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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빈 Feb 01. 2024

관심법으로 보아하니

Part 2. 에디터 : 데이터 수집형 마감 중독 인간



  선배, 휴무 때는 뭐 하실 거예요?

  나? 글 쓰려고.


  후배의 얼굴에서 욕이 들렸다. 한 달 내내 글자에 갇혀 허덕여 놓고 마감이 끝나자마자 또 쓴다고? 방금 글자는 쳐다보기도 싫다고 했잖아.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스스로를 쓰는 병 말기라고 진단 내렸다. 사진에 미친 사람들과 일하면서 상대적으로 정상인의 범주에 속해 보여서 그렇지 사실 나는 씀에 있어서는 ‘도른자’ 이상 체급이다. 오죽하면 남편이 나를 두고 스스로 마감을 만들며 지옥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이라고 할까. 남편은 덧붙여 글쓰기는 내게 허락된 유일한 합법적 마약이라고 단언했다.


  쓰는 병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시작점엔 인터넷 소설이 있다. 나는 이미 초등학교 때 반 친구들을 상대로 인터넷 소설가로 활동했다. 오전 내내 팔이 저리도록 공책 몇 장을 가득 채워놓으면 오후께 옆반 친구들까지 공책을 한바탕 돌려 읽고는 내일은 꼭 다음 이야기를 내놓으라 성화였다. 양방향 글쓰기는 파릇파릇한 위장에도 위장장애를 선사했다. 다만 친구들이 글을 읽다가 눈시울을 붉히거나 입꼬리가 쓰윽 올라가는 순간을 관찰하다 보면 실시간으로 달리는 좋아요와 댓글 못지않은 짜릿함이 있었다. 애독자를 동력으로 삼는 일은 즐거웠지만 고통스러웠고, 고통스러웠지만 또 즐거웠다. 이때부터 나는 이미 마감 중독의 길에 들어선 불나방이었다.


  한 번은 함께 하교하던 친구가 물어왔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글을 써내느냐고. 쉬는 시간에 옆반 친구와 나눈 대화에서 힌트를 얻어 소설의 다음 대목을 이렇게 저렇게 구상하며 걷고 있던 차였다. 내가 얼굴에 물음표를 그리고 쳐다보자 친구는 “나는 어려운데 너는 쉬워 보여서”하고 덧붙였다. 쉽다고? 당시엔 공책이 각 반을 돌아다니는 오후부터 그날밤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 순간까지 매일 몇 가지 이야기가 내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나가주지 않았다. 밀린 방값을 언제 주겠다, 이렇다 할 답을 주지 않고 피해 다니는 악덕 세입자와 씨름하듯 내 내면은 내내 전투를 벌였다. 아 졸린데 대충 내일 생각나는 대로 쓸까. 아니다. 쓰고 싶은 대로 썼다간 누군가 말도 안 되는 글이라고 소문을 낼 거야. 그 길로 나는 독자를 잃겠지. 


  애들이 좋아했던 대목을 읽고 또 읽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지쳐 잠들던 나날이었다. 오전동안 팔이 떨어져라 써 내려가는 행위는 단지 어제부터 머릿속에서 뒤엉켜버린 몇 가지 생각을 가지런히 빗어 이야기가 되도록 정돈하는 단계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좀 억울했다. 궁예처럼 모두의 생각을 꿰뚫어 보는 관심법이라도 쓴다면 매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고민하며 밤잠 설칠 일은 없을 텐데. 초등학생의 어휘력으로는 이 내면의 치열함을 표현할 길이 없어 친구에게 그런가, 하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 뒤로 나를 두고 타고났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말도 안 돼! 그저 사람들의 호에 호기심이 많은 데이터 수집형 관찰 변태일 뿐인 걸. 그리고 이건 고작 하위 호환형 동네배 인터넷 소설이라고.


