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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진 Feb 08. 2024

기술 번역가를 아시나요?

Part 2. 번역가


  올해로 10년 차 번역가가 됐다. 대학교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작은 출판사에 입사해 번역 일을 하게 된 지 벌써 10년 째다. 우리 과 동기 중에 번역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번역 일을 10년쯤 하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스친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어를 전공한 사람 중에 번역이나 통역을 업으로 이어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비인기 전공과목이라 일찌감치 경영이나 홍보 과목을 복수 전공해 대기업 취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번역가가 됐을까?

10년째 소위 ‘박봉’을 받으면서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올해는 유독 스스로 반문하는 시간이 많았다. ‘10년 차’라는 수식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지만, ‘10년’이라는 무게는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 나아갈 날들 사이에서 종종 발길을 멈춰 서게 했다.

  

  일본어를 전공했지만 학부에서는 번역이나 통역의 기술을 알려주지 않는다. 대학원에 진학해 보다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방법도 있지만 나는 자원봉사를 시작으로 어시스턴트, 인턴 등을 거치며 실전에 부딪쳤다. 몇몇 영화제에서는 일본과 한국 바이어 사이에서 통역을 했고, 공연 프로덕션에 소속돼 일본 스태프 수십 명을 인솔하는 코디네이터도 경험했다. 일본어로 말하는 건 자신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통역 후에는 늘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하루종일 말하느라 목이 쉬거나 끼니를 챙기지 못하는 일도 허다했다. 때로 통역가는 말을 전달하는 사람인 동시에 이견을 중재하는 역할도 해야 했다. 내향형 인간인 내가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최대한 사람을 덜 만나고 혼자 책상에 앉아 몰두하는 번역 일이라면 왠지 적성에 맞을 것 같았다. 그렇게 번역가의 문을 두드렸다.

  

  돌이켜보면 지금 회사에 지원했던 계기는 ‘카메라 잡지를 만드는 출판사’였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카메라와 사진을 좋아했고 일본어를 공부하면서부터는 카메라와 사진에 대해 더 넓고 깊게 탐닉할 수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일이 직업이 된다는 생각에 입사가 결정됐을 때 무척이나 기뻤다. 입사 첫날부터 내 이름 대신 ‘이 기자’라는 직함으로 불렸다. 주요 업무는 일본에서 출간된 카메라 잡지의 한국판 라이선스 지를 만들기 위해 일본 기사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 그렇게 첫 명함에는 ‘번역 기자’라는 그럴싸한 직함도 새겨졌다. 카메라를 좋아하던 내가 카메라 잡지를 만드는 사람이 됐고, 게다가 일본어 전공도 살려서 일을 하고 있으니 마냥 해피엔딩 같은 이야기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카메라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등 기계적인 설명과 전문 용어가 난무하는 기사들은 일본어 전공자인 내게도 난도가 높았다. 전문지를 번역하는 일은 전문 용어를 공부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카메라와 사진 관련 전문 용어는 사전이나 네이버에 검색해도 정확한 뜻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신입이라도 명색이 전문지 번역가인데, 의역과 오역이 난무하는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를 참고하는 건 납득할 수 없었다. 스스로 찾은 방법은 일본 포털 사이트에 원문 용어를 검색해 일본어로 해당 용어의 뜻을 파악한 뒤 검색된 이미지들을 보면서 해당 용어가 정확히 어떤 기계 또는 기술을 나타내는지 알아냈다. 그리고 해당 용어의 영문명 또는 학명 등을 검색하고 그 영문명을 다시 한국 포털 사이트에서 재검색하는 방법으로 여러 번 의미를 확인했다. 그럼에도 정확히 들어맞는 용어가 없을 경우는 최대한 용어의 의미를 풀어쓰는 방식으로 선회했다. 번역에 있어서 번역가의 유창한 어휘력과 필력, 유연한 의역도 중요하지만 기술 번역가가 무엇보다 최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원문에 대한 정확한 팩트 체크다. 당시 사수가 내 초벌 번역을 검수하면서 해 주었던 말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원문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대강 번역하면, 읽는 사람도 절대 그 글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한 마디였다. 빨간 펜으로 난도질된 내 기사보다 그 말 한마디가 충격적으로 다가와 지금도 가슴에 새기고 있다. 수려한 어휘나 그럴싸한 문장으로 글을 꾸미기보다 정확하고 간결하게 원문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자 의무. 많은 배움과 깨달음 속에 우당탕 1년 차가 됐지만 카메라에 관한 기술 번역을 하면 할수록 내가 좋아하는 건 ‘카메라’라는 기계가 아닌 ‘카메라로 무언가를 찍는 행위‘, ‘그 행위의 과정과 결과’라는 것을 강하게 느꼈다. 디지털카메라 잡지를 만들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내 손에는 늘 필름카메라가 들려 있었고 남들은 출시일을 고대하는 신제품 카메라를, 먼저 받아서 만져 보고 써 봐도 크게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고작 1년 차에 호기롭게 사직서를 냈다.


카메라와 포스트잇이 난무하는 흔한 번역가의 책상.


다시 일해 보지 않을래?


  퇴사 후 약 1년이 지났을 무렵, 직장 선배에게서 전화 한 통이 왔다. 내 후임자로 왔던 사람이 갑자기 관두는 바람에 번역 업무에 구멍이 생겼고 급하게 사람이 필요하다는 연락이었다. 정확히는 내가 기존에 하던 번역 일을 외주로 의뢰하고 싶다고 했다. 사실 퇴사 후 번역과 무관한 일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젊은 나이였고 하고 싶은 것도 참 많았다. 일본으로 날아가 새 직장을 구할 계획도 있었지만 새로운 도전 대신 익숙한 안정을 선택했고, 다시 번역 일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새 직장을 구하기 전 ‘잠시만 해 보자’는 마음가짐이었지만 그 사이 결혼과 출산, 육아의 전장에서 고군분투하던 내게 프리랜서로 경력을 이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놓칠 이유가 없는 값진 기회였다.


