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레이 Feb 15. 2024

대학원에서 무언가를 꼭 써야 한다면

Part 3. 영화음악 : 그것이 논문은 아닐 거야



영화 <타이타닉>(1997)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어느 날 한 장의 CD를 받게 된다. 당시 영화는 포스트 프로덕션 단계에 진입한 터라 대부분의 큰 편집을 끝낸 상황이었고, 음악도 전반적인 녹음을 마치고 영화의 트랙에 함께 믹싱을 하고 있을 때였다. ‘스케치’라고 쓰인 CD를 본 카메론은 아마도 그것이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로즈(케이트 윈슬렛)를 그리는 스케칭 씬에 들어갈 음악이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하며 음악의 정확한 인 아웃 지점을 찾고 있었다. 음악감독이었던 제임스 호너의 차분한 피아노 선율로만 이루어진 ‘The Portrait’은 콩테를 든 잭의 손이 종이에 선을 긋는 시작과 함께 흘러나온다. 조금은 긴장한 듯한 그의 모습과, 오직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방 안의 분위기와 로즈에게 눈을 맞추는 순간 클로즈업 되는 완벽한 눈빛까지! 해당 장면에 모든 것이 정확히 짜 맞춘 듯 들어맞는 것을 확인한 카메론은 신이 나서 호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이를 들은 제임스 호너는 다소 의아한 반응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 곡은 그냥 간단히 스케치만 한 곡이라서 스케치라고 쓴 거야. 스케칭 씬이라니. 맙소사.. 나는 풀 편성의 오케스트라를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카메론의 고집은 꽤나 확고했다. 정 당신의 뜻이 그렇다면 런던 최고의 피아니스트를 불러 피아노만 다시 녹음을 진행하겠다고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카메론은 호너가 스케치만 한 해당 버전을 스케칭 씬에 기어이 사용하고 만 것이다.



     운이 좋게도 나는 학부를 졸업하기도 전에 영화음악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상업영화에 견줄 정도의 사이즈도 아니었고, 작은 상영관에서조차 스크리닝 기회가 없는 독립이나 졸업 작품들을 주로 맡아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영화는 늘 동경의 대상이었고, 과정은 힘들겠지만 매체 음악을 작업하는 것이 학원에서 레슨으로 연명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냐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작곡 전공 지망생들이 유재하 같은 싱어송라이터의 감성을 장착하고 입시장에서 씨름할 때 나는 영상을 함께 준비해서 시험을 치렀고, 그렇게 합격한 학교에서 ‘영상음악 잘하는 애’라는 꼬리표를 졸업 때까지 달고 다녔으니 머지않아 순풍에 돛 단 듯 풍요롭게 입봉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막상 작업을 해보니 정작 힘들었던 것은 곡을 쓰는 순간이 아닌 감독과의 아리송한 커뮤니케이션이었다.


“방금 지나간 선율이 좀 뜨거웠던 것 같은데 이 부분 더 차갑게 만들어 줄 수 있나요?”