  결혼을 앞두고 본가의 낡은 책장을 정리하며 그때 쓴 소설을 꺼내 읽은 적이 있다. 어디선가 본 이야기 여러 개가 잘 버무려져 K-아침 드라마 같은 막장을 방불케 했다. 자음과 기호로 이루어진 인터넷 소설 특유의 이모티콘은 또 어떻고. 부끄러움에 공책을 재빠르게 분리수거해 버렸지만 그 시간에서의 배움은 컸다. 이후로 나는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보다 누군가를 위해 쓰여야 하는 이야기에 끌리는, 데이터 수집형 쓰기 인간이 됐으니까. 내 관심법은 궁예와 달리 관심과 관찰로부터 출발했다. 글의 주제나 이야기의 방향을 정할 때는 물론이고 문단을 고민하고 단어 하나, 제목 한 줄을 택할 때도 주와 객이 모두 읽는 사람을 향해 있었다. 덕분에 무언가를 모의하고 본격적으로 제작하는 단계에 들어가기 앞서 데이터를 수집하는 일이 주 기능으로 작동했다. 연계된 부가 기능으로는 누군가의 관심이나 마음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촉과 귀담아 쓰기가 탑재됐다. 그야말로 읽는 사람이 원하는 톤에 맞춰 언제든 다른 페르소나를 자처하는 변화무쌍 쓰기 인간이 된 셈이다.


  에디터로 처음 단신 기사를 썼을 때 선배는 빨간펜을 들지 않았다. 대신 사무실 일층 편의점에 데려가 단 과자를 잔뜩 품에 안겨주며 사진 용어랑 찍는 법만 배우면 되겠네, 했다. 대학에서 소설, 시, 기사, 평론, 광고 카피, 시나리오 등 다양한 변신술을 익힌 시간이 한 몫했겠지만 정작 처음 쓰는 단신을 한 큐에 통과시킨 결정적 이유는 따로 있었다. 데이터 수집. 사무실에는 매거진 과월 호가 잔뜩 쌓여 있었고 신입에겐 합류하지 못한 마감이 끝날 때까지 오래도록 일이 주어지지 않았다. 매일 출근해 과월 호를 읽었다. 물론 내 첫 독자나 다름없던 데스크 선배의 기사 위주로. 첫 단신 기사가 주어졌을 땐 선배의 문단 구성, 문체를 그대로 따라 했고 취재 내용만 갈이해 썼다. 대학 4년이 키워 준 능력은 다름 아닌 잔머리와 관찰에서 비롯된 관심법이었다. 선배가 쥐어준 단 과자를 베어 물며 속으로 ‘관심법으로 보아하니-’를 외쳤다. 스스로 약았다고 생각했지만 내 관심법은 정적 제거가 목적인 궁예와 달리 공동의 목표인 독자를 위함이라 자위했다. 


  돌이켜 보면 에디터만 한 천직도 없었다. 에디터는 누군가의 취향으로부터 출발해 물음표를 해소시키거나 마음을 움직이는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취향이나 관심에 귀를 열고 면밀히 관찰해 글을 쓰는 일은 내 주특기고. 수습 딱지를 뗀 뒤로는 데이터 수집의 대상이 카메라 매거진 독자인 사진 덕후, 장비 덕후로 바뀌었다. 다만 에디터의 언어는 직접 쓴 글에 국한되지 않았다. 플레이어가 돼 사진을 찍고 글을 쓰기도 했지만 그와 비례하게 사진과 글에 참여하지 않는, 컨트롤 타워가 되는 경우의 수도 늘어갔다. 비주얼이 매거진의 주요 키고 이를 위해 전문가와의 협업은 불가피했으니까.


