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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델리 Dec 13. 2020

겨울이 좋아

첫눈이 내린 12월의 어느 날


나는 겨울이 좋다. 눈도 좋다. 눈이 좋아서 겨울이 좋은 걸 수도 있고 겨울이 좋아서 눈이 좋은 걸 수도 있다. 여하튼 빌딩 사이로 불어대는 시린 바람에 눈에는 눈물이 나고 코끝은 얼얼해지고, 아무리 바쁘게 걸어도 허벅지가 탱탱해지는 겨울을, 나는 무척 좋아한다.


오늘 아침에는(백수답지 않게) 일찍 잠에서 깼다. 한 7시쯤? 평소라면 9시에나 겨우 일어나는데 이상했다. 물을 한 잔 마시고 스트레칭이라도 할 요량으로 거실에 요가매트를 펴는데 친구가 갑자기 전화가 왔다.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람? 아침이라 그런지 유난히 귀에 거슬리는 벨소리를 멈추려고 바삐 전화를 받았더니 친구는 바로 “내가 다시 걸게”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더니 곧 영상통화를 걸었다. 아침부터 왜 이래. 난 오늘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고, 아직 커피 한 모금 넘기지 못했다고.


전화를 받았더니 자기 집 창문 밖을 보여준다.

“눈이 펑펑 왔어!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새 눈이야!”

정말 그랬다. 온 세상이 하얗다. 발자국 하나 없었다.


한참을 핸드폰 너머로 친구네 창문 너머의 눈 구경을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친구가 사는 김포와는 달리, 서울 우리 집 창문 밖으로는 건물 사이에 선 차 지붕 위에만 조금 쌓여 있을 뿐이었다. 친구네가 프랜치 토스트를 먹는다고 하기에 우리도 식빵을 사러 나섰다. 잠옷을 다 벗기 싫어서 바지만 갈아입고 패딩을 걸치고 나왔더니 눈이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다. 아, 너무 좋다. 눈이 펑펑 내린다!






나는 나무가 많은 사주라서(그게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것처럼)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조금씩 우울해진다. 긴 겨울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게 딱 두 가지 있는데, 첫째는 캐럴이고 둘째는 눈이다. 크리스마스는 예쁜 케이크를 먹을 수 있는 날일 뿐이지만, 12월은 중요하다. 캐럴 시즌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월 1일이 되면 혼자 캐럴 시즌을 선포하고 모든 플레이리스트를 캐럴로 고정한다. 매년 12월이면 보는 영화도 다시 본다(보면 마음이 따수워진다). 1년 동안 내가 뭘 했나, 자꾸 우울의 늪에 빠지려고 하는 휑한 마음을 뜨끈한 욕조로 데려온다.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 캐럴과 눈이 올 거라는 희망으로 가득 찬 12월의 이 포근함이 좋다.


어릴 때는 내가 눈을 유별나게 좋아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었는데, 나이를 먹고 나니 눈을 좋아하는 게 유별나게 느껴진다. 어릴 때는 눈을 좋아하는 게 당연하다. 눈이 오면 차가 막힐 걱정이나, 미끄러져서 어디가 부러지진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저 하늘하늘 떨어지는 눈을 입으로 받아먹으며 뛰어다니다가 많이 쌓이면 눈사람이나 만들면 되고, 호전적인 친구가 있다면 눈싸움도 할 수 있으니까.


아침으로 프랜치 토스트를 부쳐 먹고 멀리 있는 친구에게 사진을 보내며 서울은 눈이 왔다고, 그래서 너무 좋다고 흥분해서 말했더니 대뜸 이런다. “아직 젊네. 눈이 좋고.”(정말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내가 아직 차도 없고 고관절 골절 같은 걸 걱정하기에는 좀 젊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눈이 오는 오늘 같은 날에는 창문을 열어놓고 눈이 내리는 걸 보면서 캐럴을 들으면 그만이다. 어디 나갈 생각은 없고 차가 막힐 걱정은 더욱 없고 고관절 걱정은 더더욱 없는 상태로.






나풀나풀 떨어지는 눈을 보면 가슴이 막 설렌다. 여러가지 기억과 감정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특히 캐나다에서 지냈던 날들이 생각난다. 눈썹에 얼어서 바스락거리는 눈물을 매달고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을 걸어 다녔지. 누가 앞서 걸어간 구멍에 발을 맞춰 넣고 걸으면 힘은 덜 드는데 보폭이 달라 자꾸 꼬꾸라지고 말이야. 눈밭에서는 아무렇게나 넘어져도 늘 눈이 폭신하게 안아줬어. 어울리지 않게 참 포근했는데. 옷 젖을 걱정 없이 눈밭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별이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 않는 새까만 하늘에 입김을 불어넣다 보면 어디서 왔는지 오로라가 쓱 시야로 들어왔다가 사라진 적도 있었지.


한얼죽맥(한겨울에 얼어 죽어도 맥주)이라고 일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맥주를 한 상자나 사서 낑낑대며 집으로 걷다가 다리가 얼어서 감각을 잃은 적도 있었고. 너무 추워서 이대로 가다간 죽겠다 싶어 카페에 들어가면 안경에 서린 김이 주문한 핫 초콜릿이 나온 뒤에도 없어지지 않았어. 난감해하며 카페 밖으로 나오면 마법같이 사라지고 말이지.


눈과 겨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서울에는 눈이 한참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펑펑 내리면 좋겠는데.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보니 이미 눈이 그쳐있다.


흠, 그래도 실망은 이르지.

눈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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