     버디무비에 스토리에 한스짐머처럼 해달라는 말도 안 되는 레퍼런스를 들고 온 감독은 나를 좌절시키다 못해 두 달 내내 스트레스성 위염을 달고 살게 만들었다. 여기가 미용실도 아니고, 왜들 그렇게 뭔가를 들고 와서 똑같이 해 달라고 하는 건지. 음악을 교육받지 않은 이들에게 절대적인 요구를 들어주면서도 왜 여기서는 이런 분위기의 곡을 쓰면 안 되는 것인지를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하고 설득하려니 기운이 쭉쭉 빠지다 못해 집에 오면 저녁도 먹지 못한 채 그냥 잠드는 날이 많았다. 비슷한 사건들이 계속되다 보니 다음 미팅을 앞두고는 당장 내일이라도 지구가 멸망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부정적인 생각이 또 생각을 만든다고 ‘아 나는 그다지 이 일에 재능이 없구나’라는 결론을 스스로 짓고 말았다. 나름의 노하우가 아주 조금 생길 때 즈음, 나는 영화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회사에 지원해 콘텐츠 제작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도망치듯 들어간 회사에서 처음 맡은 업무는 소속 아티스트의 다양한 활동 소식을 SNS 채널에 발행할 이미지와 카드뉴스 디자인을 하는 것이었다. 미술에 재능은 없지만 디자인 툴은 입사 전부터 다룰 줄 알았고, 레퍼런스나 가이드가 확실히 정해지면 이와 비슷한 풍의 A안과 그를 변형한 B, C안은 수월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은 영화 쪽 일을 하다 왔다고 하니 그럼 짧은 티저 촬영을 해 보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나왔고, 마다하지 않고 매달렸더니 나중에는 편집까지 전부 다 하게 됐다. 규모가 작은 회사의 장점이자 동시에 단점인 것이다. 회사의 입장에서는 할 줄 아는 직원이 있으니 외주 인건비를 줄일 수 있어서 좋고,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해야 할 일이 늘어나지만 잘만 이용하면 그것이 곧 나의 포트폴리오가 된다.


     간단한 제작 보조로 시작한 경험이 경력이 되어 이듬해 나는 조금 더 규모가 큰 회사로 이직을 했다. 그리고 두 번째 회사에서는 대형 프로젝트의 메인 PM을 맡을 수 있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훗날 나를 외주로 먹고살게 한 기획과 디자인, 촬영과 편집 기술은 모두 그때 익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행히도 첫 번 째 회사에서 장기간 임금 미지급으로 두 번째 회사를 퇴사하는 순간까지 긴 싸움이 이어졌고, 그동안 출근 해서는 정신없는 업무를, 퇴근 후엔 없던 정신을 보듬을 상담 치료를 병행하느라 체중이 7kg이나 빠졌다. 자세한 사연을 모르는 이들은 요즘 다이어트 하냐며 물었고, 엄마는 2N년 이상 보기 어려웠던 나의 턱선이 도드라졌다며 좋아했다. 그해 말 밀린 정산과 함께 스트레스의 원흉이 사라졌다. 무언가를 해 냈다는 작은 성취감과 함께 밤이면 찾아오는 공허한 기분 탓에 쉬이 잠이 들지 못했다. 이제 나는 뭘 해야 할까.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 다른 것을 찾기까지 몇 달을 방안에서만 보냈다.


     히키코모리를 자청하는 딸내미가 보기 안쓰러웠는지 엄마는 나를 데리고 나가 한바탕 쇼핑을 했다. 맛있는 고기도 잔뜩 사 먹이고 한가득 부른 배를 통통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던 길, 엄마는 하고 싶은 공부를 다시 해보는 게 어떻냐며 입을 열었다. 잔소리의 채찍질을 이렇게 하려고 하루 종일 당근을 먼저 내민 건가 싶었는데, 이어지는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하고 따듯했다. “네가 곡을 쓰는 게 힘이 들면 음악이 아닌 음악학을 공부하면 되잖아. 그러다가 하고 싶을 때 또 하면 되고. 아무튼 엄마는 네가 영화를 계속 좋아했으면 싶어.” 박사 논문을 두 개나 쓰느라 몇 달 새 흰머리가 배로 늘은 엄마는 나를 아티스트가 아닌 학자의 길로 끌고 가고 싶었는지 꿀이 뚝뚝 떨어지다 못해 홍수처럼 불어 넘치는 말들을 했다. 학비 그거 뭐 얼마나 하냐며. 자식이 하겠다면 빚이라도 내서 뒷바라지 하는 게 부모라며. 일주일 뒤 나는 정원 모집 마감을 하루 앞둔 모교 대학원에 원서를 접수했고, 한 달쯤 뒤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엄마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나는 엄마에게 속아 학자금 대출의 노예가 된 것이다.



