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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델리 Dec 31. 2020

이상한 한 해

한 해를 보내는 12월의 어느 날


이상한 한 해였다. 정말 이상했다.


올해 뭘 했더라. 일단 퇴사를 했다. 퇴사 전에 회사 내에서 코로나 바이러스와 관련된 안내 메일을 받긴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독감 정도라고 여겼다. 중국으로 출장은 자제하고 추후 공지 메일을 참고하라고, 메일 제목에 빨간 글씨로 강조가 되어 있었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1월의 마지막 날에 도비 짤을 바탕화면으로 올리고 회사를 나서면서도 딱히 걱정은 하지 않았다. 걱정을 하기에는 너무 아는 게 없었다.


이름에서 상큼한 맥주를 떠올리게 하는 이 알 수 없는 질병이 2월이 돼서는 한국에 들어오더니 날이 풀릴수록 전 세계로 퍼졌다. 어떤 나라는 도시를 봉쇄했고, 또 어디는 아예 나라를 봉쇄했다. 입국 금지조치로 여행은 계획조차 할 수 없었다. 3월에 WHO에서 결국 판데믹을 선언했다. 오늘까지 무려 8천3백만 명 넘게 확진되었고 180만 명 넘게 사망했다. 아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퇴사 후 외국으로 짧게나마 공부하러 가려고 했던 계획은 틀어졌고, 동거인은 집에서 근무를 하기 시작했다. 꼼꼼히 새어보진 않았지만, 올해 회사에서 근무한 날 보다 자기 방에서 근무한 날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우리는 링 피트를 시작했고 밤에는 답답해서 온 동네를 배회했지만 체중은 계속 늘었다.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쓰면 쓸수록 점점 더 답답해졌다. 어디서든 ‘반드시’ 써야 한다는 게 고난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


그래도 우리는 끼니를 걱정하거나 화장지에 집착하진 않아도 되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건강을 잃고 일을 잃는지 보고 들었으니까. 치사율이 높진 않았지만 후유증이 심한 이 질병은 실질적인 위험이었고, 어디도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우리는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았고, 아주 가끔 친구들이 놀러 오더라도 한두 명만 불렀다.


집에 초대하기 전에 어색하게 ‘어, 음... 나는 놀러 오면 좋은데, 너는 괜찮아?’라고 물어보는 일, 약속 전 날 혹시 열이나 다른 증상이 있지는 않는지 물어보는 일, 집에 도착한 친구의 체온을 재고 바로 손을 씻을 수 있게 욕실로 안내하는 일.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도 단지 사람을 만났다는 것만으로 묘하게 죄책감이 들었다. 가고 싶은데도 못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못 만나고.


그렇게 이상했던 한 해가 간다.


얼마 전에 아주 오래전에 종영한 HBO의 전설적인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를 다시 봤다. 길을 걸어가는 그 누구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게 어찌나 이상해 보이던지. 나도 모르게 “아무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어!”라고 육성으로 외쳤다. 마스크를 쓰는 대신 손에 손에 커피나 베이글, 핫도그, 프랫첼 등을 들고 다니면서 깨작깨작 먹고, 따닥따닥 붙은 테이블에 모여 앉아서 밥을 먹고, 그것도 모자라서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앉을자리조차 없는 바에 가서는 끼리끼리 둘러서서 술을 마셨다. 마스크도 사회적 거리두기도 없었지만, 아무도 누구에게 병이 옮을 가능성을 점치지 않았다. 운 나쁘게 이상한 남자를 만나 키스 대신 얼굴 핥음 당하거나 정말 책임감 없는 나쁜 놈을 만나면 성병에나 걸릴 뿐이었다.


다시 그런 태평한 날들을 만날 수 있을까.


오늘 푹 자고 내일 일어나면 모든 게 장난이고 꿈이면 좋겠다는 유치한 생각을 해본다. 사실 네가 아는 2020년은 오지 않았고, 올해가 바로 2020년이야! 이제 그만 끔찍한 꿈에서 깨어나 야무지게 살아보렴. 여행도 맘껏 다니고. 친구들이랑 주말마다 모여서 보드게임도 하고 말이지.


아, 아니다. 이미 지나간 해는 보내주고 2021년이 나은 해가 되기를 바라는 게 낫겠다. 제발 내년에는 사람들이랑 맘껏 놀아도 되는 한 해 보내게 하소서. 외국 여행은 바라지도 않으니 공기 좋은데 가면 마스크라도 잠시 벗을 수 있게 하소서. 올해 힘들었던 많은 분들이 내년에는 모두 대박 나게 하소서. 내년에는 선택할 자유를 허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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