  번역가로 다시 시작하면서 ‘책임감’이라는 단어를 되새겼다. 회사나 사수의 방패막 없이 온전히 내 이름 석 자로 짊어져야 하는 무게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카메라와 사진을 좋아하는 마음을 넘어서 풍부한 업계 지식과 정확한 정보 취합, 꼼꼼한 교정 작업까지. 체계적인 업무 프로세스는 물론 ‘마감 노동자’에게 가장 중요한 철저한 시간 엄수도 놓쳐선 안 된다. 번역가로 살다 보니 원래도 J(계획형) 인간이 일에서만큼 극 J가 되어 간다. 이러한 과정은 결코 단 시간에 숙련되지 않는다. 또한 어떤 번역이 더 옳고, 그르다는 기준도 모호하기에 계속해서 이 일에 도전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 그런 마음가짐 없이는 경력이 쌓일수록 일에 대한 회의와 괴로움만 커진다. 그러는 사이에 파파고와 챗GPT 같은 신기술은 끊임없이 등장했다. 2016년 네이버 파파고가 출시되면서, “10년 이내에 사라질 직업”에서 번역가는 늘 상위권을 차지했고 작년 챗GPT의 등장으로 내 안위를 걱정하는 장난스러운 안부도 많이 받게 됐다. 사실 나도 파파고를 애용한다. 번역가에게는 원활한 마감을 위한 효율성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보다 연차는 적지만(?) 파파고가 단시간에 쌓은 어마어마한 데이터베이스는, 아무리 짬이 많은 선배라도 따라갈 수 없다. 몇 년째 파파고를 옆에 두고 관찰해 보니 파파고는 원칙주의자다. 출발어를 육하원칙에 준거해 입력하면 도착어로 완벽하게 번역해 낸다. 그런데 융통성이 좀 없어서 띄어쓰기나 행갈이의 미묘한 차이에서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한다. 파파고의 기술력은 분명 위협적이지만 단어의 어감, 문맥의 흐름, 행과 행 사이의 숨은 맥락 등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는 그 방대한 데이터베이스가 오히려 방해 요인이 된다. 또한 번역의 완성도는 도착어의 어휘 실력에 좌우된다. 아무리 일본에 오래 살았거나 일본어를 오래 공부한 사람이라고 해도 국어(도착어)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결코 좋은 번역가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일본어 공부는 물론 국어 실력을 높이기 위한 훈련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독서를 비롯해 한국어로 된 다양한 글을 접하는 게 좋다. 때로는 유행어나 신조어에도 촉수를 세워야 한다. 또한 ‘말맛’이라고 하는 어투의 미묘한 뉘앙스까지 잘 구분해 구사해야 술술 읽히는 맛깔난 번역문을 완성할 수 있다. 아마 파파고는 쉬이 정복할 수 없을 일들이다. ‘역시 번역은 사람이 해야 제맛’이라며 얄팍한 안도감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


퇴사 후 프리랜서로 다시 일을 시작하던 날. 왠지 모를 책임감에 기록해 둔 사진.
우편으로 애독자 엽서가 오던 시절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여전히 이 일을 지속하게 하는 큰 동기다.


  10년간 번역을 하면서 깨달은 점은, 번역은 ‘글의 전달’을 넘어 ‘마음의 전달’이라는 것. 그 ‘마음의 전달’은 여전히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파파고는 원문 저자의 마음을 모른다. 그래서 글은 전달할 수 있어도, 마음까지 전달하지 못한다. 번역가는 저자의 글 너머에 숨은 마음을 해석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여전히 번역이 어렵다. 하지만 그 과정은 여전히 재미있다. 아마 20년, 30년, 40년이 지나도 내가 저자의 마음을 완벽히 해석한 글은 없을지 모르다. 그럼에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이유는 저자와 독자를, 생산자와 소비자를, 사람과 사람을 잇고 있다는 미약한 자부심 덕분이다. 어릴 적 학교에서 진로 검사를 하면 늘 내게 잘 맞는 직업 상위권에 사회 복지사 같은 직업이 있었다. ‘누군가를 돕는 일이 적성에 잘 맞는다’는 설명을 보고는 사람을 마주하는 것조차 일처럼 느끼는 내가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해 왔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보니 10년간 번역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지인이 일본어로 된 제품 설명서를 물어보거나 온라인상에서 누군가 일본어로 된 영상을 궁금해할 때면 여전히 발 벗고 나서서 알려주고 싶다. 가능하면 더 정확하게, 더 쉽게 알려주고 싶어서 나는 계속 이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적 허영심을 채우거나 잘난 체를 하는 것과는 다른 마음. 순수하게 나의 지식과 경험이 그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나는 서점에서 내 이름을 볼 일도, 내세울 만한 번역서도 없지만 누군가의 일상에 도움이 되는 번역을 한다. 그렇게 10년 차 번역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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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에디터와 번역가, 남에게 취향을 팔기보단 매번 본인이 사기만 하는 전직 마케터가 풀어내는 디깅의, 디깅에 의한, 디깅을 위한 에세이. 디깅을 처음 시작하는 분, 다수가 인정하는 프로 덕질러, 이 장르 저 장르 최애는 없고 차애만 가득한 우리 옆집 사는 분까지 두루두루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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