     입학을 두어 달 앞두고 먼저 졸업한 선배 하나가 내게 조언을 했다. 애초에 연구 주제를 정해놓고 대학원에 들어오는 원우는 거의 없으니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무엇을 연구할지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주제를 미리 정하면 이에 따른 지도교수를 만나는 것 또한 수월해지니 말이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조금씩 리서치도 할 겸 나만의 연구 시간이 필요함을 느꼈다. 입학 동기 중엔 이미 상업영화에 입봉 해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음악감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가 있다는데, 나는 그에 비해 참여한 작품 수도 턱없이 적었고 다른 전공을 하다가 뒤늦게 전향해 시작이 늦었다는 거짓말 뒤로 숨기엔 애석하게도 모교라 금방 들통이 날 게 뻔했다. 원우들끼리 성적이나 논문으로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왕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니 나만의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적어도 학비가 아깝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저 경험 삼아 투자하기엔 대출의 리스크가 너무 크니 말이다.  


     ‘나 같은 덕후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라는 질문은 일주일이 넘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방, 거실 할 것 없이 서성이다 들어간 방 한 구석에서 유레카를 발견했다. 쌓아둔 DVD. 아 저 수집병 좀 고쳐야 되는데. 이런 것도 있었나? 아 이거 재밌었는데. 부가영상에 이런 게 있었지 참. 오랜만에 볼까? 하고 전원을 켠 플레이어는 다음날 아침이 되도록 꺼질 줄 몰랐다. 간간히 찾을 수 있는 음악감독들 인터뷰가 재밌어도 너무 재밌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는 DVD에서 유튜브로 이어졌고, 유튜브에서 신나는 여행을 한 덕후는 음악감독의 네임별로 해외 인터뷰를 구글링을 하기 시작했다. 번역기가 있으니 해석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넘쳐나는 떡밥들로 무엇을 만들 것인가’였다. 고리타분하게 문서로 정리하고 싶지는 않은데. 순간 이 재밌는 이야기들을 나도 보고,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있다면 꽤나 즐거운 작업이 될 것 같다는 환상이 머릿속에 스쳤다.  




“돈이 없어서 내가 직접 기타를 칠 수밖에”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두 번째 편인 ‘망자의 함’ 부가 영상에서 음악감독인 한스 짐머는 녹음실을 빠져나오며 이렇게 말한다. 영화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양반이, 그것도 빅 버젯 영화에서 음악 예산을 걱정하다니! 이거 나만 웃겨?



     두서없는 환상은 브레인스토밍을 거쳐 ‘콘텐츠 제작’이라는 하나의 아이디어로 완성됐고, 채널을 만들어 해당 콘텐츠를 발행하자는 큰 결심의 마침표를 찍었다. 형태는 무엇이 될지, 발행 주기는 얼마나 텀을 둘 것인지, 이 콘텐츠를 보는 코어 타깃은 누가 될 것인지, 결국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지. 틀을 그리니 색채는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이 모든 것들을 하나의 문서로 정리하는 데에는 이틀이 채 걸리지 않았다. 단순히 라디오 프로처럼 음악만을 들려주고 추천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재미난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려줌과 동시에 간단한 영화음악 상식이나 때로는 음악감독들을 직접 불러 인터뷰까지 할 수 있는 채널이 되었으면 했다. OSMU의 시대이니 시작은 카드뉴스로, 팟캐스트를 거쳐 때로는 칼럼식 기사를 발행하고, 최종 목적지는 영상매체가 되는 것으로 정했다. 한 번에 모든 형태의 콘텐츠를 다 발행할 수 있으면 베스트지만 몸은 하나고 제작에 시간이 걸리니 얼마 못 가 지쳐 그만두는  워스트가 되고 싶지 않았다. 하나씩 시작해 보는 걸로.  




