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델리 Jan 13. 2021

할 일이 없어서, 쇼핑

눈이 잔뜩 쌓인 1월의 어느 날


어제 주문한 그릇 세트가 왔다.

몇 달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코렐로 질렀다. 지루하지만 고민의 과정을 써보자면 이렇다.


부정.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다. 그릇이란, 음식을 담을 수만 있으면 그 소임을 다하는 거 아닌가? 엄마가 봤으면 안 버리고 왜 이런 거 쓰냐고 혼날 만큼 이가 나간 그릇도 그냥 썼다. 음식을 담는 데는 문제가 없었으니까. 내가 이사 나올 때 엄마가 한테 얻은 그릇 몇 개와 동거인이 쓰던 정체불명의 꽃무늬 그릇(대체 어디서 산거야)이 합쳐졌고, 그 위에 그때그때마다 필요에 의해 산 그릇들이 더해졌다.


분노. 코로나 후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음식을 직접 해 먹는 일이 많아지자 그릇이 점점 거슬리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이가 나간 그릇을 써야 하는가. 언제까지 다이소에서 산 2천 원짜리 접시에 만족해야 하는가. 다이소 접시는 가성비 훌륭하지만, 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래 써서 접시에 코팅이 흉물스럽게 벗겨져 쓸 때마다 내가 코팅도 같이 먹은 건 아닐까 의심이 들어 찝찝했다. 2천 원짜리 그릇조차 바꾸지 않고 대체 몇 년을 쓴 거야.


타협. 나도 예쁜 그릇이 갖고 싶어. 기왕이면 세트로. 결혼한 친구네 놀러 갈 때마다 쓴 깨끗하고 귀엽고 편안한 코렐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근데 꽤 비싸구나, 그릇 세트란. 백수가 이런 거 욕심내도 되나.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몇 달을 그냥 지냈다. 설거지를 할 때마다, 이가 나간 밥공기에 밥을 풀 때마다, 코팅이 벗겨진 접시를 쓸 때마다, 그 외에도 시시때때로 그릇에 대해 생각하면서. 당근 마켓에 중고로 나온 미개봉 그릇 세트에 좋아요를 눌러 저장해 놓고, 코스트코 홈페이지에서 수시로 코렐 그릇세트를 검색해보면서. 친구가 아웃렛에도 코렐을 판다기에, 친구 차를 얻어 타고 김포에 있는 아웃렛 매장까지 출동했다(가격은 고만고만이라 안사고 말았지만).


우울증. 나는 그릇 세트를 가질 수 없는 사람인가. 일해서 수입이 있을 때 왜 나는 그릇 세트를 사지 않았을까. 왜 바보 같이 그릇은 ‘음식 담는 용’으로만 한정해서 생각하고 쓰면서 느끼는 즐거움은 생각하지 않았는가. 과거의 나여. 동거인은 그냥 공동 생활비로 코렐 세트를 사라고 부추겼고, 그 와중에 코스트코 홈페이지에서 딱 마음에 드는 걸 발견했다. 코렐 플라워 힐 디너웨어 세트 17P. 밥공기 4, 국공기 4, 앞접시 4, 소접시 2, 중접시 2, 삼절 접시 1. 색색의 들꽃이 17개의 그릇에서 살랑거리며 춤추는 귀요미 세트. 가격은 8만 원이 좀 넘었다. 일단 장바구니에 넣었다. 다시 고민에 들어갔다. 내가 정말 이게 필요한 게 맞을까. 그릇이 없는 것도 아닌데 괜히 오버하는 게 아닐까. 설령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지금 사는 게 맞을까.


수용. 그래! 결심했어. 질러버리자. 자려고 누우면 눈 앞에서 아른거리는 탓에 결심을 굳게 하고 결제할 마음으로 장바구니로 다시 들어갔는데, 이럴 수가. 내가 넣어놓은 세트가 사라졌다. 그 사이 품절이 됐나 보다. 이제 마음을 먹었는데... 진짜 결제할라고 그랬는데... 한 번 마음에 드는 세트를 보고 나니 다른 건 같은 코렐이어도 너무 밋밋하거나 너무 어른스럽거나 혹은 그냥 못생겨서 싫었다. 돌아와, 플라워 힐. 나의 귀여운 들꽃들아.






거대한 박스 안에서 뾱뾱이로 똘똘 말린 코렐 박스를 꺼냈다. 포장을 풀고 박스를 앞에 놓자 기쁨의 한숨이 나왔다. 마침 밖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크리스마스 아침에 선물을 뜯는 기분이 들어 더 마음이 설레었다. ‘CORELLE’이라고 정갈하게 쓰인 박스를 열자 안에서 여러 개의 작은 박스가 나왔다. 작은 박스를 하나씩 열 때마다 그릇이 튀어나왔다. 귀여운 들꽃이 들어간 그릇이 총 30개. 어떻게 된 일이냐고?


작년에 꼭 읽겠다 다짐했지만 미처 읽지 못하고 새해 벽두에 꺼내 든 책, 수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 책, 바로 신예희 님의 <돈지랄의 기쁨과 슬픔> 덕분이다.


매일 쓰는 물건일수록 좋은 걸로 써야 한다.
이렇게 써놓고 다시 읽어보니,
음 너무 당연한데? 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실제로는 정체불명의 죄책감이 들어서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
지갑을 열기 직전, 내가 나에게 말한다.
성능 다 거기서 거기야. 그냥 싼 거 사.
......
이제 알겠다. 내 기분 좋으려고 사는 물건은
내 마음에 들어야 한다.
오만가지 제품을 쫙 깔아놓고서
그중 가장 가성비 좋은 걸 고르는 게 아니라,
첫눈에 확 꽂히는 걸 집어야 한다.
그러니 저렴이로 만족할 수 있을 리 없지.