  컨트롤 타워의 주된 역할은 효율 추구와 빠른 판단이었다. 콘텐츠를 기획하고 나면 이 글을 직접 쓸까, 전문가에게 맡길까 하는 소소한 고민부터 시작해 어떤 전문가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어떤 형태로 콘텐츠를 꾸려갈까를 판단하고 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하릴없이 사진과 관련 있을 법한 사람이라면 죄다 만나 듣고, 콘텐츠를 담는 책의 꼴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무작정 유명 사진 촬영 포인트에 가서 사진을 찍으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아카데미나 사진전 오프닝에 찾아가 사람들 틈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가능하다면 작가의 작업 이야기를 들었고 그들과 협업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궁금한 부분에 대해 화두를 던지고 슬쩍 빠지며 담담하게 관조하는 사람, 그게 내 역할이었다. 에디터는 알아도 모르는 사람이 돼야 더 많은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으니까. 그때 만난 모든 사람이 든든한 동료가 돼 매번 새로운 데이터를 물어다 주는 어미새의 역할을 자처하기도 했다. 무형의 자산은 그렇게 쌓여갔다. 


  다방면의 데이터 수집에 고군분투하던 그즈음 사진, 카메라 관련 서적이 즐비하던 내 책장이 편집자의 비하인드가 담긴 에세이나 디자이너의 툴과 관련된 서적, 독보적인 콘텐츠를 선보이는 매거진으로 한바탕 물갈이를 했다. 독립 서점을 돌며 구입한 아트북은 때때로 책장 규격에 맞지 않아 책장 위로 쌓여갔다. 책장은 현재의 관심사를 대변한다고 했던가.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쓰고, 찍고, 만들고, 알리는 이 모든 게 에디터인 내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그렇게 쓰기 인간에게 매일같이 데이터 수집 디깅의 연쇄작용이 일었다.


  놀랍게도 에디터로서 데이터 수집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주니어 에디터에서 시니어 에디터로, 시니어 에디터에서 편집장으로, 그리고 다시 프리랜서 에디터로 위치가 변하는 동안 데이터를 수집해야 하는 상황은 계속해서 새로이 생겨났다. 이를 테면 클라이언트를 상대로 PT를 해야 하는 자리에 오르고 나서는 내 책장 한 켠에 설득의 기술이나 말하는 방법에 관한 서적이 늘었고, 아는 척의 근본인 벽돌 전공 서적이 빼곡한 책장을 비집고 들어왔다. 사진만큼 영상이 중요 콘텐츠가 된 뒤로는 찍는 시간보다 스토리보드를 짜거나 편집을 공부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때때로 콘텐츠를 고민하는 일보다 더 오랜 시간을 투자해 독특함과 가독성 사이를 넘나드는 책의 형태를 찾으려 발품을 팔러 다녔다. 


  이토록 얼굴이 변화무쌍한 직업이라니. 결국 오랜 에디터 생활 끝에 쓰는 병은 제작 병으로 번졌다. 글 외에 더 많은 표현의 도구를 가진 에디터로 성장하며 데이터 수집형 쓰기 인간이 데이터 수집형 제작 인간으로 진화한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언가 만들거리가 주어지면 인터넷 소설을 쓰던 초등학생처럼 내 머릿속엔 몇 가지 경우의 수가 똬리를 틀고 며칠이고 나가주지 않는다. 밥을 먹거나 집안일을 하다가, 책을 읽거나 SNS를 살펴보면서도 끊임없이 데이터를 수집한다. 모든 촉각이 그곳에만 집중돼 읽는 이를 향해 “관심법으로 보아하니-”를 외칠 수 있을 때까지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좋아하는 만큼 잘 해내고 싶으니까. 애독자를 동력으로 삼는 일은 즐겁지만 고통스럽고, 고통스럽지만 또 즐겁다. 언제까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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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에디터와 번역가, 남에게 취향을 팔기보단 매번 본인이 사기만 하는 전직 마케터가 풀어내는 디깅의, 디깅에 의한, 디깅을 위한 에세이. 디깅을 처음 시작하는 분, 다수가 인정하는 프로 덕질러, 이 장르 저 장르 최애는 없고 차애만 가득한 우리 옆집 사는 분까지 두루두루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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