     가독성이 좋다는 장점 덕분인지 카드뉴스는 조회수가 나쁘지 않았다. 어떤 날은 누적 조회수가 4천이 넘기도 하고, 공유를 타고 도달의 바다에서 끝도 없는 유영을 하기도 했다. 팟빵에서 시작한 팟캐스트는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오디오클립으로 넘어갔다. 지금이야 네이버 회원이라면 누구나 오디오클립 채널을 개설할 수 있지만, 그때는 초창기라 공모전을 통해 입상할 수 있었고, 네이버의 전폭적인 홍보 지원에 발행만 했다 하면 연일 메인에 오르며 신규 구독자를 늘려 갔다. 담당자랑 계약서를 쓰고 6개월치 연재를 약속했는데 반응이 좋다 보니 33회나 발행했다. 2018년 12월 첫 시작을 열은 방송은 2020년 5월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매일 대본을 썼고, 어떻게 이야기를 하면 듣는 이가 매력을 느낄지 수도 없이 고민했다.  




     오디오클립에서 다 풀지 못한 이야기는 포스트에서 이어갔다. 뜻이 맞아 함께했던 객원 에디터들이 몇 명 있었는데 최종 발행 전 원고를 체크하고 교정교열을 봐주다 보니 엉뚱하게도 나만 작문 실력이 늘어갔다. 이 때는 글을 정말 많이 썼다. 수정만 잘하고 싶다는 욕구는 어느새 하나의 글을 온전히 잘 써내고 싶다는 허영으로 번졌고 이 옷이 그저 겉치레에 지나지 않게 하기 위해 3개월짜리 글쓰기 클래스를 수강했다.(나중에 강사님의 티칭으로 매거진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소식을 전했더니 기껏 가르쳐 놨더니 마감노동자가 되었다며 혀를 끌끌 차셨다. 이 언니도 영화 매거진의 기자면서.)




     종착역으로 염두에 두었던 유튜브는 매거진에 입사하면서 발행 주기를 놓쳐 원활하게 운영하지 못했다. 그리고 대학원은 논문 심사를 앞두고 필수 과목 하나를 수강하지 않아서 장기휴학에 머무르게 되었다. 엄마는 아직도 논문을 언제 쓸 것이냐며 종종 쓴소리를 뱉는다. 석사 논문은 발로 써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으니 자존심 그만 굽히고 대충이라도 쓰란다. 엄마에겐 이 긴 연대기를 미처 다 전하지 못했지만 나는 논문 쓸 생각이 없다. 논문 대신 대본을 썼고, 원고를 썼고, 중간중간 짬이 나면 채널 로고 이미지를 계절에 어울리는 색감으로 수정하고, 하나라도 더 전할 이야기가 없나 음악감독들의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를 찾아다녔다. 안식년 이후 결국 돌아오지 못한 지도교수님의 재직 당시 수강했던 영화음악사 수업은 나에게 그야말로 시네마 천국이었다. 할리우드의 부흥과 함께 이어진 필름 스코어링*의 계보는 나에게도, 나만의 방식으로 줄곧 이어진 것이다.


     예술을 전공했다고 해서 반드시 예술품을 만들어 내는 삶을 살 필요는 없다. 만듦새의 형태 역시 정해진 규정이 없으니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해낼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 영화를 전공하지도, 영화인이라는 바운더리 안에서 살고 있다고 말하기도 모호하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영화를 만져보고 싶다던 이동진 평론가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그리고 이 글의 마지막은 꼭 이것으로 끝내야지. 대학원에서 무언가를 꼭 써야 한다면, 그것이 논문은 아닐 거야.




* 필름 스코어링(Film Scoring) : 작곡, 녹음, 믹싱, 마스터링 등 영화음악을 작업하는 데에 진행되는 모든 과정을 말한다. 국내에도 정규 교육과정이 있지만 UCLA와 NYU에는 못 미치는 수준.





오늘도 우물을 팝니다

매주 목요일 발행


현직 에디터와 번역가, 남에게 취향을 팔기보단 매번 본인이 사기만 하는 전직 마케터가 풀어내는 디깅의, 디깅에 의한, 디깅을 위한 에세이. 디깅을 처음 시작하는 분, 다수가 인정하는 프로 덕질러, 이 장르 저 장르 최애는 없고 차애만 가득한 우리 옆집 사는 분까지 두루두루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지향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술 번역가를 아시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