내가 임원진이 원하는 만큼의 준비를 안 해간 것, 맞다. 회사가 하는 일이 특수해서 서칭을 해도 암기가 잘 되질 않았다. 회사 규모도 작아서 회사에 대한 정보를 찾기 어렵기도 했다.
물론 이건 다 핑계다. 난 회사의 채용 공고에 적힌 연봉을 보며 면접 준비를 열정적으로 할 필요를 못 느꼈다. 여기는 붙어도 그만 안 붙어도 그만인 회사라 생각했다. 면접을 보고서도 일말의 후회가 없었다. 회사도 내가 성에 안찼겠지만 나도 회사가 성에 차지 않았다. 썩은 연봉, 구시대적인 질문과 내 말 하나하나를 트집 잡는 태도. 나를 괴롭히고 깎아내리면서 회사의 가치를 높이려는 태도가 싫었다. 나는 부족했지만 겸손했고 차분하게 나를 잘 어필했다. 회사는 그러지 않았다. 면접 보고 나서도 기분이 더러워서 한참 동안 면접관 욕을 하고 다녔다.
면접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탈락을 예상했다. 그러나 나는 며칠 있다 합격 통보를 받게 된다. '나를 왜..?'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밥벌이가 급했기 때문에 과거의 분노를 모두 잊고 기쁜 마음으로 출근을 택했다. X발 그때 도망쳤어야 했는데.. 면접날 나는 택시에 카드를 두고 내려서 집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어야 했는데 그게 하늘이 준 신호였지 싶다.
회사가 나를 뽑은 이유는 간단했다. 이 거지 같은 회사에 오겠다고 하는 신입이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입사한 뒤에 신입 채용 공고를 몇 번 더 올렸는데도 회사에 신입은 뽑히지 않았다. 지원서가 들어오지 않거나, 면접을 당일 취소한다거나, 무례한 태도를 보인 지원자를 탈락시키거나 하는 식으로 신입 채용은 번번이 무산됐다. 나는 밥벌이가 급해서 한 푼이라도 감사히 받겠다는 마음이었지만, 우리 회사 연봉은 굉장히 짠 편이다. 동종 업계에 비해 낮다는 말은 못 하겠다. 왜냐면 이 업계가 썩어 빠져서 사람을 싸게 막 쓰고 제 발로 쫓기듯 나가게 하는 걸 밥 먹듯이 하는 업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입이 뽑히지 않는 와중에도 회사는 이왕이면 전공자를 뽑고 싶다는 소리를 한다.
- 우리 회사가 너무 간절해서 회사 홈페이지에 있는 회사의 주력 상품 정보를 꿰고 있어야 하고
- 다른 회사가 아닌 우리 회사인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 전공자여야 하고
- 2021년 기준 20대 중후반 평균 연봉에 한참 못 미치는 연봉(식대, 야근수당 포함)에 만족하고
- 잘 배워서 이직하지 않는
등신 호구 머저리 같은 유니콘 신입사원을 원하는 것이다.
비단 우리 회사만 이런 것 같진 않다. 회사들은.. 왜 이렇게 건방질까? 청년들은 하나 같이 똑똑하고 최소 영어 성적 하나는 쥐고 회사 문을 두드리는데 왜 우당탕탕 엉망진창 굴러가는 회사 따위들이 푼돈에 이 인재들을 부리고 싶어 하는 걸까. 회사에 신입이 안 뽑히는 이유, 부족한 애들만 지원하는 이유, 붙여놨더니 도망가는 이유.. 모두가 회사가 구려서라는 걸 회사만 몰라!
가끔 나는 회사가 신입을 뽑을 의지가 없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지금 있는 사원들을 충분히 잘 갈아 넣으면 굳이 신입을 뽑아서 돈을 더 들이거나 교육하지 않아도 회사가 굴러가기 때문이다. 내 생각이 맞았다. 이 얘기는 천천히 하기로 하자...
* 원래는 이 글의 제목을 '지 주제를 모르는 회사' 혹은 '썩어 문드러진 채용' 등으로 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고 나는 쫄보여서 내 정체가 탄로 날까 두렵기 때문에 무난하고 착한 제목을 택했다.
* 열받아서 부제목을 결국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