<나는 왜 푼돈에 손을 떠는가> 중에서


나는 돈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나에게 너무 짜다. 나를 위해 쓰는 돈은 다 푼돈인데도, 늘 그 푼돈에도 손을 덜덜 떨었다. 분명 돈을 벌고 있었을 때도 멀쩡한(하진 않지만 어쨌든 음식은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있는데 새 그릇을 사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했겠지. 그러니 지금 와서 내 찬장이 이 모냥이 된 것이다. 내 마음은 딱 이게 마음에 든다고 외치는데, 애써 눈을 돌려 저렴이를 본다. 그냥 마음에 드는 걸 마음에 든다고 인정하고, 그걸 갖기 위해서 다른 지출을 줄이던지 어디 가서 돈을 더 벌던지 하면 될 일인데. 왜 이렇게 피곤하게 사는 것이여.


새해 벽두에 잘 고른 책 덕분에 첫눈에 확 꽂힌 나의 들꽃 그릇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할 용기를 얻었다(라는 건 결제할 굳은 마음과 카드를 가지고 코스트로 홈페이지에 매일 들러 ‘코렐’을 검색해봤다는 뜻이다). 신이 도우셔서 다시 재고가 들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고난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코렐 플라워 힐 디너웨어 세트가 1개가 아니라 2개가 올라와 있었다. 원래 마음에 두고 있었던 17P 세트와 난데없는 30P 세트가 나란히. 30P 세트의 가격은 14만 원이 넘었다. 예전의 나였으면 그냥 17P 세트를 사고 말았을 텐데, 나희님의 책을 읽은 새로운 나는 자꾸만 30P 세트가 눈에 들어왔다.


그냥 4인 기준 17P를 살까? 근데 집에 손님이 오거나 하나라도 깨지면 어떻게 해. 한국에는 이 세트가 잘 없는 것 같던데, 코스트코에서도 더 안 팔면 어디서 구하지? 다시 이런저런 그릇들로 누덕누덕 기운 찬장은 보고 싶지 않아. 그럼 6인 기준 30P를 살까? 둘이 사는 집에 이렇게 큰 세트가 필요한가? 그릇 세트를 처음 사보는데 이렇게 크고 비싼 걸 가져도 되는 걸까. 다음에 눈에 띄면 무조건 산다던 굳은 마음은 어디로 가고 다시 고민의 수렁에 빠졌다.


어허, 나희 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첫눈에 확 꽂히는 걸 집으라고 하지 않으셨는가!

고민할 시간에 차라리 생산적인 일을 해라!


그렇게 3개월 할부로 코렐 플라워 힐 디너웨어 세트 30P를 주문하게 된 것이다. 박스에서 하나하나 그릇을 꺼냈다. 그릇 바닥에 스티커가 2개씩 붙어있었다. 이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지. 스티커 60개를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귀여운 들꽃들아 이제 목욕하자. 세제를 조금 풀어서 따뜻한 물에 그릇을 하나하나 뽀득뽀득 닦았다. 밥공기 6개 (아담해서 마음에 들었다. 밥그릇이 크면 많이 먹혀...), 국공기 6개 (넉넉해서 마음에 들었다. 국그릇이 작으면 넘쳐...), 앞접시 6개(만세! 드디어 우리 집도 일체감 있는 앞접시를 쓰는 집이 되었다!), 소접시 4개, 중접시 3개, 삼절 접시 1개, 대접시 2개, 큼직한 냉면그릇 2개까지. 싱그럽게 빛나는 귀여운 녀석들.


물기가 마른 그릇을 잘 포개서 찬장에 넣었다. 아, 예뻐. 너무 예뻐. 칙칙했던 찬장이 화사해졌다. 저녁으로 떡볶이를 사 와서 평소 같으면 그냥 봉지째 먹을 것을, 괜히 접시를 꺼내서 밑에 살짝 받쳐본다. 예쁘다, 예뻐. 저녁을 먹자마자 신나서 설거지를 한다. 건조대에 올라간 접시를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예뻐서 그래, 예뻐서.


매일 이렇게 그릇을 쓸 때마다, 설거지를 할 때마다, 찬장을 열 때마다 웃음이 나온다면 그 돈 값은 톡톡히 하는 셈이다. 지금껏 한 번도 가져보지 않은, 가져볼 생각도 하지 않은 것들을 지난 1년 동안 많이 갖게 되었다. 갑자기 물욕이 폭발한 걸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전에는 바쁘고 정신없어서 신경 쓰지 못했던 많은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볼 시간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때는 필요하지 않았던 것들이 지금은 필요하다. 아니, 사실 예전부터 필요했던 것들인데 모르고 누르고 살았다.


지금 이 시간은 그냥 공백의 시간이 아니다. 그동안 보살피지 못한 나를 아주 세세히 살피는 시간이다. 허겁지겁 채우기만 했던 것들은 잘 정리하고, 미처 채우지 못했던 것들은 찬찬히 채운다. 나에게 인색했던 시간들을 돌아보고 부족했던 나를 구석구석 챙겨준다. 삶을 풍요롭게 해 줄 새로운 취미도 가져보고, 삶을 편안하게 해 줄 물건도 사서 익숙해질 시간도 충분히 갖는다. 모두 돈과 시간이 드는 일이지만 꼭 필요한 일이다.


돈은 미래의 내가 벌 테니까.

시간이 많은 오늘의 나는 좀 더 살게.



매거진의 이전글 이상한 한 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